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 - 상 - 10점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열린책들

 

 

 

횡설수설에 등장인물이 많아 읽기에 까다롭고 지루했다. 사건다운 사건은 3부부터 몰아치듯 나온다. 인물들이 죽어나간다.

 

각 인물별로 이야기를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1인칭 시점 서술과 전지적 작가 시점을 오가면서 관찰자 입장을 유지한다. 직접적이기보다 암시적이다. 갑갑하다. 어찌나 산만한지. 같은 말을 반복하기까지.

 

열린책들 번역본에는 번역자가 줄거리를 첨부해 놓았다. 워낙 줄여 놓은 탓에, 그리고 이야기가 워낙 산만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직접 모두 다 읽어 보는 수밖에 없다.

 

분량은 많지만 얘기는 간단하다. 무신론 무정부주의자들의 폭동이다. 실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장광설과 형이상학과 사회비판이 나온다. 무신론자들 이야기인데, 180쪽에 가서야 무신론을 처음 논한다. 키릴로프의 인신사상. "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합니다. 돌 자체에는 고통이 없지만 돌에서 비롯된 공포 속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신은 죽음의 공포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고통과 공포를 극복하는 사람, 그 사람은 직접 신이 될 겁니다." 진지하기보다는 우스꽝스럽다.

 

평온하고 조화로운 삶은 살고 있는 사람한테는 종교가 필요없다. "인간은 더 고약하게 살거나, 혹은 더 학대받고 더 가난한 족속일수록 더욱더 집요하게 천국의 보상을 꿈꾼다는 거 말입니다."(295쪽) 이 세상의 삶이 지옥일수록 저세상은 더욱 간절하다. 불가지론자인 나로서는 시큰둥한 얘기지만.

 

소설 '악령'은 무신론자들 풍자하려다 유신론을 사색한다. 유신론과 무신론은 빛과 그림자다. 극과 극은 통한다. 무신론자는 절망한 유신론자다. 신이 없다고 부정하기 위해서는 '신이 있음'이 전제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 도스토예프스키는 무신론 급진 사회주의 무정부주의자들을 우스꽝스럽게 짧게 그려내는 '팸플릿'을 생각했다. 

 

그런데 글을 써 나아가면서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던 인물인 '스타브로긴'이 중심 인물로 떠오르기 시작하자, 초고의 계획을 엎어버리고 아예 '위대한 죄인'이라는 비극으로 양을 늘려 버린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모호해진다. 코미디인가, 비극인가. 웃기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뭐지? 3부 8장까지 읽고나서는, 이게 뭐야 싶다. 도대체 뭘 말하고 싶었던 거야?

 

 

이 책을 예전에 읽었을 때는 "촛불처럼 분명하고 손가락처럼 단순합니다."(286쪽) 이 한마디와 끝 장면이 머릿속에 남았다. 그때 내가 읽은 책에는 '찌혼의 임자에서'가 안 붙어 있었다.

 

'스타브로긴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더 잘 알려졌다는 이 글은 본래 2부 9장으로 넣으려고 했다가 편집자의 권유 혹은 강압으로 삭제했었다가 작가 사후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표뜨르 스쩨빠노비치 베르호벤스끼가 주인공 아닌가? 다 계획하고 실행한 사람은 이 사람이지 않은가? 그리고, 니꼴라이 프세볼로도비치 스타브로긴은 딱히 별로 하는 일도 없는데, 뺨 맞고 결투에서 총을 엉뚱한 곳에 쏘고 왜 그러는지 도통 알 수가 없는 행동들, 왜 등장인물들 이 사람한테 열광하는 것일까.

 

삭제되었던 장이 그동안 풀지 못했던 수수께끼를 여는 열쇠가 된다. 드디어 인격화된 악마가 모습을 드러낸다.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고 싶어진다. 모호함과 불명확함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왜 삭제되었는지는 읽어 보면 안다.

 

스타브로긴이 동전의 뒷면이라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알료샤는 동전의 앞면이지 않을까.

Posted by 러브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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