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석영중

열린책들

2010.05.10


가난과 문학의 심리적 고백

 

'가난한 사람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첫 소설이자 대박 데뷰작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첫 작품으로 러시아 당시 문단에서 스타로 떠오른다.

 

본격적인 장편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분량이 그리 많지 않다. 열린책들 석영중 번역본이 고작 200여 쪽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소설 번역본은 대개가 두세 권으로 총 1000쪽 안팎이다.

 

이 소설 '가난한 사람들'은 서간체 소설이다. 두 인물이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식이다. 당시에 연애소설 형식으로 이 서간체를 주로 썼던 모양이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도 본래는 서간체 소설이었는데 다시 쓰면서 일반적인 서술형식으로 바꿨다. 그 옛날에는 편지 형식을 연애소설로 즐겨 사용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첫 소설이라고 하니 뭘 어떻게 썼나 궁금해서 첫 쪽을 펴서 보면, 제사가 나온다. 오도예프스끼가 썼다는 '살아 있는 주검'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글이다. 처음에는 이게 뭘까 싶을 텐데 소설을 읽으면 왜 이런 말을 맨 앞에 썼는지 알 수 있다. 116~119쪽에서 말이다.

 

 

 

마까르 제부쉬낀은 늙은 하급 공무원이다.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서 정서다. 남이 휘갈겨 쓴 글을 바르게 예쁘게 다시 써서 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름 문학 창작이라는 걸 하고자 하는 편이고 책도 열심히 읽고 문학 모임 같은 데도 참석한다. 문제는 그 수준이 낮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남자가 문학 관련해서 하는 말은 코미디가 된다. 그러면서 기존 문학의 비판적 고찰 겸 도 선생의 문학 지향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객관적 자연주의 태도에서 벗어나 심리적 사실주의로 나아간다. 가난한 사람의 외양보다는 그들의 심리를 날카롭게 묘사해낸다. 그가 새로운 '고골'이 된 것은 '외투'에서 그 '외투를 입은 자의 마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야기 줄거리는 시시하다. 나이 많고 가난한 남자가 고아인 젊은 여자를 사랑해서 열심히 이것저것 사서 갖다 바친다. 젊은 여자는 결국 돈 많은 지주한테 시집간다. 둘이 헤어진다.

 

허기야 도 선생의 유명한 작품도 대개가 줄거리는 간단하다. 대학생이 노파를 죽인 후 자수하고 시베리아 유형을 간다. '죄와 벌'이다. 돈과 여자 문제로 아버지와 싸우던 장남이 부친 살인죄로 유형에 처해진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매력은, 그런 이야기보다는 열정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등장인물의 말과 간단하면서도 강렬한 이야기 속 이야기다.

 

 

'가난한 사람들'에서 독자를 울게 하는 대목은, 대학생 아들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보여주는 노인의 모습이다. 아들이 좋아했던 책을 옷에 쑤셔넣었는데, 그게 떨어지는 장면이란! 참, 이 작가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대단히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대목은 여자 주인공 바르바라 도브로셀로바가 그 대학생 뽀끄로프스끼의 방에 있는 책을 읽으면서 문학 세계에 몰입되는 부분이다. 56~57쪽. 그리고 64쪽.

"책 속으로 몰입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낯설고 새로운 것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내 눈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 나는 점점 더 깊이 그 낯선 느낌에 빠져 들었고, 그 느낌은 점점 더 달콤하게 내 영혼을 뒤흔들어 놓았다." 


작가의 독서 체험 고백으로 들린다.

 

남자 주인공 마까르 알렉세예비치가 가난 때문에 심리적 위축과 괴로움과 자존심에 상처를 당하는 모습은 여러 일화를 통해 신랄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절대적 빈곤이 사라졌다는 지금에서조차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상사 앞에서 자신의 옷에서 단추가 떨어져서 굴러가는 장면이 압권이다.

 

'죄와 벌'이 겹쳐서 읽혔다. 바르바라는 두냐와 닮았고 마까르는 로쟈와 비슷하다.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큰 유형으로 보면 그랬다.

 

가난의 외형과 그에 따른 심리적 내면 풍경을 그려냄에 있어, 도스토예프스키는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독보적인 소설가다. 그 놈의 돈 문제는 옛날에도 지금에도 미래에도 인간에게는 골치아픈 문제다.

