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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lovegood 2022. 8. 5. 15:56

드라마 작가는 치고받는 강렬한 대사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이다. 장면을 떠올린 후에 해당 인물의 육성을 간결하고 절실하게 압축해서 뽑아내는 일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날마다 해낸다. 그런 그들에게 아무래도 산문은 그다지 익숙치 않다.

무척 개인적인 상처까지 편집하지 않고 드러내고 있어, 어떤 이들에게는 거부감이 생기리라. 글쓴이의 입장을 짐작해 보건데, 아마도 자신의 지난 삶에서 중요했던 사건과 감정이었기에 뺀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속성상 대사는 무척 노골적일 때가 많다. 점찮게 말을 해서는 시청자가 채널을 돌려 버리니까. 글에서는 지나친 감정을 거르는 게 보통이다. 노희경은 직설적으로 뿜어내는 말을 거침없이 내놓았다. "통속적이고 유치한 대사라도 하고 싶은 말을 하면"(199쪽) 된다고 여긴 모양이다. 그건 통속 드라마에서나 어울리지.

이 책의 느낌을 한 마디로 알리는 문장이 있다. 바로 글쓴이가 드라마 작가 지망생에게 자신이 글 쓰는 수칙이라며 몇 가지를 나열하는데, 그중 하나다. "아픈 기억이 많을수록 좋다."

참 쉽지 않았을 고백인데, 상당히 사적인 얘기를 자세히 썼다. 무서울 정도로 솔직하게 써 놓아서,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글을 쓸 때 어떤 감정도 없다면, 글발이 나오기 쉽지 않다. 작문책에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거나 가장 미워하는 것에 대해 써 보라고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노희경을 보면, 정답이 바로 보인다. 감정에 지지 말고 그걸 글로 표출하라.

내가 아는 소설가 한 분은 아버지에 대한 원한이 지독히 많은데, 소설에 그걸 너무 많이 쓴다. 그래서 완성도를 떨어뜨린다는 지적을 많이 당했다. 그럼에도 작가로서는 어쩔 수 없다. 그 힘으로 쓰는 거니까.

노희경을 사랑하는 시청자나 드라마 작가 지망생라면 이 책을 펴지 말라고 해도 이미 펼쳤으리라. 노희경을 모르는 분이라면 드라마 작가가 글을 써대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기회가 되리라. 그 힘은 상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