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지음
원유경 옮김/열린책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을 때면 언제나 뒤가 비치는 습자지를 보는 느낌이 든다. 저렇게 말하는 캐릭터 뒤에 작가의 육성. 이렇게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차분하게 내는 수필 같은 문장들.

부유하고 행운이 가득한 삶 속에서 우아하게 사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불행하고 가난한 삶을 사는 중에 자신감을 잃지 않고 산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끝장난 결혼과 경제적 곤란 속에서 세련된 인품을 유지하는 여성을, '오만과 편견'에 쓰인 문장에서 볼 수 있다. 솔직하면서도 당당한 '제인 오스틴'을 읽을 수 있다.

연애와 결혼을 대단히 현실적으로 실질적으로 다루면서도 그 과정과 결말은 낭만적으로, 혹은 로맨스장르 소설의 규칙을 충실하게 따른다. 결혼했다로 끝난다. 그 후로 둘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을 거라고 암시한다.

전반적으로 번역이 나쁘진 않지만, 아주 좋다고 할 수도 없었다.

YOU를 당신으로 고지식하게 직역한 건 거슬린다. 다른 말은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최대한 바꿨으면서 유독 YOU만은 당신으로 꼬박꼬박 옮긴 이유를 모르겠다.

하나 더. 영어의 어순을 고지식하게 옮기다 보니 우리말 어순을 지키지 못해 오류가 났다. "나의 결혼에 대한 생각." 수식어는 피수식어 바로 앞에 두던지 쉼표를 이용해서 독자의 혼동을 피해야 한다. "결혼에 대한 나의 생각" 또는 "나의, 결혼에 대한 생각"으로 써야 맞다.

인간을 개미 보듯 관찰하며 글을 쓰는 사람은 고독한 게 아니라 고집스러운 것이다. 인간에 대해 실망한 사람은 대체로 인간 외의 것에서 위안을 찾는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을 인간이 아닌 관찰 대상자로 바꾼다. "엘리자베스는 그 상황에 눌리지 않고 차분하게 자기 앞의 세 여성을 관찰할 수 있었다."

제인 오스틴은 성공적인 결혼은커녕 경제적인 독립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았다. 갖지 못한 것,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을까. 현실은 시궁창이었으나 소설은 궁전이었다. 작가는 소설에서 연애와 결혼에 모두 성공한 주인공을 그려낸다. 자신이 원하는 환상 속 나라로 들어간다.

"재산이 많은 미혼 남성이라면 반드시 아내를 필요로 한다는 말은 널리 인정되는 진리이다." 이 첫 문장은 소설 전체를 요약하고 대변한다. 그리고 할리퀸 로맨스소설의 법칙이기도 하다.

키 크고 잘생겼으며 부자에다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젊은 미혼 남성이 가난하지만 독립심이 있으면서 착한 성품에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운다는, 밝은 성격의 미혼 여성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

이 결혼은 말 그대로 소설이며 환상이자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로또 복권 1등 당첨이 연속으로 세 번 일어나거나 같은 장소에서 벼락을 두 번 맞는 것만큼이나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런 결혼은 여성의 가장 절실한 욕망이기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여성의 가장 손쉽고 빠른 신분 상승 및 부의 획득은 결혼이다. 문제는 그런 일은 실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는 점이며, 웬만해서는 절대로 이 판타지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상은 자유다. 게다가 공짜다.

세계문학고전으로 불리며 계속 읽히고 연구되는 소설 중에는 그다지 납득이 안 되는 경우가 있는데, 제인 오스틴의 소설도 그중 하나다. 사실주의 어쩌니 여성의 목소리니 사회소설이니 하면서 애써 훌륭한 작품이니 대단한 소설이니 떠들어대지만 그래봤자 요즘 흔히 보는 할리퀸 칙릿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않는가.

