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세트
레프 톨스토이
문학동네
2010.03.04.

안나 카레니나 세트
레프 톨스토이
펭귄클래식코리아
2013.03.10.

윤새라의 참신한 번역

예전에 박형규 문학동네 번역본으로 읽었었는데, 순전히 윤새라의 번역 때문에 펭귄클래식코리아로 다시 읽었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소설 첫 문장을 이토록 간결하고 명확하게 번역하다니. 놀라웠다. 같은 소설인데 번역자에 따라 다른 소설로 읽히는 것이다. 번역문이 간결하고 정확하고 부드럽다.

박형규 문학동네의 번역문은 윤새라에 비하면 한 문장의 호흡이 길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문장 운율은 더 살렸다.

아마도 윤새라는 내 나이 또래이거나 더 어린 사람일 것이다. 즉, 한문투로 번역하는 '나이 든' 세대들이 돌아가셨거나 이제 활동을 하지 않는다. 한글 세대들이 번역을 맡으면서 소설이 새롭게 읽힌다.

윤새라 번역자의 작품해설조차 잘 읽힌다. 예전 교수들의 해설은 암호문에 가까웠다. 도대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나 쓰는지. 온갖 전문용어로 일반 독자는 절대 이해할 수 없도록 하는 게 목적인 듯 써냈으니.

외국 문학이론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가져다 직역하기에 바쁜 세대들이 이제 사라졌다. 이제야 제대로 공부하고 정말로 이해하고 진정으로 우리말로 번역할 줄 아는 교수들이 탄생한 것이다. 윤새라는 '너나들이' 같은 우리말 구사력까지 보여준다.


불륜소설과 철학소설의 이중주

작가의 의도야 어찌되었든, 이 소설은 대체로들 불륜소설로 읽는다. 이야기의 주요 흐름은 안나 카레니나라는 귀족 여인의 불륜이다.

그렇게 읽다보면 도대체 왜 쓸데없이 레빈이라는 남자 이야기를 하는지 불만일 것이다. 그리고 뭔 농사에 전쟁에 사냥에 이야기의 핵심과 그다지 상관없는 것들을 잔뜩 서술하는지. 작가 마음이니 뭐라 할 수 없고. 알아서들 건너뛰어 읽는다.

처음에는 불륜에 빠진 남녀의 심리를 절묘하게 그려내는 솜씨에 감탄하게 되는데, 차츰 지나치게 사변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사건 전개의 재미는 줄어든다.

죽음과 삶의 허무 문제를 다루면서 심각해진다.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레빈은 톨스토이의 분신이다. 그가 하는 말 대부분은 바로 작가 자신이 하려는 말이자 하고 싶은 말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끝은 7부 안나의 죽음이 아니라 8부 레빈의 선 의지다. 이는 작가의 관점이다. 불륜 소설로 보면 8부는 사족이다. 철학소설로 봐야 8부가 진정한 피날레다. 죽음과 허무에도 도대체 왜 사느냐에 대한 답이다.

읽는 내내 파스칼의 '팡세'가 떠올랐다. 신이 없는 인간의 비참함. 권력, 연애, 돈, 도박, 사냥, 예술 같은 것에 정신을 팔아서 자신의 불안을 생각지 않으려 한다. 자살하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 혹은 살아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신을 믿어서 지복을 누려라?

소설은 후반부로 가면서 어느새 철학 수필이 된다. 생각을 거듭한 끝에 도달한 것은 파스칼처럼 '기독교'가 아니라 '선에 대한 믿음'이다. 레빈은 높고 맑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파스칼처럼 깨달음의 순간에 이른다. 그리고 파스칼처럼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을 외친다.

작가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문학을 벗어나 종교 철학으로 향한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 이후 자신의 믿음을 실천한다.


의도적으로 배치된 죽음과 인물 - 비극의 완성


'안나 카레니나'의 탐구 대상은 결혼도 사랑도 삶도 아닌 '죽음'이다. 죽음의 두려움에 삶은 의미를 잃고 자살을 생각케 한다. 불륜에 빠진 여자가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이 간단한 실제 사건에 영감을 받은 톨스토이는 무려 3권에 달하는 기나긴 장편소설을 써낸다.

죽음은 작가의 기획에 따라 곳곳에 심어진다. 안나가 오빠를 만나러 도착한 기차역에서 한 남자가 사고로 죽는다. 이 죽음은 안나의 자살에 대한 복선이다. 레빈의 형은 병으로 죽는다. 레빈의 아내는 임신한다. 죽음과 탄생의 병렬.

