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범 잡으려 사형수 탈옥 시켜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반장 시리즈 중에 유명하고도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소설의 제목이 우리나라에서는 세 가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타인의 목 - 열린책들 최애리 번역본
사나이의 목 - 동서문화사 민희식 번역본
남자의 머리 -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결국, 이 모든 제목은 '사람의 목숨'을 뜻합니다. "뭣이 중헌디?" 영화 곡성에 나온다고 하는데, 심농의 추리소설 '남자의 머리, 타인의 목, 사나이의 목'에도 비슷한 대사가 나옵니다. "사람의 목숨이 중합니까, 스캔들이 중합니까?" - 최애리 열린책들 번역본
매그레 형사는 자기가 체포해 놓고도 이 자가 무죄임을 알아서 자기 자리를 걸고서 판사, 장관, 교소도의 허락을 받아 사형 집행이 임박한 남자를 일부러 풀어 줍니다.
젊은 판사는 마지못해 이런 매그레 형사의 계획에 찬성했지만, 유독 한 신문에서 사법당국과 합의 하에 사형 선고를 받은 자를 탈옥시켰다는 보도가 터지자 짜증을 냅니다. 게다가 매그레 형사가 수사에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자, 판사는 더더욱 짜증을 부립니다.
독자도 이 소설을 읽어 나아가면서 짜증이 날 수 있습니다. 값비싼 고급 카페 구석에서 싼 음식만 주문하며 자리를 오래 지키던 자가, 사건과 전혀 관련성을 찾을 수 없는 인물이 대뜸 말이죠, 매그레 형사한테 사건 관련 힌트랍시고 주절거리면서도 절대로 사건의 진상을 알아댈 수 없고 근처에도 못 가고 있다고 조롱하는 겁니다. 약이 오르죠.
실제로 도대체 뭔가 뭔지 알 수 없기는 독자도 매그레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 끝에서야 알 수 있게 되죠.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형식으로, 마지막에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집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떠오릅니다.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머리는 좋지만 가난한 청년, 세상에 대한 분노, 그리고 거의 완전범죄에 가까웠던 것까지. 그럼에도 심농은 장황하게 중얼대지 않습니다. 라데크는 사형 직전에 "망했군!" 한마디를 할 뿐이고 매그레는 난로에 석탄을 넣어 화구가 부셔져라 불을 쑤셔댈 뿐입니다.
정의는 실현되었으나 떫은 씁쓸함이 남습니다.
타인의 목
조르주 심농 |열린책들
동서문화사에서 펴낸 책 제목은 그 이름도 이상한 '사나이의 목'이다. 제목이 워낙 특이해서 몇 번인가 이 책을 집어들었지만 이상하게도 1장조차 읽어내지 못했다. 시작부터 사형수가 나와서 꺼림직해서 더 읽기 싫었다. 읽기를 단념한 후, 그 이후 사건 전개를 내 멋대로 이상하게 상상했다. 사나이의 목이 잘렸으리라, 끔찍하게!
열린책들은 제목 번역을 '타인의 목'으로 정했다. 여전히 눈길을 끈다. 제목만큼이나 시작부터 아주 별난 소설이다.
주인공 매그레가 자신이 잡은 범인을 일부러 탈옥시킨다. 매그레가 직접 잡은 범인이지만 그가 범인이 아닐 거라는 양심의 목소리에 따른 것이다. 증거는 확실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다. 괜히 억울한 사람을 죽게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니, 그는 자신의 목숨은 아니지만 거의 목숨 같은 자기 자리를 서슴없이 건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자를 일부러 풀어준다. 그리고 추적한다. 추적하던 부하가 탈옥수한테서 머리 부상을 크게 당하고 그만 추적을 놓치고 만다.
매그레는 다시 탈옥수를 추적해 가던 중 부자들의 호화로운 식당에서 이상한 젊은이를 만난다.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자가 자꾸만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며 매그레를 다그친다.
의학도 출신의 젊은이는 대놓고 매그레와 사건의 진상을 놓고 대결한다. 혼자서 열심히 사건 해결을 위한 여러 말을 쏟아대지만, 매그레는 꿈쩍도 안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 나오는 '로쟈'를 보는 듯했다. 가난해서 대학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이 소설을 읽어 가면 아주 미친다. 분명히 저 자식이 범인인데 도저히 관련성을 찾을 수 없다. 독자는 주인공인 매그레 입장이 되는데, 자꾸만 옆에 와서 약올리는 말만 해대니. "당신은 결코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겁니다." 아주 미친다, 미쳐. 게다가 돈자랑까지 해댄다. "반장님, 경찰 양로원에 몇천 프랑쯤 기부하려면 누구한테 말해야 합니까?"
그러다 후반부에서 전세가 역전된다. 매그레가 자신을 조롱하던 라데크를 몰아대며 질문을 퍼부으며 이것저것을 명령한다. 관련이 없어 보였던 조각들이 맞춰지며 경악스러운 진실이 밝혀진다.