최신 여성지의 한쪽에 실린 연애 충고 칼럼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드는, 옛날 소설이라니. 연애와 결혼 문제는 과학기술과 달리 거의 발달하지 못한 모양이다. 연애고 결혼이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요즘이라도 말이다. 사랑은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이며 비논리적인 환상이면서 구차스러운 현실에 빠져 죽지 않도록 해준다. 상상이라도 해도 감정은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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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인물 묘사의 악마적 탁월함

중학생 때 이 소설을 처음 읽었는데, 그때는 정말 지겨웠다. 무슨 사람들이 나와서 조잘조잘 수다만 떨고 뭘 하는 게 하나도 없는 거다. 고작 뭘 한다는 게 춤추거나 독서, 산책, 혹은 카드놀이라니. 그땐 정말 재미없었다. 결혼을 생각할 나이가 넘으면 이 책은 어릴 적과는 다르게 읽힌다.

제인 오스틴의 연애소설은 철저하게 의도적으로 세상의 슬픔과 절망을 배제한다. 전쟁도 죽음도 질병도 실업도 가난도 없다. 특별한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라고 고작 날씨다. 비가 와요. 사람들은 춤추고 밥먹고 카드놀이를 하며 산책하고 편지를 쓴다.

이 소설은 초고가 있었는데 그 제목은 '첫인상'이었고 서간체 소설이었다. 완성된 원고에 편지가 자주 나오는 건 그래서고 첫인상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짐작이지만 초고는 집안 반대로 결혼이 무산된 상태의 감정이 넘치는 상태에서 썼을 것이고 개고를 거듭하면서 과도한 감정은 제거되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시작부터 끝까지 놀랍고도 불편했던 점은, 남자의 돈과 여자의 외모를 노골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선언/농담/격언 같은 첫문장이라니. "부유한 독신 남성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이다."(시공사 9쪽)

다시 읽어 보니, "제가 원하는 진정한 찬사는 저를 진실된 사람으로 보아주는 것이에요."(시공사 139쪽) 이런 대사도 있다. 역시 명작이다.

작가가 모든 등장인물에게 공평하다는 점도 주목되는 특징이다. 그 어떤 연애소설에서도 보기 힘든 이야기 기술이다.

이 소설이 유쾌한 것은 단지 해피엔딩이라서가 아니다. 등장인물 모두가 자기 성격을 그대로 유지한 채 행복하다는 점이다. 자신의 장단점이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변치 않으면서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는 점이 유쾌한 것이다.

"저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의 판단이 어떠하든 개의치 않고, 제 판단에 따라 제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그대로 행동하기로 마음먹었을 뿐입니다." (펭귄클래식코리아 특별판 466쪽)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다. 천한 것이 감히 내 조카랑 결혼하려 든다며 요즘 드라마에서 자주 보는 온갖 모욕을 퍼붓는 부잣집 나이든 여인에게 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이 당당하고 확고하게 하는 말이다.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이지 않았을까.

인간의 약점을 비웃으면서도 냉소적이진 않다. 이 점이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다. 다른 풍자소설은 불편하지만,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풍자소설 관점에서 보면 주인공은 단연 콜린스다. 그는 웃기는 데 천하무적 캐릭터다. 다아시 따윈 상대도 안 된다. 

이 작품은 좀 답답한 구석이 있다. 작가는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거나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군대가 언급되는데, 제복 얘기만 반복할 뿐이다. 전쟁 같은 사회적 불안은 되도록 자세한 언급을 자제한다. 한사상속을 여러 번 외치기만 할 뿐 남녀평등을 주장하진 않는다. 남녀불평등과 사회적 불평등을 언급하지만 감히 그 질서를 전복하겠다는 말은 삼간다.

우리의 주인공 엘리자베스가 청혼을 거절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남다른 듯하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작가의 결혼 실패와 겹치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돈이냐 사랑이냐의 문제는 표면적인 문제이고 사랑이든 결혼이든 자기 소망대로 이룰 수 없었던 것은 슬픈 일이니까.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보여주는 인물묘사는 악마적인 탁월함이 있다. 그 어떤 소설에서 이토록 간결하고 명확하게 사람을 조각해낸 문장을 읽어본 적이 없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는 듯한 생생함과 옆집 아줌마의 수다를 듣는 듯한 편안함과 클래식 음악을 듣는 듯한 고상함이 마법의 황금 비율로 섞인 글이다.

