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451]
레이 브래드버리
황금가지
이제는 고전이 된 소설 '화씨 451'은 레이 브래드버리가 1953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작가는 책이 없는, 책을 불사르는 암울한 미래사회를 그리면서 오늘을 예언했다. 혼자서 곰곰이 생각할 여유가 없는 생활. 텔레비전 방송과 광고에 중독된 사람들. 대화가 거의 없는 가족.
어떤 존재의 진정한 의미, 어떤 존재의 소중함을 느끼고자 한다면 그 존재가 없는 상황을 생각해 보라. 공기의 소중함을 알고 싶다면, 당장 진공 상태를 상상해 보라. 책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화씨 451'를 읽으면서 독서가 금지된 사회를 그려보라.
책이란 무엇인가. 파버 교수가 방화수 몬태그에게 하는 말이다. "책이란 단지 많은 것들을 담아 둘 수 있는 그릇의 한 종류일 따름이니까. 우리가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것들을 담아 두는 것이지. 책 자체에는 전혀 신비스럽거나 마술적인 매력이 없소. 그 매력은 오로지 책이 말하는 내용에 있는 거요."(136쪽)
책이 없는 사회에서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그 사회에서 사라진 것은 무엇인가. 파버 교수는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정보의 질이다. 책은 세밀한 짜임새를 지니는데, 좋은 책일수록 진실한 삶의 이야기를 담는다.
둘째, 그 정보의 좋은 질을 충분히 되새길 수 있는 여기 시간이다. 여기서 여가란 일하지 않는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생각할 시간을 뜻한다. 우리는 책을 읽다가 잠시 책장을 덮고 곰곰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앞서 말한 두 가지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책에서 읽고 배운 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권리다.
우리는 지금 책이 없는 사회에 살고 있진 않으나 책 읽기를 싫어하는, 책을 읽을 시간적 여유가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바쁘다. 뭔가 생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세상은 바삐 돌아간다. 나는 행복한가. 소설의 주인공 몬태그는 현실에 의문을 품으면서 책 읽기에 빠져든다. 천천히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믿음을 실행한다.
작가는 후기에, 등장인물 이름을 어디서 따온 것인지 뒤늦게 알았다고 밝혔다. 몬태그는 제지, 파버는 필기구 회사의 이름이다.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처음 읽은 것은 아주 오래 전이었다. 이십대 때였다. 도서정가제에 책 읽는 사람이 줄어든다고 워낙들 요즘 말이 많아서, 문득 이 소설을 다시 읽고 싶었다. 읽다가 이런 문장을 만났다. "대중들 스스로가 책 읽는 것을 거의 포기했소."(143쪽) 소설에서 묘사하는 디스토피아는 요즘 우리 사회와 비슷하다. "제대로 생각이 박힌 사람이라면 세상에 누가 아이를 낳아 길러요? 누구나 다 아는 일인데!"(157쪽) 책도 상품인지라 마케팅을 하면서 팔리긴 한다. 하지만 정말 읽고들 있는 걸까? 예쁜 인형처럼 사모으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레이 브래드버리를 싫어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이 확연하게 구분된다.
이야기의 측면에서 보면, 레이 브래드버리는 이야기꾼이라고 부르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등장인물이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강력하지도 특징이 있지도 않다. 작가가 설정한 상황에 이리저리 움직이는 인형에 가깝다. 단편적인 인물이다. 깊이가 전혀 없다. 사건 전개와 결말도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상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만 풍기다 끝나거나 냉소적인 문명 비판으로 일관한다. 그러니 재미없다. 다 읽고나면 덜 쓴 것 같다.
문체의 측면에서 보자면, 레이 브래드버리는 최고다. 운율이 있으면서도 감각적인 문장을 썼다. 번역문에서는 느낄 수 없으나 영어 원서로 읽으면 경이롭다. 시적인 산문이다. 멋지다.
나는 이 작가의 영어 원서를 읽고 절망에 빠졌었다. 문장을 이 사람보다 더 잘 쓸 수 없다. 나는 끝났다. 젊은 시절에는 문학 야망이 컸고 뭔가에 빠지면 정신을 차리지 못했었다. 이제 나이 들어 다시 읽어 보니 그렇게 대단하진 않다. 그래도 내 무의식 어딘가에 레이 브래드버리는 내 문학의 첫사랑으로, 아름다운 문장의 여신으로,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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