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 멜론 슈가에서
리처드 브라우티건
비채
2007.10.10.

브라우티건의 대표작 '미국의 송어낚시'는 겉보기에 단순한 이야기이다. 아무런 주장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허나, 밑바닥에는 미국 사회 비판이 흐른다.

[워터멜론 슈가에서]는 1968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미국의 송어낚시]가 나온 다음 해다. 전작에 비해 신랄한 풍자가 적었다. 문체는 단순함에서 아름다움으로 나아갔다. 그래도 작가가 추구하는 것은 역시나 같았다. 은유와 말장난으로, 기계 문명을 비웃으며 목가적인 꿈을 옹호한다.

도시 문명을 떠나 자연 생활을 추구하는 면에서 소로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 방법은 무척 달랐다. 소로는 한껏 자연 예찬을 했다. 반면, 브라우티건은 자연이 파괴되는 것을 바라본다. 소로는 숲 속 오두막에서 숨을 쉬지만 브라우티건은 오염된 강에서 죽어가는 송어를 본다. 회복 불가능한 꿈에서 유령처럼 떠돈다.

브라우티건은 소로의 이야기 방식으로 말할 수 없었다. 1960년대 미국은 이미 기계 문명에 의해서 자연은 물론이고 인간의 정신마저 망가져 버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방식을 취한다. 언어의 유희 속에서 침묵한다. 죽음 위에서 환상을 본다. 현실과 꿈의 중간 지대에서 방황한다.

소설은 '워터멜론 슈가'라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야기한다. 그곳은 현실이면서 꿈인 곳이다. 달콤한 이야기인 듯 하지만 잔인한 이야기다. 꿈은 아름다우나 현실은 추하다. 이야기는 그 모두를 담아 덤덤하게 강물처럼 흐른다.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같지만 꼭 그렇지 않으며, 자연과 문명이 대결하고 화합한다는 의미가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것 같은데 역시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지는 독자의 몫이다. 소설에 대한 소설로도 동화로도 시로도 읽힌다. 소설가는 꿈과 현실이 맞닿는 자리인 워터멜론 슈가로 들어가서 절망을 읊조린다.

이처럼 명확한 의미를 알 수 없으면서도 다양한 상상과 갖가지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산문은 드물다. 시처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는 은유적 산문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은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다. 또한 모방해서 될 일도 아니다. 시인은 타고날 뿐이다. 시인은 이런 불완전한 세상에 살기에는 너무나 완벽한 존재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문장을 읽고 있으면 감수성의 극한에 이른 자가 택할 길은 자살밖에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읽는 동안 멍 때리며 즐거운 기분이 드는, 희안하고 휘귀한 책이다. 미국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알 수 없어 더욱 그렇게 읽힌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수록 재미있다. 기묘한 소설이다.

- 밑줄긋기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좀 궁금해 하겠지만, 나는 정해진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은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다. 내 이름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그냥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불러달라.

당신이 오래전에 있었던 어떤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면, 예를 들어 누군가 당신에게 어떤 질문을 했는데 당신은 그 대답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17쪽

동 트기 전 희뿌연 어둠 속, 워터멜론 이불 속에서, 폴린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산보 나가는 한 마리 양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했다.

"양은 꽃들 속에 앉았어."

그녀가 말했다.

"양은 아무렇지도 않았어."

그리고 그게 이야기의 끝이었다.

71쪽

침대 속의 그녀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녀의 몸에서 근사한 졸리운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아마도 거기가 양이 앉았던 곳인지도 모른다.

72쪽

- 덧붙임 1
편집 오류로 243쪽 작품 해설의 제목을 역자 후기로 해놓았다. 4쇄까지 찍고도 바로잡지 않았다.

- 덧붙임 2
그림은 소설의 은유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그렸다. 그림이 다양한 의미로 풀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방해한다. 표지는 그렇다치고 본문 삽화는 책의 질을 청소년용 소설로 전락시킨다. 본문 그림은 빼는 것이 작가에 대한 예의다.

- 덧붙임 3
8쪽에 사진을 싣고 "이 사진은 미국 문명에 대한 작가의 신랄한 비판을 받고 있다."고 했는데, 왜 그런지는 도대체가 알 수 없다. 아는 분?

- 덧붙임 4
김성곤은 작품 해설에서 "브라우티건은 1968년에 벌써 iDeath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2000년대에 등장하게 될 iPod나 iMac을 예견했던 선구자적 작가였다."(251쪽)라고 썼다. 농담이죠?

-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면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과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를 읽어보세요.

Posted by 러브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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