"키티와 리디아는 그 사람(위컴)의 변심을 저(엘리자베스)보다 더 슬퍼하고 있답니다. 아직 어려 세상의 이치를 모르니, 못생긴 청년이든 잘생긴 청년이든 먹고살 것은 있어야 한다는 굴욕적인 깨달음을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이죠."(펭귄클래식코리아 특별판 205쪽)

'오만과 편견'이 연애소설 결혼 판타지만을 추구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은 이런 문장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결혼에 대한 환상에만 매달리거나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넣어서, 오히려 소설이라기보다는 처세술로 보일 정도다. 제인 오스틴은 소설에서 계속 돈 얘기를 한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내가 정말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보다도 적어. 나는 세상에 대해 알수록 세상이 점점 싫어져. 사람들은 모두 모순투성이고 겉으로 드러난 장점이나 양식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내 믿음을 날마다 확인하고 있으니까."(펭귄클래식코리아 특별판 185쪽)

작가 제인 오스틴이 자신의 결혼이 무산되고 독신으로 지냈어야 했던 이유를 여주인공 엘리자베스를 통해 항변하듯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어지는 문장에서 리지의 언니인 제인을 통해 인식의 균형을 잡아 다시 생각을 정리하는 걸 보면, 왜 이 소설이 고전이 되었으며 왜 연애소설의 차원을 넘고 있는지 보여준다. 제인이라는 이름은 영어권 사회에서 흔하지만 작가와 등장인물의 이름이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다지 잘난 게 없지만 나름 착하고 성실하고 똑똑하고 그냥저냥 못생기진 않은 여자가 키 크고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한다. 이 한 문장은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로맨스 소설의 뼈대를 말해준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이후 불멸의 플롯이다.

'오만과 편견' 영상물은 1995년 BBC 드라마와 2005년 영화가 유명한데, 나는 드라마 쪽이 좋다. 제인은 영화 쪽이 마음에 들고 엘리자베스는 드라마 쪽이 마음에 든다.

오만과 편격 각 번역본의 특징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지음/민음사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지음, 원유경 옮김/열린책들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지음, 고정아 옮김/시공사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지음, 김정아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오만과 편견 - 전2권 (한글판 + 영문판)
제인 오스틴 지음, 김유미 옮김/더클래식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지음, 이미선 옮김/현대문학

세계문학전집 작품 중에 가장 인기가 있을 게 분명한 <오만과 편견>은, 고전이라 불리는 소설 중에 가장 쉽고 편하고도 빠르게 재미있게 읽힌다. 남자가 번역한 건 피하라. 너무 점잖다. 어찌나 갑갑한지.

시공사 고정아의 번역은 간결하면서도 베넷 부인의 오도방정을 잘 살렸다. 참고로, 이 책에는 버지니아 울프가 제인 오스틴에 대해 평한 글을 부록으로 실었다. 분홍빛 표지가 예뻐서 많이들 사기도 한다.

펭귄클래식코리아 김정아의 번역은 합쇼체를 주로 하되 간간히 해요체를 섞어서 화자를 확연하게 드러내는 식이다. 이는 간결하게 '다'로 끝나는 문장으로 번역한 대다수와 확연히 다르다. 화자를 되도록 인식하지 않고 이야기 자체에 몰입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더클래식은 가격이 싸서 번역이 좋지 못할 거라 의심하기 쉬운데,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다.

열린책들 번역은 무난해서 별다른 특징은 없었다.

가장 많이 팔리고 읽히는 책은 민음사다.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재산깨나? :-) 감정을 넣어서 단어를 넣었다. 이런 문장이 잘 읽히고 이해도 잘 되는 편이다. 

최근에 나온 현대문학 판은 삽화가 있는 게 특징이다.


번역 비교 평가

'오만과 편견'을 원문으로 읽으니 만만치 않다. 번역본 네 개랑 같이 봐도 인터넷 검색을 해도 도저히 for a kingdom! 이 숙어 뜻을 '정확히' 모르겠다. 열린책들 번역문(정말이지!)을 보면 대략 짐작은 가지만. 사전에 안 나온다.