브론스키의 말이 경마 도중 쓰러지고 총에 맞아 죽는다. 브론스키는 안나가 죽은 후 전쟁터로 나간다. 죽으러 가는 것이다. 안나는 브론스키의 딸을 낳다가 거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다. 죽음과 탄생의 병렬.

안나와 레빈은 죽음을 생각하는 '쌍둥이'다. 빛과 그림자처럼 하나의 실체가 다른 모습을 보인다. 불륜에 빠진 여자는 삶의 의미인 사랑을 잃자 자살을 생각하고, 허무에 빠진 남자는 신이 없는 삶에서 허무에 빠져 자살을 생각한다.

안나는 죽지만 레빈은 산다. 흔히들 안나의 죽음이 불륜에 대한 처벌로 해석하는데, 레빈의 자살 충동을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어차피 둘 다 죽고 싶어 미칠 지경에 이른 인물이다.

레빈은 고작해야 작가의 말을 더 전달하기 위해 더 살 뿐이다. 안나와 레빈은 자신의 행복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인물이다. 지극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왜 죽음의 결말에 이르러야 하는가?

안나의 비극은 자기 욕망의 양자택일 불가능에 있다. 어머니로서 아들과 헤어지기를 거부하면서도, 여자로서 더는 아이 낳기를 거부한다.

결혼은 여자에게 어머니로서의 욕망과 여자로서의 욕망을 둘 다 유지하기 어렵게 한다. 따라서 안나는 이혼도 결혼도 거부한다. 이야기의 끝부분에 가면, 오히려 안나가 이혼도 결혼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러자 자살로 삶을 끝낸다.

물론, 브론스키에 대한 복수랍치고 갑자기 자살을 택하는 것은 작위적이다. 안나의 자살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독자는 대개들 여성인데, 자기 욕망에 솔직하고 위선적인 사회에 당당한 캐릭터가 그토록 허무하게 갑자기 죽어버리는 것에 대한 반감이다.

남편과 브론스키의 이름(퍼스트 네임)이 똑같이 알렉세이인 것은 작가의 장난일까. 남편은 안나를 용서한다. 브론스키는 사회적 성공을 버리고 안나를 사랑한다. 안나는 타오르는 열정에 스스로를 파괴시킬 뿐이다. 성인인 척하는 남편은 혐오스럽고 자신한테 실증이 난 브론스키는 미워 죽겠으니.

불륜소설로 만들려면 편집을 하면 된다. 레빈 이야기는 모조리 없애고 8부는 삭제하고 죽음 이야기는 모조리 없앤다. 그리고 안나는 자살하지 않으며 마침내 이혼하고 브론스키와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

이러면 안나는 별다른 갈등이 없이 그저 매력적인 여인으로 자기 욕망을 추구하여 성공한 자로 남는다. 이러면 소설이 아니다. 그냥 흔한 이야기일 뿐이다. 비극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안나는 갈등 중에 수많은 죽음 중에 갑자기 죽는다. 그리하여 비극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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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더클래식 | 2020년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을 오랜만에 만났다. 대학생 시절에 읽은 후로 톨스토이를 접한 적이 없었다. 이 작은 책에는 7개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에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계시다'는 예전에 읽었었다.

나는 왜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계시다'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구두 수선공인 주인공이 창문을 통해서 사람들이 발만 보고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는 구절이 여전히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철학책이나 철학수필집에나 어울릴 법한 제목,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톨스토이의 단편 중에 가장 유명하다. 정교하게 배열한 사건 구성은 이야기의 거장이라 칭송할 만한 솜씨다. 특히, 진부한 교훈론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간결하게 조각해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톨스토이의 순수 창작이 아니다. 민담을 가져다가 무려 일 년에 걸쳐 썼다고 한다. 진부한 민담을 독자들이 새로운 이야기처럼 참신하게 느끼게 하려면 어떻게 써야할까? 작가가 택한 방법은 세부묘사보다는 친절한 설명이었다.

본래 이야기는 간결한 사건만 나열되어 있었으리라. 여기에 톨스토이는 성경 말씀과 자신의 사색을 넣어 이야기를 견고한 성처럼 만든다.

