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 밀러
헨리 제임스
웅진씽크빅
2009.03.27.

소설 '데이지 밀러'는 발표 당시에 '나름' 베스트셀러였다. 연애소설로 미국에서 많이 팔렸다고. 이 작품으로 자신감을 얻은 작가는 자신의 문체와 주제를 더욱 확장하게 된다.

한 번 확립한 스타일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 법이다. 같은 말을 주고받으며 웃음을 만들고, 명확하게 말하지 않아서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등장인물의 의식을 세세하게 그려내는 문체는 이 소설 이후 계속된다. 미국 문화와 영국 유럽 문화 사이에 갈등하는 남녀를 그리는 주제도 이후 반복된다.

데이지 밀러라는 명랑하고 자유분방한 미국 아가씨가 유럽의 고지식한 문화에 익숙해서 뻣뻣한 남자한테 연애 거는 이야기다. 남자가 쓴 연애소설이라서 그런지, 남자 입장에서 펼쳐지는, 여자에 대한 환상이 잘 그려져 있다. 보수적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해 갑갑한 이 남자는 데이지가 아름답지만 그다지 정숙하지 못하다고 판결을 내려버린다.

여자 바람둥이로 이 남자 저 남자 아무하고나 연애 건다는 판단은, 데이지 밀러가 로마에서 이탈리아 미남과 사귀면서 더욱 확고하게 굳어진다. 그러면서 이 남자 질투 최고조로 오른다. 밀당할 줄 전혀 모르니, 연애는 젬병이다. 반면, 여자는 연애 도사라서 남자를 개를 데리고 놀듯 완전히 휘어잡는다.

남자 주인공 윈터본은 작가 자신의 초상이다. 하지만 똑같진 않다. 이토록 연애 감정을 섬세하게 글로 그려낼 줄 아는 걸 보면 연애를 아주 못할 것 같진 않은데, 이 남자 평생 독신이었다.

이 여자가 정말 날 좋아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런저런 암시로 사랑을 표현해낸다. 이 여자가 이 남자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뭔가 감정이 있는 듯 보인다. 이야기는 시소처럼 사랑인지 아닌지를 왔다갔다가 하다가 마침내 사랑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난다.

헨리 제임스가 글로 표현한 특유의 '모호한 긴장감'은 영상으로는 표현이 안 된다. 영상은 확실하게 눈에 보이는데다가 인물의 의식을 세세하게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어서다.

사건 전개의 이야기만 인상에 남으면 그야말로 시시한 이야기일 뿐이다. 작가는 들은 이야기(실화)를 가져다 썼다. 그만큼 당시에나 지금에나 흔하디 흔한 연애 사건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를 특별하게 보이도록 글로 표현해낸다. 미묘하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감정선을 느낄 수 있도록 이야기를 조각한다.

더불어, 연애를 둘러싼 문화적 갈등도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계층이니 신분이니 예의범절이니 하는 사회적 구속력에 매여있는 유럽문화와 그것에서 자유로운 미국문화는 윈터본과 데이지 밀러를 통해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로서는 이 작품에서 미혼 여성이 반드시 자신을 감시할 사람을 동반하면서 장소를 이동해야 하고 한여름에도 장갑을 끼어야 하는 당시 시대의 '관습'이 위선적이고 갑갑하게 느껴지리라.

흥미롭게도, 계속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오늘날이라고 뭐 크게 다른가 싶다. 남녀가 순수하고 솔직하게 만나 사랑하는 경우는 오늘날도 드물다. 서로 계산하고 거래하듯 만나지 않은가. 여자친구한테 화장솜을 선물했다는 남자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연애가 얼마나 기만적인 행위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결혼은 더 그렇다. 혼수로 문제가 생겨 파혼하거나 이혼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우리는 정말 사랑하고 있는가.

'데이지 밀러'는 순수한 사랑에 대한 바람을 간직하게 하는, 보석 같은 이야기다. 아마도 현실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일인 듯하다. 어쩌면 완전한 사랑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랑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으리라.

Posted by love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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