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L'Amant 1984년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민음사 펴냄
2007년 발행
차분하면서도 격렬한 문체
작가의 목소리가 마음에 든다. 읽으면 읽을수록 글이 쓰고 싶다. 문체가 차분하면서 격렬하다. "나는 글을 쓴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도 글을 쓰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믿으면서도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닫힌 문 앞에서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34~35쪽)
사건을 시간적/논리적 순서가 아니라 생각나는 대로 쓰고 있어서 읽기가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프루스트에 익숙한 뒤라서 수월하게 읽었다.
문장 호흡이 자연스럽고 매끄러워 잘 읽힌다. 김인환 교수가 문장을 많이 다듬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의 번역 문장에는 문학 전공 학자들의 고지식한 직역과 소설가 번역자들의 멋대로 의역이 없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을 단순히 자전적 소설이라 하기에는 모호하고 복합적이다. 소설인가, 회고록인가? 글의 화자는 '나'라고 했다가 '그녀'라고 했다가 왔다갔다 한다. 1인칭과 3인칭으로 오가며 떠오르는 기억에 따라 글을 써내려간다. 기억의 공백을 상상으로 채운다.
가난한 백인 여자 아이와 백만장자 중국인 남자의 사랑 이야기? 보기에 따라서는 섹스만 줄기차게 해댄 한때의 육체적 쾌락이자 현실 도피다. 추억은 말하는 이를 통해 아름답게 채색되기 마련이다.
문학은 기억과 상상의 언어 결과물이다. 사실을 알고 싶다면 시, 소설, 희곡, 수필이 아니라 역사책이나 언론 매체물을 읽으면 그만이다. 사실 이상의 것, 경험 이상의 것, 인생 이상의 것을 경험하고 이해하고 느끼고자 하는 이들한테 문학 작품이 필요한 법이다.
작가의 회상하는 목소리는 강물의 이미지와 겹치며 조금씩 나아간다. "그 영상은 강을 건너는 동안 줄곧 이어졌다."(11쪽) 전반적으로 어둡고 강렬한 감정의 문장으로 지옥 같은 가족사와 자신의 첫사랑을 그려낸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단절적으로 말한다.
영화 '연인'에서는 쇼팽 음악이 흐르며 뒤늦게 사랑을 깨달은 소녀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소설 '연인'에서는 간결하고도 강한 마지막 문장이 오랫동안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잠깐 뜸을 들인 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137쪽) 작중 화자가 사랑을 재확인하며 소설은 끝난다.
문장과 문장, 사실과 사실, 감정과 감정 사이에 긴장감을 조성하며 강렬한 느낌을 남기는 문체가 인상 깊었다.
죽음과 절망 속에서의 사랑
이 책을 오랜만에 읽었다. 내 기억과 달리, 온통 죽음과 절망으로 가득했다. 그럼에도 몇 문장이 이 모든 어둠을 걷어낸다.
"우리는 연인이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그는 잠깐 뜸을 들인 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
이 문장을 다른 소설에 그대로 끼워 넣었다면 흔해 빠진 로맨스소설의 유치한 대사라고 여겼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만 빛은 강렬한 것이다. 문장은 어둠 속에서 깊은 여운을 남긴다. 소설은 예술이 된다.
소설과 영화에서 여주의 묘사는 비슷할 뿐 똑같지는 않다. 영화 쪽에서는 순화한 모양새다. 영화는 직접 보여주지만 소설은 보여지는 것을 상상하게 하는 거라서 다를 수밖에 없다. 소설은 영화에 비해 독자의 상상력을 많이 허용한다.
여자 주인공의 모습은 광대에 가까운 것이다. 마르고 어리고 예쁜 소녀한테 엉뚱한 모자와 황당한 신발이라니. "광대 같은 모자를 쓰고 금박으로 장식된 구두를 신은 나"라고 묘사되어 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어머니는 작가와 글쓰기를 존중하지 않았다. "난 그따위 일에는 관심 없다. 그건 가치도 없고, 직업이라고도 할 수 없으니, 일종의 허세에 불과해. 유치한 생각이야."
딸이 쓴 책, 그것도 여러 나라에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가 된 책 '연인'에 이렇게 묘사되었다. "어머니는 미친 여자였다." 그렇게 불멸의 불명예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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