이야기 시작은 신약성경 요한일서의 몇몇 구절이다. 사도 요한이 말년에 에베소에서 썼으리라 추정한다. 하나님과의 교재와 사랑을 강조했다. 4장 16절 말씀이 핵심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야기는 세 가지 질문에 답한다.

1.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 사람의 마음에는 사랑이 있다.

2.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능력이 주어져 있지 않다.

3.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이나 원칙만을 고집하는 삶이나 부와 명예를 위한 삶은 모래성을 쌓는 것이다. 내게 잘되는 일이 생기면 기분이 좋고 행복하고 이런 게 잘사는 거야 싶겠지만 가끔씩 느껴지는 허무와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독감은 피할 수 없다. 과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것인가?

"모든 사람은 그들이 자신을 돌보고 앞날을 계획했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62쪽

탐욕으로 죽음에 이르는 농부(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자기 관점만 밀어붙이는 왕(아시리아 왕 아사르하돈), 자기 아이만 감싸는 부모(어른보다 슬기로운 소녀들)는 자기 욕심만 있고 사랑이 없다.

어쩌다 우리는 우리 세상을 지옥으로 바꾸고 있는가. "옛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 것을 가지고 만족했을 뿐,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았습니다." 168쪽 우리는 자기기만과 자기욕망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부를 쌓고 성공을 하고 유명해져도 당신 마음속에 사랑이 없으면 더는 살아가기 힘들다. 사업하다가 망해 봐라. 돈 없어지는 순간 친구들 대부분이 그대 곁을 떠난다. 높은 자리에 있다가 물러나 봐라. 여태까지 아부하던 녀석들이 욕을 하기 시작한다. 당신 말을 따르니까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하지 마라.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권력과 돈과 유명세다.

'사랑'이라는 단순하고 소박한 진리는 세상살이가 복잡하고 힘들 때일수록 어둠 속의 작은 빛이 환하게 보이듯 선명하게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톨스토이를 읽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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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전쟁과 평화 4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은이)
박형규 (옮긴이) | 문학동네 | 2017년

 

1부

옐렌은 황당하게 죽는다. 갑자기 협심증에 걸렸고 약물과다 복용으로 사망한다. 글쎄다, 소설가 톨스토이는 이 캐릭터를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데, 마땅한 방법이 없었던 모양이다. 요즘 일일 연속극 드라마에서 자주 써먹는 수법을 쓰다니.

방화범으로 잡혀 투옥된 피예르. 그러던 중 플라톤이라는 늙은 병사를 만난다. "모든 일은 우리 인간의 머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심판으로 정해진다 이겁니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선량한 플라톤.

안드레이는 결국 죽는다.

2부

피예르는 포로 생활 중에 내적 자유를 만끽한다. 가장 극단적인 상황, 언제 처형을 당할지 모르는 생활 중에서 말이다.

나폴레옹은 퇴각한다.

3부

피예르는 구조된다.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격퇴하는 러시아군.

4부

피예르는 다시 예전 생활로 되돌아간다. 재산은 오히려 늘어난다. 아내는 죽었고 안드레이도 죽었다. 나타샤를 마음껏 사랑할 수 있다.

에필로그가 길어서 당혹스러웠다.

1부.

피예르와 나탸샤는 결혼한다.

니콜라이는 현실적이고도 실용적인 결혼을 한다. 즉, 부잣집 여자한테 장가간다. 부모님이 가장 좋아하는 대로 결혼을 하게 된다. 

니콜라이 본인은 돈 때문에 결혼하는 것에 거부감이 많았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당장의 현실에서는 또 돈이 중요하고 그래서 방황하고 있었다. 우연과 행운을 통해, 부자지만 성격 좋은, 외모는 화려한 미인이 결코 아니지만, 공작영애 마리야와 맺어진다. 이 부분도 톨스토이는 이 캐릭터의 운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손쉬운 방법(걍 그렇게 서로 엮어진다. 따지지 마라.)으로 안전하게(결혼해서 행복하게 잘살았다네.) 처리했다.

하여, 이들은 아들 딸 잘 낳아 키우고 잘먹고 잘살았다네. 끝.

어, 아니네. 2부가 있네.

2부.

이야기는 없고 역사학 논문 같은 글만 나온다.

이제 진짜 끝났다.

다 읽은 소감으로는, 왜 이 소설이 그토록 칭송을 받는지 잘 모르겠다. 

