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인물 묘사의 악마적 탁월함

중학생 때 이 소설을 처음 읽었는데, 그때는 정말 지겨웠다. 무슨 사람들이 나와서 조잘조잘 수다만 떨고 뭘 하는 게 하나도 없는 거다. 고작 뭘 한다는 게 춤추거나 독서, 산책, 혹은 카드놀이라니. 그땐 정말 재미없었다. 결혼을 생각할 나이가 넘으면 이 책은 어릴 적과는 다르게 읽힌다.

제인 오스틴의 연애소설은 철저하게 의도적으로 세상의 슬픔과 절망을 배제한다. 전쟁도 죽음도 질병도 실업도 가난도 없다. 특별한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라고 고작 날씨다. 비가 와요. 사람들은 춤추고 밥먹고 카드놀이를 하며 산책하고 편지를 쓴다.

이 소설은 초고가 있었는데 그 제목은 '첫인상'이었고 서간체 소설이었다. 완성된 원고에 편지가 자주 나오는 건 그래서고 첫인상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짐작이지만 초고는 집안 반대로 결혼이 무산된 상태의 감정이 넘치는 상태에서 썼을 것이고 개고를 거듭하면서 과도한 감정은 제거되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시작부터 끝까지 놀랍고도 불편했던 점은, 남자의 돈과 여자의 외모를 노골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선언/농담/격언 같은 첫문장이라니. "부유한 독신 남성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이다."(시공사 9쪽)

다시 읽어 보니, "제가 원하는 진정한 찬사는 저를 진실된 사람으로 보아주는 것이에요."(시공사 139쪽) 이런 대사도 있다. 역시 명작이다.

작가가 모든 등장인물에게 공평하다는 점도 주목되는 특징이다. 그 어떤 연애소설에서도 보기 힘든 이야기 기술이다.

이 소설이 유쾌한 것은 단지 해피엔딩이라서가 아니다. 등장인물 모두가 자기 성격을 그대로 유지한 채 행복하다는 점이다. 자신의 장단점이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변치 않으면서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는 점이 유쾌한 것이다.

"저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의 판단이 어떠하든 개의치 않고, 제 판단에 따라 제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그대로 행동하기로 마음먹었을 뿐입니다." (펭귄클래식코리아 특별판 466쪽)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다. 천한 것이 감히 내 조카랑 결혼하려 든다며 요즘 드라마에서 자주 보는 온갖 모욕을 퍼붓는 부잣집 나이든 여인에게 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이 당당하고 확고하게 하는 말이다.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이지 않았을까.

인간의 약점을 비웃으면서도 냉소적이진 않다. 이 점이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다. 다른 풍자소설은 불편하지만,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풍자소설 관점에서 보면 주인공은 단연 콜린스다. 그는 웃기는 데 천하무적 캐릭터다. 다아시 따윈 상대도 안 된다. 

이 작품은 좀 답답한 구석이 있다. 작가는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거나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군대가 언급되는데, 제복 얘기만 반복할 뿐이다. 전쟁 같은 사회적 불안은 되도록 자세한 언급을 자제한다. 한사상속을 여러 번 외치기만 할 뿐 남녀평등을 주장하진 않는다. 남녀불평등과 사회적 불평등을 언급하지만 감히 그 질서를 전복하겠다는 말은 삼간다.

우리의 주인공 엘리자베스가 청혼을 거절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남다른 듯하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작가의 결혼 실패와 겹치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돈이냐 사랑이냐의 문제는 표면적인 문제이고 사랑이든 결혼이든 자기 소망대로 이룰 수 없었던 것은 슬픈 일이니까.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보여주는 인물묘사는 악마적인 탁월함이 있다. 그 어떤 소설에서 이토록 간결하고 명확하게 사람을 조각해낸 문장을 읽어본 적이 없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는 듯한 생생함과 옆집 아줌마의 수다를 듣는 듯한 편안함과 클래식 음악을 듣는 듯한 고상함이 마법의 황금 비율로 섞인 글이다.

"키티와 리디아는 그 사람(위컴)의 변심을 저(엘리자베스)보다 더 슬퍼하고 있답니다. 아직 어려 세상의 이치를 모르니, 못생긴 청년이든 잘생긴 청년이든 먹고살 것은 있어야 한다는 굴욕적인 깨달음을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이죠."(펭귄클래식코리아 특별판 205쪽)

'오만과 편견'이 연애소설 결혼 판타지만을 추구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은 이런 문장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결혼에 대한 환상에만 매달리거나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넣어서, 오히려 소설이라기보다는 처세술로 보일 정도다. 제인 오스틴은 소설에서 계속 돈 얘기를 한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내가 정말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보다도 적어. 나는 세상에 대해 알수록 세상이 점점 싫어져. 사람들은 모두 모순투성이고 겉으로 드러난 장점이나 양식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내 믿음을 날마다 확인하고 있으니까."(펭귄클래식코리아 특별판 185쪽)