 

 

 

독자를 울리고 웃기는 재능

첫 작품인데도 이 정도면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다. 이 책 끝에 붙은 작가 연보(231쪽)에 보니 정성을 들여 퇴고했다고 하지만, 글에서 보이는 광휘는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그 후에 작품의 발전은 양적인 것이지 질적으로는 그다지 없었다. 다루는 주제의 폭을 넓힌 것이 질적 향상으로 친다면 발전했다고 봐야겠지만. 이 작품 이후 문체는 불변이다.

나중에 쓰여질 '죄와 벌'이 이 소설에서 보인다. 가난에 찌든 인간의 모습. 절대 빈곤이 사라진 요즘이지만 여전히 공감하게 되는 건 뭘까. 절대적 가난을 사라졌어도 상대적 가난은 여전하니까 그런가. 읽는 내내 돈이 뭔지, 사는 게 뭔지, 나도 모르게 푸념하더라.

작가가 그리는 가난은 인간적인 가난이다. 문학적 상징으로 만들어낸 가난이지 사실적 실제 가난의 모습은 아니다. 가난을 있는 그대로 글로 그려냈다면 그 글을 읽고 감동할 사람은 없다. 가난한 사람을 극단적인 상황으로 모는 것이 작위적이지 않나 싶다. 첫 작품이라서 더 그렇게 보인다. 때마침 사람이 죽고 등장인물은 대개들 다치거나 병에 걸린다. 참 편리하게도 말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제목과 달리 달랑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는 서간체 소설이다. 가난하지만 교양이 나름 높은 젊은 여자,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와 역시 또 가난하고 교양도 없지만 마음은 착한 늙은 남자 하급 공무원 마까르 제부쉬낀. 두 사람 사이의 러브레터 겸 일상잡담 편지다.

작가 특유의 장광설은 그가 쓴 어느 작품에서건 나타난다. 첫 작품도 예외는 아니었다. 등장인물이 끝도 없이 쉼 없이 혼자서 지껄인다. 미친 사람처럼 떠들어댄다. 말이 쏟아지는 중에 갑작스럽게 빛을 내며 감동을 만든다. 그 열띤 말의 끈질긴 당김으로 인간 내면을 끌어낸다.

 


이야기 속 이야기로, 여주인공 바르바라의 회상에서 열한 권짜리 뿌쉬낀 전집을 사주고 난 후 벌어지는 비극은 '죄와 벌'에 나오는 '여윈 말' 이야기보다는 덜 하지만 독자의 심장을 쥐어짜내는 듯 격렬하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미쳐버린 아버지가 그 아들이 그토록 좋아해서 사 주었던 책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떨어뜨리고 줍기를 반복하며 장례를 치르는 모습이라니. 도스토예프스키다운 캐릭터다.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 감정의 폭발로 더는 제정신일 수 없는 사람. 갈 데까지 간 사람.

고골의 유명한 소설 '외투'에 대해 불평하는 마까르의 수다를 읽다가 어찌나 웃기던지. "도대체 그런 글은 왜 쓴답니까? 그런 게 왜 필요하대요? 이런 책이 나오면 독자 중 누군가가 외투라도 하나 장만해 준답니까? 새 신발이라도 사준대요?"(117~118쪽) 책 맨 앞에 왜 요상한 인용 글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최고다!

'외투'는 바르바라가 마까르한테 읽어 보라고 빌려 준 책에 있다. 마까르는 문학작품이라는 일컫는 고상한 소설 대신에 싸구려 인기소설을 높이 평가한다. 의도적으로 여자와 대조시키기 위해 남자를 가난하고 무식한 인물로 그려놓았다. 각자의 문학 소양은 편지의 문체에도 잘 드러난다.

남자 주인공이 직장 상사한테 야단을 맞던 중 자신의 옷에서 단추가 떨어지고 그걸 줍고 최악의 상황으로 간다. 그러다 곧바로 직장 상사가 고액권 지폐 한 장을 주며 일 다시 잘하라고 하자 우리 주인공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인생의 희비극을 이토록 절묘하게 써내는 도스토옙스키 선생은 역시 문학의 신이다.

독자를 울리고 웃기는 재능이 반짝이는 소설이다.

Posted by 러브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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