스테판 츠바이크는 "이 소설을 읽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열린 창문 너머로 현실 세계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라고 격찬했던데... 허기야, 나도 미국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보고난 후에도 그렇게 소감을 밝혔으리라.

이 번역본은 1960년대 초판된 것을 개찬(고쳐서 다시 썼다는 말이다. 이 번역자는 옛날 분이라서 한자어를 즐겨 구사한다.)한 것이라 한다.

본래는 민음사에서 펴낸 연진희 번역본으로 읽으려고 했으나, 이미 전자책으로 사놓고 읽은 1권과 2권이 있어서 그냥 그대로 문학동네에서 펴낸 박형규 번역본으로 3권과 4권을 마저 사서 다 읽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박형규 번역으로 읽은 후에도 윤새라의 번역본으로 읽었으나, '전쟁과 평화'는 다시 또 읽을 마음이 현재로서는 없다. 다소 실망한 상태라서. 아무리 다른 좋은 번역본이라 해도 큰 줄거리를 변경할 정도는 아닐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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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전쟁과 평화 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은이)
박형규 (옮긴이) | 문학동네 | 2017년

3권에서는 톨스토이의 역사관이 나온다. 

"역사상의 사건에서 이른바 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그 사건에 명칭을 부여하는 라벨이며, 원래 라벨이라는 것이 그렇듯 사건 그 자체와는 가장 관계가 적다. 자기 자신에게는 자유로운 것이라 생각되던 영웅들의 모든 행위도 역사적 의미에서 보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전체와 관련되어 있고, 개벽 이전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역사의 법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관찰 대상을 완전히 바꿔 황제들과 대신들과 장군들은 내버려두고 대중을 이끈 무한히 작은 동질의 요소들을 연구해야 한다."

그가 주장하는 역사관은 영웅주의도 민중주의도 아니다. 역사적 사건은 여러 요소가 결합되어 나오는 것이라는 투로 말한다. 사과가 떨어진 원인을 비유로 들어서 얘기하는데, 우연도 아니고 필연도 아니고 잘 모르겠다 이런 식이다.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여기서 톨스토이가 왜 그렇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었는지, 혹은 욕을 먹고 있는지 알 수 있다.민중사관과 영웅사관 양쪽에서 모두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으로 회색주의자는 돌팔매를 맞을 수밖에 없다.

1812~1813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러시아 제국을 침공한다. 러시아 원정, 조국전쟁, 제2차 폴란드 전쟁 등을 불린다. 나폴레옹의 몰락에 결정타였던 전쟁이다.

결론을 이미 아는 상태에서, 결국 러시아의 승리와 나폴레옹의 대패,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가 뻐기듯 소설에서 서술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혹시라로 거슬리면 건너뛰고 읽으면 되겠다. 허기야, 러시아 국민 입장에서야 세계사에서 빛나는 부분이니 안 그렇게 쓰기란 불가능했겠지.

명심하라. 이 책은 '역사'가 아니라 역사'소설'이다. 실제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서술한 부분이 있어 짜증난다면, 주석으로 그런 부분을 설명해 놓았긴 했지만, 억지로 읽지 말고 이 책을 덮고 역사책을 읽어라. 

역사에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소위 공백 같은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모스크바 대화재는 그 원인을, 그러니까 누가 왜 방화를 했는지 혹은 자연발화였는지 모른다. 이런저런 설과 갖가지 추측이 있을 뿐이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점령하지만 도시는 이미 비어 있었다. 러시아가 설마 수도를 포기할까. 기꺼이 포기하고 뒤로 물러났다. 텅 빈 모스크바는 화재와 약탈로 채워진다.

이런 판국에 피예르는 나폴레옹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려 했으나 방화범으로 몰려 독방에 갇힌다.

나탸샤는 부상을 당해 거의 죽음에 가까워진 안드레이 공작을 간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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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전쟁과 평화 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은이)
박형규 (옮긴이) | 문학동네 | 2017년

신, 양심, 선, 형제애 - 톨스토이의 고뇌

2권 1부는 패전을 한 후 군인들이 고향으로 되돌아온 모습을 그린다. 참전을 안 했던 인물, 피예르의 근황도 나온다. 자기 스스로 예견했던, 결혼생활의 불행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소설 제목은 전쟁과 평화인데, 정작 등장인물들이 끝없이 고민하고 고뇌하는 것은 전쟁도 평화도 아니다. 행복과 사랑에 대해 끝없이 사색한다.