작가 제인 오스틴이 자신의 결혼이 무산되고 독신으로 지냈어야 했던 이유를 여주인공 엘리자베스를 통해 항변하듯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어지는 문장에서 리지의 언니인 제인을 통해 인식의 균형을 잡아 다시 생각을 정리하는 걸 보면, 왜 이 소설이 고전이 되었으며 왜 연애소설의 차원을 넘고 있는지 보여준다. 제인이라는 이름은 영어권 사회에서 흔하지만 작가와 등장인물의 이름이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다지 잘난 게 없지만 나름 착하고 성실하고 똑똑하고 그냥저냥 못생기진 않은 여자가 키 크고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한다. 이 한 문장은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로맨스 소설의 뼈대를 말해준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이후 불멸의 플롯이다.



영상물
[수입] Pride & Prejudice: Keepsake Edition (오만과 편견) (한글무자막)(Blu-ray) (1995) /A&E Home Video
[블루레이] 오만과 편견
조 라이트 감독, 키이라 나이틀리 출연/유니버설픽쳐스

'오만과 편견' 영상물은 1995년 BBC 드라마와 2005년 영화가 유명한데, 나는 드라마 쪽이 좋다. 제인은 영화 쪽이 마음에 들고 엘리자베스는 드라마 쪽이 마음에 든다.

각 번역본의 특징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지음/민음사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지음, 원유경 옮김/열린책들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지음, 고정아 옮김/시공사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지음, 김정아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오만과 편견 - 전2권 (한글판 + 영문판)
제인 오스틴 지음, 김유미 옮김/더클래식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지음, 이미선 옮김/현대문학

세계문학전집 작품 중에 가장 인기가 있을 게 분명한 <오만과 편견>은, 고전이라 불리는 소설 중에 가장 쉽고 편하고도 빠르게 재미있게 읽힌다. 남자가 번역한 건 피하라. 너무 점잖다. 어찌나 갑갑한지.

시공사 고정아의 번역은 간결하면서도 베넷 부인의 오도방정을 잘 살렸다. 참고로, 이 책에는 버지니아 울프가 제인 오스틴에 대해 평한 글을 부록으로 실었다. 분홍빛 표지가 예뻐서 많이들 사기도 한다.

 



펭귄클래식코리아 김정아의 번역은 합쇼체를 주로 하되 간간히 해요체를 섞어서 화자를 확연하게 드러내는 식이다. 이는 간결하게 '다'로 끝나는 문장으로 번역한 대다수와 확연히 다르다. 화자를 되도록 인식하지 않고 이야기 자체에 몰입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더클래식은 가격이 싸서 번역이 좋지 못할 거라 의심하기 쉬운데,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다.

열린책들 번역은 무난해서 별다른 특징은 없었다.

가장 많이 팔리고 읽히는 책은 민음사다.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재산깨나? :-) 감정을 넣어서 단어를 넣었다. 이런 문장이 잘 읽히고 이해도 잘 되는 편이다. 

최근에 나온 현대문학 판은 삽화가 있는 게 특징이다.


번역 비교 평가

'오만과 편견'을 원문으로 읽으니 만만치 않다. 번역본 네 개랑 같이 봐도 인터넷 검색을 해도 도저히 for a kingdom! 이 숙어 뜻을 '정확히' 모르겠다. 열린책들 번역문(정말이지!)을 보면 대략 짐작은 가지만. 사전에 안 나온다.

번역에 정답은 없다. 선호가 있을 뿐. 때론 생략이나 첨가 혹은 변형도 필요하다. 단어 선택에 직면하면 번역자의 취향과 경험에 좌우될 것이다.

딱 한 문장만 봐도 번역이 제각각이다.

I quite detest the man.
그 남자 정말 싫어요. - 열린책들
정말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었어요! - 시공사 고정아!
나는 그 남자가 정말 싫어요. - 펭귄클래식코리아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남자예요. - 더클래식

고정아 번역은 참 뭐라 해야 하나. 이건 뭐 원문을 능가해버리니. 번역은 그만하고 어서 소설 쓰세요. 언어 구사력이 이 정도면 번역에 자기 재능을 낭비하는 거다.

전반적인 느낌으론 이렇다.

시공사 : 고정아는 단어 선택의 맛을 안다. 번역이 단순히 원문을 잘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원문을 우리말로 돋보이게 창조하는 예술임을 보여준다.
펭귄클래식코리아 : 직역과 의역이 혼재. 어미를 요나 습니다로. 이 점은 호불호가 극명.
더클래식 : 의역이 많은 편이고 원문에 없지만 분위기상 어울리는 문장을 추가하거나 변형했다. 읽기에는 편할 것이다. 그러나 원문 충실도는 떨어짐.
열린책들 : 원문에 가까운 번역. 원문의 문장 구조와 순서를 잘 지킴. 원서랑 같이 읽기에는 가장 좋다.

2015.03.23

Posted by 러브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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