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작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군조신인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에 등장했다.
그의 첫 작품이다.
하루키의 작품에 왜 90년대 우리 나라 젊은이들이 공감하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는데, 두 가지만 생각해 본다.
우선, 일본 대학 사회의 변동과 우리 나라 대학 사회의 변동이 비슷하다는 점 때문이다. 비슷했지, 똑같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특정한 학생 운동의 불꽃이 사라진 후, 젊은이들이 느끼는 공허감과 상실감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대학 사회는 1980년대에 전두환 노태우 군사 정권과의 치열한 투쟁으로 활발했었다. 그 후 1990년대는 80년대 학번들은 그 시대를 추억을 간직하고 90년대를 살며 방황하거나 현실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다.
일본 대학 사회는 1960년대 중후반에 전공투(全共鬪) 운동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그 전공투 세대들은 1970년대에 방황하거나 적응하려고 애썼다. 소위 우리나라에는 80년대 운동권 학생들, 일본에는 60년대 전공투 세대들이, 어쩌면 이 두 나라의 젊은이들이 사회에 느꼈던 배신감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1970년 8월 8일부터 8월 26일까지의 이야기다. 전공투 운동이 막을 내린 해 이야기. 우리 나라에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상실의 시대(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에도 이 전공투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90년대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하루키의 소설에 공감한 것은, 알게 모르게 소설 속에 스며들어 있는 혼란스러운 대학 생활과 그 시기 뒤의 느끼는 감정들이 비슷하게 맞아 떨어졌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다음으로, 소설가 장정일이 지적한 것처럼 소설 여기 저기 뿌려 놓은 미끼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독자들과 공감할 수 있는 여러 팝송과 소설들. 우리는 같은 음악을 들었고 우리는 같은 책을 읽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커뮤니케이션한다. 이것은 부수적인 것이지만 꽤 타당한 이유로 볼 수 있다.
하루키 소설은 가벼운 표현으로 무거운 주제를 소화한다. 사회적 억압과 자아 상실감을 간접적으로 비유를 통해 말한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상당히 가볍고 경쾌한 문장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뚜렷한 줄거리이나 극적 반전이나 대립도 없이 물 흐르듯 전개된다. 잘 읽어보면, 이 가벼움 속에 너무나도 무거운 절망과 진지한 주제들이 담겨 있다.
이 소설에는 대학생인 나와 대학을 중퇴한 '쥐'가 제이스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 그 이야기에 몇 가지 이야기들이 같이 곁들어 전개된다. "완벽한 문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이렇게 시작하는 이 소설은 그 첫 문장과 달리 완벽한 문장과 완벽한 절망이 담겨 있다. 하루키는 여러 이야기를 파편적으로 뿌려 놓으면서 결국은 그 모든 파편들이 하나로 통합된다. 놀라운 일! 그 파편적인 모든 이야기들은 잘 읽어보면, 절망감과 상실감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하루키는 미국 포스트모더니즘 작가 커트 보니것한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커트 보니것가 '제5도살장'에서 참혹한 죽음을 목격해야 하는 그 충격을 유머로 극복하듯, 하루키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커다란 상실감과 절망감을 유머로 극복한다.
이런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문제점, 혹은 특징일 수도 있겠다, 중에 하나는 오독(誤讀)의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소설이 오독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경우 더 심하다. '제5도살장'은 그냥 우스꽝스러운 SF로 읽혀질 가능성이 많다. 드레스덴의 참혹한 살육은 독자의 기억에 남지 않을 수도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그냥 웃기는 청춘 소설로 읽혀질 수도 있다. 상실감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독자가 해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쿤데라의 소설들이 그냥 가벼운 사랑 이야기로 읽혀지는 것처럼.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도 독자가 소설에 대한 비판으로 읽지 않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루키도 쿤데라도 커트 보네커트도 전세계 젊은이들이 열광적으로 읽었다. 그러나 과연 그 작가들의 고통을 읽었는가는 의문이다. 우리 나라 독자들은 하루키를 열광적으로 읽었다. 그러나 하루키의 고통을 읽었는가 묻고 싶다. 단순히 하루키의 재미있고 단순한 문장 읽고, '즐거웠다' 하며 책장을 덮을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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