다 부질없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러면서 과연 살면서 가장 가치가 있고 의미있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 자기 스스로한테 묻는다.

젊은이들은 자기 사랑을 찾아, 행복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한다. 결혼을 안 하겠다고 선언하는 나타샤도 있고, 결혼을 잘못 했다고 후회하는 피에르도 있다. 자기의 이상형을 찾았다고 여기며 청혼하는 이들도 있다.

 

사랑의 짝대기가 계속 오간다. 청혼하고 거절당하고 낙담하고 분노하고 그런다.

요즘 보는 통속극 일일 드라마랑 거의 같은 이야기다. 돈, 결혼, 바람, 질투, 도박, 결투, 사랑, 연애, 출세, 소망, 꿈.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러시아 상류사회를 주로 묘사하고 있고, 따라서 결혼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다. 돈과 신분 상승의 길이고, 행복의 결정적이고도 중요한 요소다.

2권 2부. 아내와 헤어진 후 떠난 여행길 역참에서 피예르는 고민과 사색에 빠진다.

 

"무엇이 좋은 것인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미워해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살고, 나는 대체 무엇인가? 삶이란, 죽음이란 무엇인가? 만물을 지배하는 힘은 무엇인가?"

죽음, 절망, 불행의 끝에서 나오는 의문에 대한 답은 그 역참에서 만난, 늙은 프리메이슨한테서 제시된다. 

"자기 안의 존재를 정화하고 갱신해야 하며, 인식하기 전에 믿고, 스스로를 완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 마음속에는 양심이라고 불리는 하느님의 빛이 있는 것입니다."

신, 양심, 도덕적 삶. 톨스토이는 이를 단순히 소설 속에서 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행한다. 그리고 이런 행동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한테 외면당하고 쓸쓸하게, 혹은 열광 속에서 자신이 발견한 진리 속에서 죽는다.

현실에서 돈 있으면 신으로 대접을 받지만 돈 없으면 시체 취급을 받는다. 진리 따위는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은.

애써 양심이니 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조금만 생각을 해 보면 누군가의 부는 그 누군가의 희생이라는 팩트체크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는 이를 한 노인이 피예르에게 한다.

 

"당신은 재산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썼습니까? 이웃을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몇만이나 되는 당신의 농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들을 도와준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당신은 방탕한 생활을 위해 그들의 노고를 이용했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내가 운이 좋아서 재능을 발휘해서 이 많은 부를 획득했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에 집착하고 고집하고 절대진리로 믿겠지만, 결국 그 돈은 그 누군가의 노력이며 희생임을 부정할 수는 '양심상의 사실'인 것이다.

죽어라 일한다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가난을 면하는 정도고 그럭저럭 생황을 하는 수준이다. 재능이 있다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재능으로 만든 유형 무형의 서비스가 대단히 많이 팔려야 남들이 부러워 하는 부를 축적할 수 있다. 

 

소설 써서 돈을 무지막지하게 많이 벌고 싶은가? 롤링 여사처럼 되고 싶다고? 당신이 해리포터 같은 소설을 쓴다고 해도 곧바로 갑부가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게 출판되어 책으로 나오고 많이 팔려야, 비로소 부자가 된다. 절대 다수의 책이 잘 팔리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불행하게도, 돈 자체는 행복이 아니다. 마치 책을 아무리 많이 사 놓았어도 읽지 않은 것처럼, 그 돈이 쓰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게다가 돈이 잘못 쓰이면 방탕과 자만에 빠지기 쉽다. 사기나 도둑질로 어마어마한 돈을 거뭐쥔 자들이 그 돈을 어디에 썼다고 하는가. 유흥비. 그 돈으로 책을 사서 읽거나 누군가를 돕는 데 썼다는 얘기는 소설에서조차 잘 나오지 않는다.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에서 말하는 것은 착한 일을 해서 인류가 형제애에 도달하자는 것이다. 너무 간단하게 줄였나? 결국 이거다. 쓸데없이 깊게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다. 비평서 해설서 아무리 파 봐야 결국 이거다.

다시 소설로 되돌아가면, 피예르는 프리메이슨에 가입하고 신을 믿는 쪽으로 삶의 진로를 바꾼다. 갱생과 덕행의 길로 들어선다. 무신론자가 종교라는 달콤한 사탕을 열심히 빨아댄다. 이렇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이 글을 쓰는 나는, 불가지론자다.

