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세트
레프 톨스토이
문학동네
2010.03.04.
안나 카레니나 세트
레프 톨스토이
펭귄클래식코리아
2013.03.10.
윤새라의 참신한 번역
예전에 박형규 문학동네 번역본으로 읽었었는데, 순전히 윤새라의 번역 때문에 펭귄클래식코리아로 다시 읽었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소설 첫 문장을 이토록 간결하고 명확하게 번역하다니. 놀라웠다. 같은 소설인데 번역자에 따라 다른 소설로 읽히는 것이다. 번역문이 간결하고 정확하고 부드럽다.
박형규 문학동네의 번역문은 윤새라에 비하면 한 문장의 호흡이 길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문장 운율은 더 살렸다.
아마도 윤새라는 내 나이 또래이거나 더 어린 사람일 것이다. 즉, 한문투로 번역하는 '나이 든' 세대들이 돌아가셨거나 이제 활동을 하지 않는다. 한글 세대들이 번역을 맡으면서 소설이 새롭게 읽힌다.
윤새라 번역자의 작품해설조차 잘 읽힌다. 예전 교수들의 해설은 암호문에 가까웠다. 도대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나 쓰는지. 온갖 전문용어로 일반 독자는 절대 이해할 수 없도록 하는 게 목적인 듯 써냈으니.
외국 문학이론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가져다 직역하기에 바쁜 세대들이 이제 사라졌다. 이제야 제대로 공부하고 정말로 이해하고 진정으로 우리말로 번역할 줄 아는 교수들이 탄생한 것이다. 윤새라는 '너나들이' 같은 우리말 구사력까지 보여준다.
불륜소설과 철학소설의 이중주
작가의 의도야 어찌되었든, 이 소설은 대체로들 불륜소설로 읽는다. 이야기의 주요 흐름은 안나 카레니나라는 귀족 여인의 불륜이다.
그렇게 읽다보면 도대체 왜 쓸데없이 레빈이라는 남자 이야기를 하는지 불만일 것이다. 그리고 뭔 농사에 전쟁에 사냥에 이야기의 핵심과 그다지 상관없는 것들을 잔뜩 서술하는지. 작가 마음이니 뭐라 할 수 없고. 알아서들 건너뛰어 읽는다.
처음에는 불륜에 빠진 남녀의 심리를 절묘하게 그려내는 솜씨에 감탄하게 되는데, 차츰 지나치게 사변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사건 전개의 재미는 줄어든다.
죽음과 삶의 허무 문제를 다루면서 심각해진다.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레빈은 톨스토이의 분신이다. 그가 하는 말 대부분은 바로 작가 자신이 하려는 말이자 하고 싶은 말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끝은 7부 안나의 죽음이 아니라 8부 레빈의 선 의지다. 이는 작가의 관점이다. 불륜 소설로 보면 8부는 사족이다. 철학소설로 봐야 8부가 진정한 피날레다. 죽음과 허무에도 도대체 왜 사느냐에 대한 답이다.
읽는 내내 파스칼의 '팡세'가 떠올랐다. 신이 없는 인간의 비참함. 권력, 연애, 돈, 도박, 사냥, 예술 같은 것에 정신을 팔아서 자신의 불안을 생각지 않으려 한다. 자살하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 혹은 살아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신을 믿어서 지복을 누려라?
소설은 후반부로 가면서 어느새 철학 수필이 된다. 생각을 거듭한 끝에 도달한 것은 파스칼처럼 '기독교'가 아니라 '선에 대한 믿음'이다. 레빈은 높고 맑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파스칼처럼 깨달음의 순간에 이른다. 그리고 파스칼처럼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을 외친다.
작가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문학을 벗어나 종교 철학으로 향한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 이후 자신의 믿음을 실천한다.
의도적으로 배치된 죽음과 인물 - 비극의 완성
'안나 카레니나'의 탐구 대상은 결혼도 사랑도 삶도 아닌 '죽음'이다. 죽음의 두려움에 삶은 의미를 잃고 자살을 생각케 한다. 불륜에 빠진 여자가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이 간단한 실제 사건에 영감을 받은 톨스토이는 무려 3권에 달하는 기나긴 장편소설을 써낸다.
죽음은 작가의 기획에 따라 곳곳에 심어진다. 안나가 오빠를 만나러 도착한 기차역에서 한 남자가 사고로 죽는다. 이 죽음은 안나의 자살에 대한 복선이다. 레빈의 형은 병으로 죽는다. 레빈의 아내는 임신한다. 죽음과 탄생의 병렬.
브론스키의 말이 경마 도중 쓰러지고 총에 맞아 죽는다. 브론스키는 안나가 죽은 후 전쟁터로 나간다. 죽으러 가는 것이다. 안나는 브론스키의 딸을 낳다가 거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다. 죽음과 탄생의 병렬.
안나와 레빈은 죽음을 생각하는 '쌍둥이'다. 빛과 그림자처럼 하나의 실체가 다른 모습을 보인다. 불륜에 빠진 여자는 삶의 의미인 사랑을 잃자 자살을 생각하고, 허무에 빠진 남자는 신이 없는 삶에서 허무에 빠져 자살을 생각한다.
안나는 죽지만 레빈은 산다. 흔히들 안나의 죽음이 불륜에 대한 처벌로 해석하는데, 레빈의 자살 충동을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어차피 둘 다 죽고 싶어 미칠 지경에 이른 인물이다.
레빈은 고작해야 작가의 말을 더 전달하기 위해 더 살 뿐이다. 안나와 레빈은 자신의 행복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인물이다. 지극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왜 죽음의 결말에 이르러야 하는가?
안나의 비극은 자기 욕망의 양자택일 불가능에 있다. 어머니로서 아들과 헤어지기를 거부하면서도, 여자로서 더는 아이 낳기를 거부한다.
결혼은 여자에게 어머니로서의 욕망과 여자로서의 욕망을 둘 다 유지하기 어렵게 한다. 따라서 안나는 이혼도 결혼도 거부한다. 이야기의 끝부분에 가면, 오히려 안나가 이혼도 결혼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러자 자살로 삶을 끝낸다.
물론, 브론스키에 대한 복수랍치고 갑자기 자살을 택하는 것은 작위적이다. 안나의 자살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독자는 대개들 여성인데, 자기 욕망에 솔직하고 위선적인 사회에 당당한 캐릭터가 그토록 허무하게 갑자기 죽어버리는 것에 대한 반감이다.
남편과 브론스키의 이름(퍼스트 네임)이 똑같이 알렉세이인 것은 작가의 장난일까. 남편은 안나를 용서한다. 브론스키는 사회적 성공을 버리고 안나를 사랑한다. 안나는 타오르는 열정에 스스로를 파괴시킬 뿐이다. 성인인 척하는 남편은 혐오스럽고 자신한테 실증이 난 브론스키는 미워 죽겠으니.
불륜소설로 만들려면 편집을 하면 된다. 레빈 이야기는 모조리 없애고 8부는 삭제하고 죽음 이야기는 모조리 없앤다. 그리고 안나는 자살하지 않으며 마침내 이혼하고 브론스키와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
이러면 안나는 별다른 갈등이 없이 그저 매력적인 여인으로 자기 욕망을 추구하여 성공한 자로 남는다. 이러면 소설이 아니다. 그냥 흔한 이야기일 뿐이다. 비극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안나는 갈등 중에 수많은 죽음 중에 갑자기 죽는다. 그리하여 비극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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