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
-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 박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작가 자신이 쓴 연보에 작가의 우스개가 넘친다. 소개하면 이렇다. 1950년대, 따분했다. 1983년, 크게 게으름피우다. 더 웃기는 것은 1988년, 이 작품으로 상을 탄 돈을 전액 경마에 걸어 잃었다고 솔직하게 버젓이 적고 있다는 사실이다.
별로 자랑거리는 아닐텐데. 내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작가의 한국어판 서문에 보이듯 미시마 유키오가 천황제, 군국주의 등과 연결되는 사람이라 그 반감의 표현으로 그런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 한몫 벌어 보려고 했나?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이 소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에 대해 비평한 소설이다. 소설에 대한 소설이다. 말장난이라고? 그렇다.
우리는 근대 소설의 어법에 익숙해서 이런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다. 그래서 말장난하고 있네, 신기하군, 새롭다 따위가 고작이다. 또 이런 소설을 읽고자 마음먹는 독자의 대부분은 그저 새롭다는 느낌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는 새롭다는 느낌보다 무섭다는 느낌이 더 드는 소설이다. 왜냐하면 소설에 대한 우리의 기존 생각을 완전하게 비웃고 있는 것을 넘어 완전한 전환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은 소설 장르의 해체와 구태의연한 근대 소설을 벗어나 새로운 형태를 찾으려 한다. 포스트모던 소설가들은 소설의 위기라고 할 수 있는 기존 소설의 매너리즘을 과감하게 타파하려고 노력한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는 겉만 보면 야구 이야기일 뿐이고 속을 보면 기존 문학에 대한 신랄한 비웃음이다.
이 소설의 첫 부분부터 어리둥절할 것이다. 수고양이라면 '365일의 반찬 백과', 암고양이라면 '다자이 오사무 주간'. 이것은 흔히 소설에서 작가와 독자가 이름이란 것에 집착하는 것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사물은 이름과 상관없이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한다. 이것은 흔히 상품 자체에 상관없이 상표 이름에 현혹되는 소비자처럼 우리는 소설의 제목과 주인공의 이름에 집착한다.
르나르의 '박물지'와 한 소설가 쓴 '야쿠르트 아줌마'라는 소설을 대조해 놀랍도록 닮은 곳을 제시해 보이면서, 순수한 창조 행위로 믿었던 문학을 단순히 주어진 정보의 재구성에 지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제4장에는 발빠른 닭과 배고픈 늑대 이야기가 나오는데, 소설은 꼭 이야기 구조를 가져야 하며 사건의 인과관계와 철저한 묘사로 독자의 감동을 유발해야 한다는 것을 완벽하게 뒤집고 있다.
물론 이 소설은 야구를 재미있게 묘사하는 부분도 있다. "오! 이런 표현이 가능하구나." 하고 감탄이 절로 나온다. 또 아기자기한 야구광의 이야기는 소설의 실험성과 별도로 재미있다.
이 책이 스포츠 코너에 있는 것을 종종 봤다고 작가는 서문에 쓰고 있다. 우리나라 공공도서관에서도 이 책을 스포츠로 분류해서 비치해 놓을 걸, 내가 직접 봤다. 세상은 요지경이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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