번역에 정답은 없다. 선호가 있을 뿐. 때론 생략이나 첨가 혹은 변형도 필요하다. 단어 선택에 직면하면 번역자의 취향과 경험에 좌우될 것이다.

딱 한 문장만 봐도 번역이 제각각이다.

I quite detest the man.
그 남자 정말 싫어요. - 열린책들
정말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었어요! - 시공사 고정아!
나는 그 남자가 정말 싫어요. - 펭귄클래식코리아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남자예요. - 더클래식

고정아 번역은 참 뭐라 해야 하나. 이건 뭐 원문을 능가해버리니. 번역은 그만하고 어서 소설 쓰세요. 언어 구사력이 이 정도면 번역에 자기 재능을 낭비하는 거다.

전반적인 느낌으론 이렇다.

시공사 : 고정아는 단어 선택의 맛을 안다. 번역이 단순히 원문을 잘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원문을 우리말로 돋보이게 창조하는 예술임을 보여준다.
펭귄클래식코리아 : 직역과 의역이 혼재. 어미를 요나 습니다로. 이 점은 호불호가 극명.
더클래식 : 의역이 많은 편이고 원문에 없지만 분위기상 어울리는 문장을 추가하거나 변형했다. 읽기에는 편할 것이다. 그러나 원문 충실도는 떨어짐.
열린책들 : 원문에 가까운 번역. 원문의 문장 구조와 순서를 잘 지킴. 원서랑 같이 읽기에는 가장 좋다.

201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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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있다고, 하루키가 고백했다
사이토 다카시
글담

일본 연애 소설 독후감? 나름 재미있었다.

로맨스 소설은 십대 이삼십대 여성들이 먹어치우듯 읽는다. 반면 남자들은 거의 안 읽는다. 운명 같은 사랑을 믿는가? 저는 믿어요. 아니 믿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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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수잔
제인 오스틴 지음
김은화.박진수 옮김
바른번역(왓북)


제인 오스틴의 장편소설 여섯 편 외에 완성작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이 '레이디 수잔'이다. 장편소설은 이미 다 번역이 되어서 나와 있었지만 이 단편소설은 그동안 번역이 된 적이 없었다. 2014년 8월에 바른번역이라는 출판사에서 전자책 PDF 파일로 번역해서 냈다. 종이책은 없다.

 



이건 예상인데, 조금만 더 기다리면 다른 출판사에서 종이책으로 나올 것이다. 이 소설이 영화로 제작 중에 있으니까. 이 한 작품만으로 종이책으로 내긴 그렇고 미완성 작품과 초기 습작을 묶어서 낼 것이다. 영어 원서 책은 그렇게 나와 있다. 눈치 빠른 편집자라면 기획안 내서 어서 출판하라!

악녀 사이코패스 레이디 수잔 이야기다. 뛰어난 외모와 교묘한 말주변으로 주변 사람들을 이용해 먹는 여자다. 양심의 가책이 전혀 없다.

언제나 그렇듯 제인 오스틴 이야기의 핵심은 결혼이다. 이 소설도 예외는 아니다. 예외라면 악당 캐릭터를 전면에 내새우고 있다는 점이다. 대개는 착한 여자 캐릭터가 시집 잘갔다는 식으로 해피엔딩을 만든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쁜 년이 계속 나쁜 짓을 하다가 나쁜 년으로 끝난다. 어쨌거나 이야기의 끝은 결혼이다.

도대체 레이디 수잔은 과연 어떤 년인가. 남자 사냥꾼이다. 미혼 기혼 안 가린다. 꼬셔서 결혼해서 먹어치우려 든다. 자기 딸마저 이용해먹는다. 소설 한복판으로 들어가면 레이디 수잔이 엮는 애정 그물망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돈 많고 괜찮다 싶은 남자란 남자는 다 꼬셔 놓는다.

