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의 회전
헨리 제임스 지음
이승은 옮김/열린책들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은 유명한 유령소설이다. 니콜 키드먼 주연 영화 '디 아더스'가 이 이야기의 틀거리를 가져다 썼다. 유령 이야기를 좋아하거나 쓰는 사람들이 자주 언급하는 작품이라서, 나는 헨리 제임스의 그 많은 소설들 중에 유일하게 이 소설의 제목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사의 회전. 제목이 특이하지 않은가. 언젠가 읽어야지 했는데, 때마침 열린책들 세계문학 전자책에 있길래 냉큼 읽었다.
유령 이야기로는 내가 읽은 소설들 중에 가장 심심했다. 정말 정말 무섭다고 이야기에서 여러 번 강조한다. "지금까지 저 말고는 아무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야기일 겁니다. 정말 너무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나는 정말 정말 하나도 안 무서웠다. 읽다가 졸려서 잤다. 사건 전개보다는 등장인물의 의식을 표현하는 데 치중하는, 작가 특유의 작풍 때문이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의식을 모호하게 표현한다. 정말 이게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불확실하다. 등장인물이 유령을 봤다고 하지만 정말 본 것인지 그냥 자기만의 착각인지 알 수 없다. 이야기를 하는 자를 신뢰할 수 없다. 이야기는 명확하지 못하게 되지만 해석의 가능성은 다양해진다.
액자식 구성으로 이야기의 객관성과 신뢰성을 높이려는 듯 보이지만 글에서는 구멍이 숭숭 뚫린 치즈 조각처럼 의심스러운 문장이 많다. 읽다 보면, 도대체가 믿음이 안 간다.
이야기를 끝까지 읽었어도, 당신은 남자 아이 마일스가 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뭔가 나쁜 짓을 했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다. 죽었다는 남녀 두 사람의 나쁜 짓도 명확히 알 수 없다. 둘이 성교를 했다는 암시가 있다. 어떻게 왜 죽었는지도 당최 알 수가 없다.
제임스의 소설은 죄다 이런 식이다.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고 모호하게 이야기해서 기묘한 효과를 거둔다. 그 효과를 애써 맛보지 않고 단호하게 해석하는 이들도 있을리라. 그런 이들한테는 '죽은 하인들의 유령이 두 아이의 영혼을 사로잡으려는 이야기'로 명쾌하게 정리되리라.
애써 작가의 의도대로 해석해 보자면, 유령의 목격자가 겪는 불안한 의식을 느껴 공포감에 사로잡혀야 한다. 하지만 나는 전혀 무섭지 않았고 내내 불만만 쌓였다.
유령 자체보다는 자신의 생각이 더 무서운 법이다. 나사처럼 계속 특정 생각에 사로잡혀 깊게 파고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다. 그런 나사가 이 이야기에는 두 개나 있다.
첫째, 타인의 말.
내(가정 교사)가 유령을 정말 본 것인지 믿을 수 없지만 두 아이도 봤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유령이 있는 것이다.
둘째, 집단 의식.
사회적 압력으로 그렇게 믿도록 하는 것. "인간의 도덕이라는 나사를 한 번 조이기를 요구하는 압력"인 것이다. 자신(가정 교사)은 절대 선이며 죽은 하인 둘을 일방적으로 나쁜 사람이라고 몰아붙이고 절대 악으로 규정한다.
나의 생각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조정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이 소설에서 정말 무서운 것은 '유령'이 아니라 특정 생각으로 조정되는 '의식'이다.
나 스스로 나를 기만하며 허위 의식 속에서 위선과 허구의 삶을 사는 것이다. 유령처럼 사는 것이다. 그래서 '나사의 회전'은 무서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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