책 표지의 커피잔을 보니, 라데크가 카페 한 구석에서 제일 싼 커피만 사서 홀작거리면서 부유한 사람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값비싼 칵테일을 마시며 떠드는 모습을 응시하며 세상에 대한 증오를 키우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단지 돈이 없을 뿐인데 나는 이렇게까지 몰락해야 하는가. 단지 돈이 많다는 이유로 저들은 저렇게 살 권리를 얻는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지 않았을까.
"가난은 인간에 대한 증오심을 자극해 주었으니까요." 라데크가 신문 파는 노파를 심술궂게 돈으로 놀린다. "2백 프랑... 3백... 자! 여기 있어... 5백 줄까? ...하지만 이걸 벌려면 할멈은 뭔가 노래를 불러야 해. 춤도 추고 말이야! ...우선 노래부터."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장면을 읽는 듯했다.
괜히 유명한 작품이 아니었다. 역시 명작이다. 억울하게 죽을 수 있었던 사형수와 살인을 저지른 범인이 교차되어 정의를 실현하나 씁쓸함은 남는다.
2014.05.02
이미 읽은 책이지만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터라 다시 추리해야 했다. 역시나 또 어긋났다. 이 추리소설에서는 독자가 작가를 이길 수 없다. 이야기 설정 자체가 읽는 사람 약올리는 구조다.
조르주 심농의 '타인의 목'은 추리 게임으로써는 불공평한 소설이다. 연결점이 없어 보이는 용의자들이 나열되고 어떻게 해도 서로 들어맞지 않는 단서 조각들을 펼쳐진다. 심지어 범인이 스스로 형사 앞에서 나서서 사건의 진상을 전혀 모르고 있다며 닥달을 하는 판국이다.
범죄 주인공이 머리가 비상한, 의학도다. 그의 재능은 의사가 환자를 진찰해서 병을 찾아내듯 상대의 약점을 치밀한 관찰로 알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난하며 불치병에 걸려 살 날이 얼마 없다. 그는 그저 돈만 많은 인간들이 잘먹고 잘사는 것이 역겨워 자신의 능력을 범죄에 활용한다. 완전범죄를 완성하지만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다. 돈은 갖고 있어봐야 쓸 데도 없다.
하여, 살인자 라데크는 형사 매그레에게 자신의 범죄를 고백해서 무명의 환자로서 죽기 전에 천재적 범죄자로서 사형을 당하길 원한다. "꼭 사형이 되도록 힘 좀 써주십시오, 반장님!"
이 소설은 읽고나면 불편한 심기가 남는다. 가난에 대한 분노, 좌절된 꿈, 역겨운 인간들이 잘살고 잘먹고 잘 지내는 세상.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나 애거서 크리스티의 에르퀼 푸아로는 사건이 해결되면 그걸로 끝이지만, 조르주 심농의 쥘 매그레는 범인의 감정을 끌어안고 인생의 씁쓸함을 곱씹으며 아내가 있는 집으로 간다.
2014.10.09

오랜만에 전자책으로 통독했다. 단문 간결체이고 분량이 중편과 장편 사이라서 금방 읽었다. 더구나 마성의 가독성을 자랑하는 전자책이었으니. 너무 빨리 끝나서 아쉬웠다.
'타인의 목'은 조르주 심농이 쓴 매그레 시리즈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친숙한 영국 추리소설과는 너무나 달라서 그런지 우리나라 독자들한테 그리 인기가 없는 편이다. 시리즈 전체 번역 출간을 기대했던 출판사조차 두손 들고 포기했다.
범행 자체는 간단하다. 진상을 모르는 초중반에는 신기하고 흥미롭긴 하겠지만. 애거서 크리스티나 코난 도일의 추리소설에서 선보이는 신묘한 트릭 같은 것은 없다. 사건의 진상을 알았을 때는 우와 놀랍기보다는 아 그런 거였구나 정도의 느낌이다. 이래서 아무래도 선뜻 매그레를 읽지 않으려는 것 같다. 추리소설의 재미라고 느끼는 것이 빠졌다고 여기리라.
일단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어쨌거나 끝까지 읽게 된다. 그 과정이 썩 유쾌하지 못하다. 끝도 그렇다. 범인이 바로 눈앞에 있고 아예 미행을 붙인 형사랑 술도 같이 마시질 않나 아예 매그레랑 같이 이동하기도 한다. 반장한테는 계속 진상을 알 수 없지롱 하면서 약 올리는 녀석이라니. 나중에 역전이 될 때까지는 이 놀림을 감당해야 한다.
소설가는 제목부터 정하고 그 제목에 맞는 소설을 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타인의 목'은 그런 경우였다. "아무 아이디어도 없는 상태에서 발행인에게 제목부터 통보했단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경우 '왜 그들은 에반스를 부르지 않았을까?'가 여기에 해당된다. 책 제목을 책 내용보다 쓰기가 어렵다고 한다. 제목만 이미 정해도 책의 절반 이상을 해결되었다고 느낄 정도라니.
202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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