서간체 형식이라서 맨 끝 결말만 빼고는 편지 마흔한 통이 줄줄이 나온다. 받는이에 따라 말을 달리 하는 편지로 겉과 속이 다른 수잔을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역시 제인 오스틴이다. 인물 묘사의 장인이다. 열여덟 살 때 쓴 초기 작품이지만 재능은 충분히 발휘했다. 다만, 끝이 약하다. 쓰다가 서둘러 마무리한 것 같다. 아직 필력이 부족한 탓이겠지.

'레이디 수잔'은 오가는 편지로 이야기를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제인 오스틴 소설의 특성인 여러 인물의 친인척 관계를 초반에 파악하기가 까다로울 것이다. 읽어가면서 차근차근 이름 적고 메모해 가든가, 이 책 맨앞에 있는 등장인물 소개를 참고하면 되겠다.

나중에 쓴 장편소설을 미리 엿볼 수 있다. 감기 얘기는 '이성과 감성'에서 나오고 간통에 뭐에 물불 안 가리는 문어발 연애는 '맨스필드 파크'에 나온다. '레이디 수잔'은 '맨스필드 파크'의 밑그림으로 보인다. 악당의 비윤리적인 행각을 그린다는 점에서 '레이디 수잔'과 '맨스필드 파크'는 쌍둥이다.

서간체소설 형식을, 제인 오스틴은 꽤나 좋아했다. 우리가 즐겨 읽는, 제인 오스틴의 장편소설은 개작 이전에는 편지로만 서술되어 있었다. 편지가 소설에 자주 나오는 것은 그래서다.

2015.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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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생거 사원 혹은 노생거 수도원(펭귄클래식코리아만 이 제목을 쓴다.) 번역본이 다섯 개인데(현재 구입할 수 있는 것은 네 개) 그중에 을유문화사 판을 선택했다. 표지 그림이 제일 예쁘다. 예쁜 것은 누가 뭐래도 옳다. 다른 이유는 없다. 마침 제일 최근에 나왔다. 2015년 3월.

 



을유세계문학전집은 이 책이 처음이다. 만듦새가 좋다. 실 제본에 두꺼운 표지. 갈색 갈피끈. 적당한 크기. 펭귄클래식코리아보다는 세로가 1센치미터 더 작고 가로는 표지만 같고 본문 내지는 4밀리미터가 더 작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보다는 세로가 3센치미터 작다. 아니 그 반대로 말하는 것이 맞다. 민음사의 세로가 길다. 가격도 적당하다.

제목 번역은 직역이다. 노생거 사원/수도원. Northanger Abbey. 소설을 읽어 보면 노생거는 옛날에 사원/수도원이었던 대저택이다. 따라서 뜻에 충실하게 옮기면 '노생거 저택/대저택'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옮기지 않는 것이 올바른 이유는 이 소설이 그런 사원/수도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고딕소설을 풍자하면서 쓴 연애소설이기 때문이다.

제인 오스틴 당시에 유행하고 많이 팔린 소설은 고딕소설이다. 다음과 같은 전형을 따른다. 일단 배경이 옛날 사원이나 수도원이다. 이곳에는 비밀이 있디. 여자주인공이 그 저택에 초대되어 가게 된다. 그리고 살인과 음모 속에서 자신의 사랑을 발견한다.

고딕소설을 광적으로 좋아하고 많이 읽은 여주인공이 우연히 그런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사원/수도원 저택에 초대를 받으면서 벌어지는 요절복통 해피엔딩 로맨스를, 오스틴은 그려낸다.

 



초기 작품이라서 '오만과 편견'의 글솜씨까지는 보여주지 않지만 곳곳에서 '오만과 편견'의 자취를 읽어내는 재미가 있다. 오스틴의 소설은 서로 비슷하다. 우여곡절 끝에 여주인공이 좋은 남자랑 결혼한다. 그리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

오스틴은 당시 유행하는 소설과는 다른 소설을 쓰고자 했음이 분명하다. 대세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자신만의 리얼리티는 당시 유행하는 소설의 허구성을 깨뜨리면서 만들어간다. 이 소설의 여자주인공 캐서린 몰란드가 고딕소설의 상상이 깨지면서 현실의 진짜 로맨스를 얻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돈 문제와 신분 상승 기회를 배제하거나 모른 척하면서 쓴 로맨스는 설득적이지 않다. 그래서 대놓고 남자 연소득과 여자의 재산을 정확한 금액으로 말한다. 남녀 주인공이 별다른 오해나 갈등이 없이 사랑에 빠지고 결혼에 이른다? 아니다. 반드시 서로를 오해하고 그래서 갈등하다가 마침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해서야 결혼한다.

