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 기다리는 현대인, 그 따분한 삶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민음사
우리나라 독자들의 이 작품 감상을 읽어 보니, 대부분 이해하지 못하고들 있었다. 부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조리라니. 성경을 비롯한 서양의 문화적 배경 지식이 없으면 이 작품이 암시하고 은유하는 것들을 읽어낼 수 없다. 하지만 그래서 뭐? 차라리 몰라서 더 나은 독해를 할 수도 있다. 자신한테 익숙한 문화를 대입해서 해석하게 될 테니까.
고도는 무엇인가? 무의미의 의미. 부재의 존재. 고도는 당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생각이다. 그 생각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무런 뜻도 없다. 냉정하게 진실을 말하자면, 인생은 죽음을 기다릴 뿐이며 구원도 의미도 사랑도 미움도 절망도 희망도 없다.
허무주의.
신도 의미도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무엇을 하며 무엇을 기다리는가?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2015.01.04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지음
정우사
최근 며칠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책이 한 권도 없었다. 책읽기가 점점 따분해지기 시작하나 보다. 복학을 하면 또 얼마나 따분할까. 대학 강의, 따분할 거다. 동기와 선후배 만나는 일, 따분할 게 뻔하다. 그 지루한 지하철 등하교, 으! 숨막히게 따분할 테지. 정말이지, 사는 게 따분하다. 휴학하나 복학하나 따분하기는 마찬가지다. 으, 이 지긋지긋하게 따분한 삶! 죽음도 따분할까?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으면서 따분해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 희곡은 묘한 재미가 있다. 그래서 끝까지 다 읽고야 말았다.
이 희곡은 베케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 주었다. 너무나 유명한 희곡으로 전세계적으로 공연되어 풍성한 화제를 낳았다. 국내에서도 무대에 많이 올렸다. 나는 한 번도 이 희곡의 공연을 보지 못했다. 앞으로 기회가 생겨도 아마 보지 않을 것이다. 사람 많은 곳은 딱 질색인 나이기도 하지만, 이 연극은 따분해서 보다가 잘 것 같다.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러나 고도는 오지 않는다. 고도는 무엇일까. 고도는 의미가 없다. 무의미의 의미.
텅 빈 공간에 앙상한 나무 한 그루. 그곳에서 고도를 기다리면서 길고 긴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의미가 없는 듯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짓을 하는 두 명,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이 두 사람 앞에 등장하는 포조와 럭키도 역시 앞의 두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해가 질 무렵에 '고도 씨는 오늘 안 온다'고 전하는 소년도 위의 네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심지어 1막과 2막도 크게 다르지 않다.
블라디미르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확실한 건 이런 상황에선 시간이 길다는 거다. 그러니 우린 뭐든 거동을 하면서 시간을 메울 수밖에 없다는 거지. 뭐랄까 얼핏 보기에는 이치에 닿는 것 같지만 사실은 버릇이 되어 버린 거동을 하면서 말이다. 넌 그게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짓이라고 말할지 모르지. 그 말은 나도 알겠다. 하지만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성은 이미 한없이 깊은 영원한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야. 너 내 말 알아듣겠냐?" 123쪽
고도는 텅 빈 존재다, 저지 코진스키의 소설 <정원사 챈스의 외출>의 주인공 챈스처럼. 이 연극을 보는 관객, 혹은 이 희곡을 읽은 독자는 이 '고도'에 각자의 의미를 부여한다. 사실상 고도에는 아무 뜻도 없다. 고도의 의미는 각자가 생각하기 나름이다. 또 숨은 뜻도.
포스트모더니즘을 추구하는 문학의 특징은 결코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말한다. 다시 말해,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한다. 의미없는 것들로 의미를 나타낸다. 그래서 이야기가 없다. 따라서 갈등도 없다.
<고도를 기다리며>을 읽어보면, 등장 인물들이 모두 시간 관념이 없다. 그들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언제나 현재다! 무질서와 혼란의 세계, 그 세계에서 시간은 언제나 현재인 채로 이야기는 하나도 성립되지 않는다. 이 세계가 낯설다고? 우리의 벗인 TV를 보라. 그 무질서의 세계를. 혼란의 세계를. 시간은 언제나 현재인 세계를. 이야기는 하나도 성립되지 않는 세계를.
이 책에 수록된 베케트의 작품 <연극>도 지루하지만 재미있었다. 삼각 관계의 두 여자와 한 남자. 역시 텅 무대. 세 사람이 항아리에 목만 내 놓고 의미가 있는 듯하지만 의미가 없는 대사를 계속 지껄인다.
이 작품에서 여자1의 대사 하나가 무척 재미있다. "이빨로 혀를 깨물어 삼켜버린다면? 그걸 뱉는다면? 그러면 당신 기분이 좋아질까? 이성이 아직도 작용하고 있다니!" 200쪽
아, 졸려. 이 따분한 삶에서 나를 구원해 줄 '고도'를 기다려 본다.
2002.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