캉디드
볼테르 지음, 윤미기 옮김
한울(한울아카데미)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볼테르 지음, 이봉지 옮김
열린책들 세계문학 054

캉디드(부제 낙관주의)는 볼테르의 대표작으로 풍자소설이다. 수능이네, 고전이네, 철학소설이네 해서 어렵고 재미없을 거라 짐작하기 쉬운데, 읽기 시작하면 멈추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고 재미있게 읽힌다.

18세기 유럽이나 21세기 지금이나 세상은 크게 바뀐 것 같지 않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나아갈 방향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부조리와 불합리를 고발하는 산문 정신은 시대를 초월하며 계속 읽힌다.

이 소설을 다 읽자마자 팝콘처럼 펑 생각나는 소설가가 있었다. 커트 보네거트. 소설 속 인물들은 온갖 별별 구질구질한 일을 당하기만 할 뿐, 적극적으로 운명을 개척할 의지가 없고 노력도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다. 부조리와 전쟁과 불행이 요지경 속 무늬처럼 펼쳐지고, 거기에 휘말려든 주인공은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다. 그런 인물을 보는 독자는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정말 삶이란 게 참 쉽지 않다는 사실을 공감한다.

커트 보네거트가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내놓은 건 참 심심하고도 시시하게도 상식이다. 공중 도덕을 지키고 서로 사랑하고 전쟁 일으키는 사람을 경멸하라. 볼테르도 비슷한 답을 내놓는다. 세상이 아무리 불합리하여 지옥처럼 느껴질지라도 자기 일을 충실히 하며 최선을 다해 살라.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 봐라. 볼테르가 이 소설을 쓰던 때와 근본적으로 뭐가 다른가. 종교는 오만, 정치는 개판, 경제는 깽판, 사법은 한심, 행정은 바보. 돈과 권력에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삶을 마감하는 게 도대체 제대로 된 삶인가. 우리는 더 나은 행동으로 이 세상을 개선할 순 없을까.

희망은 어리석은 행위다. 캉디드처럼 세상이 아무리 그래도 나는 착하게 살겠다는 믿음 말이다. 그럼에도, 비관에 빠져 있기보다는 희망을 갖고 뭐든 하는 게 낫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기 직전까지 이것저것 할 일을 묵묵히 하는 걸 보라. 빌린 닭값을 갚으려 한다. 심지어 피리 연주에 힘쓴다. 한 곡조 배우고 세상을 떠나고 싶다면서.

비관주의와 허무주의의 밑바닥에서 우리는 삶의 최고 긍정을 발견한다. 캉디드가 그랬듯,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가꾸어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암흑으로 가득하더라도 촛불을 켜고 앞으로 가야 한다. 내일 죽더라고 오늘 뭔가를 하자. 좋은 일을 하자. 나에게, 남에게, 또 그 누구에게 사랑으로 기쁨으로 무엇이든 해 주자. 보잘것없어도 좋다. 실패해도 좋다. 아무 소용이 없어도 좋다. 아무런 성과가 없어도 좋다. 선을 행하자.

한울에서 나온 책으로 처음 읽었고 열린책들 전자책으로 두 번째로 읽었다. 요즘 가뭄에 메르스에 표절에 대한민국 난장판인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나마 현실이 이 소설의 부조리보다는 낫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세상이 아무리 지옥 같아도 옛날보다는 살기 좋다. 그리고 어떤 최악의 상황이라도 희망을 갖고 바르게 살려는 시도를 멈춰서는 안 된다.

한울의 윤미기 번역본을 추천한다. 안에 간략한 그림도 있다. 열린책들의 이봉지 번역은 한글 세대들한테 낯선 한자어를 종종 썼다.

2015.6.20


천일야화의 영향이 큰 듯. 특히, 16장. 걸리버 여행기의 영향도 있는 듯.

진정한 이성적 합리주의란 뭘까. 볼테르는 극단적인 이성주의를 가볍게 비웃으면서 그런 극단적 광기에 사로잡혀 살며 부조리한 일을 천연덕스럽게 하고 있음을 고발한다. 특히, 라이프니츠와 예수회를 싫어했다. 미친 년놈들 취급했다.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인가? 세상은 완벽한 곳인가? 미친 세상에는 미친 사람이 제정신 취급을 받는다.

2015.7.5

Posted by love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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