물론 제인 오스틴도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거나 중요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전쟁과 정치다. 그것은 남자들의 영역이고 여성인 자신이 잘 알지도 잘 다루지도 못하는 소재였다.

제인 오스틴 소설 속 남자주인공은 남자답다기보다는 여성적이다. 헨리 틸니는 무슨 남자가 옷감에 대해서 그리 잘 아는지. 여동생한테 들은 거라지만. 뭔 남자가 말을 그리 쫑알쫑알 수다스럽게 하는지. 여성들이 읽는 책을 많이 읽었다고는 하지만.

특히, 이 초기작 '노생거 사원'에서 주목할 점은 작가가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쓰고자 열망했는지 이 소설에서 명확히 밝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신의 위대한 힘이 드러나고,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철저한 지식과 인간 본성의 변화에 대한 가장 행복한 묘사와 위트와 유머의 생생한 발현이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선별된 언어로 전달되는 그런 작품"(40~41쪽)을, 제인 오스틴은 최고의 소설로 생각했으며 이후 그런 소설을 써낸다. 


노생거 수도원
제인 오스틴 지음, 임옥희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펭귄클래식코리아 임옥희는 직역했다. 을유문화사 조선정은 맥락과 문화배경을 알고 의역했다.

1권 1장 two good livings.
을유: 두 개의 목사 자리
펭귄: 두 가지 확실한 생계 수단

펭귄클래식코리아 번역서의 주석은 챙겨 볼만하다.

2015.04.17

Posted by love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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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
문학동네


'설득'은 제인 오스틴이 가장 마지막에 완성한 소설이다. 작가는 나이도 많이 먹었고 결혼은 거의 단념한 상태에서 썼을 것이다. 여전히 여주인공이 돈 많은 남자랑 결혼한다는 테두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다른 소설보다는 확실히 주인공의 심리를 더 깊게 들어가서 내면의 목소리를 더 많이 담아낸다.

이야기는 간단하지만 상황이 미묘해서 여주인공의 마음속은 심란하고 복잡하다. 자기가 차버린 남자를 8년만에 다시 만난다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다시 사랑에 빠지기를 바라게 되고, 작가는 당연하게도 이 둘의 사랑을 방해하거나 오해하게 하는 연애 작대기를 휘두른다. 옛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까? 여주인공의 사색적인 내면과 어쩔 줄 몰라하는 심리를 탁월하게 그려낸다.

여자는 돈이 많아도 나이 들면 결혼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지지만 남자는 나이 들고 돈이 많을수록 결혼이 쉬워진다. 로맨스소설에서 나이가 많은 여자가 옛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기적' 같은 일을 해내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지 않나 싶다. 제인 오스틴 소설 중에 유독 '설득'을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은 그래서이리라.

평생 독신으로 지낸 소설가가 자기 소설에 이렇게 쓴다. "제가 여자들을 위해 주장하는 특권이란 -- 별로 시기할 만한 게 아니니 탐내실 필요는 없어요 -- 더이상 대상이 존재하지 않아도, 희망이 사라져버린 뒤에도, 여자는 남자보다 더 오래 사랑한다는 것입니다."(312쪽) 


자기가 쓴 소설의 여주인공이 모두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쓰면서 정작 자신은 사랑도 결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만다. 제인 오스틴은 진정한 사랑을 너무 잘알고 있었고 사랑이 없는 결혼에 대한 반발심이 심했기에 현실이 아닌 소설에서 그 마음을 그려놓는다. 팔 년이 지나도 이루어질 사랑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말이다.

Posted by love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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