희곡창작의 길잡이
이강백, 윤조병 지음
평민사 펴냄
2010년 초판
2018년 개정판 발행

멋진 용이 물을 뿜어대는 대학의 철학과를 다니다가 재수해서 캠퍼스가 작디작아 고등학교보다 못할 지경인 우리 대학 신방과로 옮긴, 언제나 목장갑을 끼고 다녔는데 정작 손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던, 바위가 되리라 열심히 외쳤던, 바나나를 무척 좋아했던, 어학 연수를 준비하던 중 교통 사고로 먼저 간, 언제나 심각한 고민이 있는 표정이었으나 웃을 때는 천사 같았던, 대학 동기가 교내에서 연극을 한 적이 있었어요. 

주연으로요. 연극 제목이 신의 무슨 뭐였죠.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요. 제가 처음 본 정극이었습니다. 재미는 없었고 내용은 공감이 안 갔어요. 그 많은 대사를 어떻게 다 외웠나 그것만 신기했죠.

연극에 잠깐 관심이 생겨서 아마추어 연극단에 들어가 배우를 하려고 했습니다. 배우 훈련 과정은 흥미롭더군요. 그때 훈련용 희곡 교재가 이강백의 알이었습니다. A4 용지에 인쇄된 대본이었죠. 잘못 친 글자가 꽤 보였어요. 그래도 대본을 읽으면서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모습을 상상하는 재미에 푹 빠졌죠.

배우 지망을 포기한 후 단막 희곡을 하나 써 보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춘문예 첫 투고를 그 희곡으로 했어요. 당선은 안 되었지만 놀라운 체험이었습니다. 내가 만든 인물을 내가 만든 무대 위에 세우고 이런 말 저런 말을 시켜서 살아 움직이게 하니, 캬아, 이거보다 재미있는 일은 없다 싶었죠.

요즘은 연극이나 희곡을 보지도 읽지도 생각지도 느끼지도 않죠. 그런 거에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이 초현실주의 소설에서 주인공이 벽으로 들어가는 장면만큼이나 믿기지 않아요. 추억의 한 쪽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강백 희곡집은 사 권 이후로는 흥미가 없어서 오 권 이후로는 아예 관심을 끊었어요. 그러다 이 책을 보았습니다. 드디어 창작의 비밀을 알려 주시려나. 이런 책 낼 때도 되셨죠. 1971년에 등단하신 후로 지금까지도 꾸준히 희곡을 쓰셨으니, 이제 비법을 말하실 때가 온 거죠. 그런데 혼자 쓰신 게 아니라 윤조병이라는 분과 같이 쓰셨네요.

자, 이강백이 말하는 희곡 창작 비결은 뭘까요? 아니 이강백과 윤조병이 함께 말하는 희곡 쓰기는 어떤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기본에 충실하라는 거였습니다. 너무 당연해서 희곡을 쓰려는 사람이 지나치는 것이었죠. 이 책은 '세팅이란 무엇인가?'로 시작합니다. 연극은 무대에서 하는 겁니다. 그러니 그 무대부터 생각하는 겁니다. 이야기부터가 아니고요. 

설령 이야기부터 생각났다고 해도 다시 무대를 생각해야 합니다. 희곡은 바로 그 무대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생생하게 일어나서 눈에 직접 보이는 모습을 글로 쓰는 것이니까요. 영화처럼 써서도 소설처럼 써서도 시처럼 써서도 안 되는 것이죠. 연극이 되게 써야죠.

이 책이 전하는 창작 비결은 수집입니다. 현실에서 연극에 쓸 만한 인물을 잘 관찰했다가 공책에 잘 적어 두라는 겁니다. 그 사람의 말투, 옷차림, 습관, 꿈, 욕망, 좌절, 기억 등. 물론 희곡에서는 이야기에 알맞게 변형을 해야겠죠. 장소도 잘 봐두고 기록해 두랍니다. 그런 장소에 일어날 법한 일들에 대해서 잘 생각해 두라는 거죠. 그 장소가 곧 연극의 무대가 될 수 있으니까요.

희곡 창작 일반론이에요. 이강백 특유의 내밀한 숨결 같은 건 안 보이더군요. 그래도 두 분의 오랜 창작 경험에서 나온 충고는 역시 남다들 분들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장인의 손결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2011.09.07

Posted by love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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