하지만 어리숙하고 실무를 모르는 피예르는 실무자인 관리인한테 속아서 자신이 농노, 농민들한테 큰나큰 선을 행한 것으로 착각한다. 실제로는 착취가 더욱 가중되었다.

톨스토이 자신이 실패했던 농민생활 개선을 피예르와 안드레이의 대화로 낱낱이 가혹하게 자기 비판한다. 지금에서는 계몽주의가 구닥다리지만 당시에는 꽤나 혁명적이었구나 싶다.

안드레이는 행복을 가족한테서 찾는다. 그토록 추구했던 명예는 되도록 자제한다. 태어난 아들과 곁에 있는 아버지와 여동생에 충실하고 다시는 전장에 안 나가려고 한다.

그렇다고 안드레이가 고민이 없는 건 또 아니다. "내 눈앞에 소중한 사람, 나와 굳게 맺어진 사람이 있고, 나는 그 존재에게 죄를 지었다고 느껴 그것을 보상하고 싶은데, 갑자기 그 존재가 고민하고 번민하다가 사라져버려... 어째서일까?"

2부 끝에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서로 강화를 맺는다. 서로 적이었다가 이렇게 갑자기 동맹이 되어, 서로에게 최고 훈장을 수여하고 또 상대방 군사에게도 훈장을 준다.

병사들은 병에 시달리고 굶주리고 있는데, 황제라는 것들은 이러고 있었다. 로스토프는 그동안 품었던 러시아 황제에 대한 환상과 꿈이 깨진다.

2권 3부

그동안 러시아의 동맹이었던 오스트리아를, 러시아와 프랑스 연합군이 쳐들어간다.

소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는 1세다. 농노 해방령을 발표한 2세로 잘못 알고 있었다. 뭐 내가 러시아 역사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으니.

러시아 제국 근대화 시대다. 이제 관직은 시험을 쳐서 합격해야 얻을 수 있고 공짜로 부려먹던 농노는 해방시켜야 한다.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로마노프, 즉 알렉산드르 1세는 스페란스키 개혁이라는 걸 한다. 이번 3부에서 그 스페란스키를 묘사하고 있다. 주요 인물들 중 한 명인 안드레이가 그를 만난다.

알렉산드르 1세는 이 소설 '전쟁과 평화' 후반부에 나오는, 나폴레온 격퇴 전쟁, 이른바 '조국 전쟁'이라 불리는 전쟁에서 대승리를 거두어서 러시아의 영웅으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어쩐지 무슨 인신처럼 묘사되더니.

2권 4부

안드레이와 나타샤는 약혼한다. 가족, 자기 가까이에 있는 이들에게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결혼을 택한다. 안드레이와 나타샤의 사랑은 무척 낭만적으로 그려져 있다. 소설 후반부에 가면 정말이지 그렇다.

종교에의 몰두를 행복이라고 여기는 이도 있다. 안드레이의 여동생 마리야가 그렇다. 속세의 모든 것을 버리고 순례자의 길을 택하고 싶지만, 사랑하는 조카와 아버지를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피예르는 우울에 빠져 지낸다. 세속의 즐거움과 기존의 습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억지로 간신히 종교단체 활동을 하는 중이다.

소설 내내 행복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런 질문에 저런 생각에 고민과 성찰을 하는 등장인물들의 독백을 읽을 수 있다. 계속 반성을 거듭하고 확고한 결론이 나지 않는다. 사는 데 정답이 없듯.

2권 5부

소설 '전쟁과 폏화'에서 가장 많이 고민하고 방황하는 이는 피예르다. 작가 톨스토이를 가장 많이 닮았다. 피예르는 독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 혹은 주목을 받는 인물이다. '전쟁과 평화'에 딱히 주인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주인공 한 명을 뽑으라면 이 피예르다.

피예르는 종교단체 소속자들의 위선에 질렸고 환락에 열중하며 그냥저냥 살아간다. 잡담, 독서, 음주의 연속이 삶에 빠져든다.

"'보잘것없는 것도 없고, 중요한 것도 없다, 다 마찬가지다. 그저 되도록 피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피예르는 생각했다."

당시에 멜랑콜리가 유행이었던 모습은, 코미디다. 실제로는 전혀 우울하지도 절망하지도 삶을 비관하지도 않으면서 그런 척하고 또 그걸 인정해 주는 분위기다.

