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로부터의 수기 - 10점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계동준 옮김/열린책들
지하로부터의 수기 - 열린책들 세계문학 121 - 10점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계동준 옮김/열린책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이게 소설이야? 계속 혼자 중얼거리잖아." 그러면서 읽다 말았다. 당시에는 이 소설과 '죽음의 집의 기록'이 합본으로 묶여 있었다. 그 탓에 두 소설 제목이 헷갈렸다.

이 소설을 두 번째로 읽은 것은 '죄와 벌'을 드디어 완독하고서였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전자책으로 읽었다. 이번에는 어쨌거나 다 읽었다. 그냥 혼자 떠드는 코미디 정도로 여겼다. '죄와 벌'의 1인칭 수다 버전으로.

 


이 소설을 세 번째로 읽었다. 제대로 읽어낼 수 없으리라 여겼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세 번 읽은 상태에서 이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장난스러운 어투로 그다지 많지 않은 분량의 글이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관찰 연구 결과를 어느 정도 마무리해 놓았다. 작가는 이를 기반으로 걸작들을 쌓아올린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가난한 사람들, 선과 악의 극단에 이른 인물, 모욕하는 사람과 모욕받는 사람 등을 주로 다루면서 낭만주의와 신비주의를 보이는 소설들을 써내면서도 과연 도대체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답을 딱히 못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그 답을 내놓기 시작한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2부 구성이다.

'1부 지하실'에는 자기가 하급 공무원(일개 8등관)이었으며 친척한테 유산을 받고서 사표를 내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산다는 점과 나이, 성별 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없다.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수기인데도 말이다.

작가가 붙인 주석에는 이렇게 나온다. "<지하실>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장에서 그는 자신과 자신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으며, 아울러 우리 주변에 그가 나타난 이유, 아니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을 밝히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다음 장에서는 자신의 생애에서 일어났던 몇 가지 사건들에 관한 이 사람의 실제 <수기>가 제시될 것이다."(9쪽)

장이라고 설명했는데, 번역된 소설에서는 부로 표시했다. 작가 주석대로 '2부 진눈깨비 때문에'는 수기의 주인공 삶 이야기가 나온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인간의 존재 심리학 성찰 논문과 비아냥거리는 우스개와 열띤 광기가 뒤섞인 소설이다. 왜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다가 내가 이렇게 그의 모든 작품을 순서대로 읽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부의 핵심 주장은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정의가 거짓이라는 거다. 우리들이 여전히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이성적 존재라는 개념이 말짱 허구라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어디에서나, 그가 누구이든 간에, 절대적으로 이성과 그의 이익이 지시하는 대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중간 생략)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욕구, 가장 거친 것이라 할지라도 당신 자신의 변덕, 때때로 심지어는 광기에 달하는 당신의 몽상, 바로 이것이야말로 모든 이들이 간과하는 있는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이익 중의 이익이며 이것 때문에 모든 체계들과 이론들은 끊임없이 와해되어 버린다."(43쪽)

반항하고 욕망하는 것이, 인간이다. 단순히 존재하기를 거부한다. 욕망, 욕구, 변덕, 광기, 몽상의 인간은, 이론이나 제도로 바꿀 수 없다.

 

 

== '죄와 벌'의 코미디 일인칭 독백 버전 ==

 

'죄와 벌'의 코미디 일인칭 독백 버전이 있었다. 아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도 이렇게 유쾌한 작품이 있다니! 책을 펴는 순간 지하로부터의 개그 콘서트가 펼쳐진다. 당신을 꽉 붙잡고 절대로 놓아주지 않고 속사포 독백이 쏟아진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실험적 풍자소설이다. '죄와 벌'의 주인공의 독백을 이 작품에서 자유롭게 펼친다. 읽고 있으면 아주 돌아버린다. 이 소심한 미치광이의 장광설이 진지함과 농담이 오락가락하며 독자의 머릿속을 이리저리 휘젓는다.

트위터 친구 한 분이 '죄와 벌'을 읽은 다음에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꼭 읽어보라며 "정말 분열적이다 못해 웃겨 죽습니다. 지드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가운데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이 작품을 고르겠다고도 했었죠."라고 추천했다. 정말 웃기더라. 걸작은 아니더라. '죄와 벌'의 스케치로 보인다. 자전적 독백도 섞여 있다.

시대를 앞서 간 것일까. 대단히 실험적인 소설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인 줄 알았다. 허구와 현실이 교차되고 대놓고 독자한테 말을 건다. 발표 당시 독자들한테 외면당했다. 지금도 그리 환영을 받진 못하리라.

수기 형식 소설이다. "나 자신만을 위하여 쓰고 있다. 그리고 내가 만일 독자들을 대하듯이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단순히 보여 주기 위한 것이고, 그 이유는 그렇게 쓰는 것이 나에게는 더 쉽기 때문이라고 단호하게 나는 주장한다. 그것은 형식이다. 단순히 형식일 뿐이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독자를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메타픽션. 허구의 허구. 현실을 끌어들인 허구다. "'당신은 어떻게…… 마치 책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녀는 말했고, 무엇인가 조롱하는 듯한 것이 그녀의 목소리에서 다시 울렸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웃겨서 미칠 것 같았다. 소설 텍스트 안에서 스스로 허구임을 밝히면서도 고집스럽게 이 지하 인간은 자기 말을 줄기차게 쏟아낸다.

주인공은 극도로 소심하며 지나치게 솔직하다. 농담과 자조 속에서 속물 비판을 비수처럼 던진다. "우리 시대의 모든 예의 바른 사람은 겁쟁이고 노예여야 한다." "그들에게 직위란 지성과 동등한 것이었다. 열여섯에 그들은 이미 편하게 돈벌 수 있는 직업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싸구려 행복인가 아니면 고상한 고통인가?" 가끔씩 툭툭 던지는 진지한 말이 무섭도록 매력적인 작가 도스토옙스키임을 입증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불행하고 진지한 사람들이 읽는 생명수다. 행복하고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한테는 난해하고 읽기 힘든 고전일 뿐이다. 당신의 삶이 비틀거리고 소외되고 미칠 것만 같을 때 도스토옙스키를 읽어라. 당신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문장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이토록 웃긴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조차 그렇다.

Posted by 러브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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