나타샤는 바람둥이 아나톨한테 홀딱 반해서 안드레이와 파혼하고 야반도주를 하려 한다. 이런 걸 보면, 그 어떤 인물도 이상형으로 그리거나 완벽한 인물로 묘사되진 않는다.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을 알고서 읽기 때문에,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진정한 사랑은 여러 오해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한 뒤에 획득되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피에르와 나타샤의 연결 감정을 잘 마련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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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전쟁과 평화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은이)
박형규 (옮긴이) | 문학동네 | 2016년

미화하지 않은 전쟁 드라마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고전, 걸작, 명작. 볼드모트처럼 그 이름의 무게를 눌려서 읽기를 두려워 하지 마라. 모든 전쟁은 본질적으로 같다. 미드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좋아했다면 소설 '전쟁과 평화'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드라마로는 잘 알 수 없었던 인물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읽어라.

1권 1부. 여기서 1부 끝이구나 느낄 때 정확히 1부가 끝나서 놀랐다. 뭐 별거 아니고 사소한 건데... 그렇게 잘 맞춘 이유는 간단하다. 전쟁 시작 바로 직전까지가 1부니까.

이미 등장인물들의 미래를 알기 때문에 오히려 과거, 그러니까 소설의 시작 부분이 흥미롭게 읽힌다.

이러저러하게 이 사람 저 사람이 엮이게 되는 걸 보는 재미랄까. 거미줄을 보는 느낌이다.

톨스토이를 열광하며 읽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어쩐지 앞서 작가들과 달리 평생 읽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1권 2부는 초반 전쟁까지는 다룬다. 전쟁을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추화하지도 않았다.

전반적인 전쟁 상황과 한 개인 병사의 내면까지 모두 다룬다. 미드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보는 것 같았다. 시대만 다를 뿐 전쟁은 본질적으로 변함이 없다. 혼란과 광란, 공포와 두려움, 어리석음과 위선.

1권 3부는 초기 전쟁 후 여러 상황을 보여준다. 전쟁과 평화에서 주요 인물들 중에 하나인 피예르는 결국 옐렌과 결혼한다.

드라마는 아무래도 인물의 심리와 속마음을 알기 어려운데 소설은 그렇지 않아서, 피예르는 이 결혼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직감하고 미래의 불행을 확신까지 하지만 당장의 황홀한 행복감에 취해 이를 무시한다.

또 하나의 주요 인물인 안드레이는 이 피예르와는 친한 친구다. 그러면서 정반대 혹은 상반대 캐릭터다. 상류 사회의 허례허식에 질린 사람으로, 사회적으로는 대단히 성공했고 정말이지 남부러울 게 없는 사람임에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불행에 빠져 있다. 그래서 이 지긋지긋한 상류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전쟁을 기꺼이 환영한다.

피예르는 딱히 별다른 노력이 없이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고 관직도 받고 예쁜 여자가 알아서 결혼해 주는 식으로 인생이 풀린다. 그냥 가만 있는데 알아서 돈, 명예, 인기, 자리, 여자가 굴러 들어온다. 너무 행복해서 미칠 지경에 이른다. 물론 뒤에 가면 좀 달라지긴 한다. 그래도 정말이지 운이 더럽게도 좋은 녀석이다. 

 

황제 앞에서 열병식 하는 군인들의 감정이란, 오늘날 대부분 민주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는 우리로서는 실감하기 어렵지만, 종교 단체 소속의 광신자 집단 같다. 황제를 위해 기꺼이 죽겠다, 아니 죽고 싶다고 할 정도로 열광한다.

전쟁은 누군가에게는 기회이기도 하다. 출세를 위해, 야망을 위해 내달리는 젊은이들. 하지만 죽음과 전장의 공포에 압도당하고 만다.

전장은 개판이었다. 아군끼리 총질을 하고 적을 보자 도망치기 바쁜 병사들. 쌓아 놓은 작전은 계속 움직이는 실제 전장 상황에서 무기력하게 허물어진다. 

러시아는 나폴레온에게 패한다. 이 과정에서 안드레이는 포로로 잡힌다. 안드레이 공작은 죽음 직전의 경험을 한 후부터 삶도 죽음도 부질없음을 절감한다. 그리고 신을 찾는다. 구원을 갈구한다. 전쟁 전 평온한 행복을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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