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 10점
G. K. 체스터튼 지음, 김은정 옮김/북하우스

 

G. K. 체스터튼 브라운 신부 전집 4 비밀 - 고해성사가 가능한 이유

브라운 신부 전집 제4권 비밀의 첫 글 '브라운 신부의 비밀'과 끝 글 '플랑보의 비밀'은 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브라운 신부 자신이 자신의 놀라운 추리력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하는 글이다. 그리고 실로 놀라운 발언을 한다.

"나 자신이 살인자와 똑같이 느낄 때 살인자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범인을 찾는 자와 범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최종 단계인 결심과 실행의 유무다. "저는 실제로 살인을 결심하는 최종적인 단계만 제외하고 그 이전까지 살인자들이 어떻게 그런 상태가 되었는지를 제가 직접 그렇게 될 때까지 계속해서 생각해보고 또 생각합니다."

브라운 신부 시리즈는 일반적인 추리소설에 비해서 철학적 통찰과 신학적 해석이 이야기에 스며 있어 미묘한 품격을 유지한다. 그 정도가 심하거나 작가의 독설 같은 게 없진 않지만, 범죄와 죄악과 용서의 문제를 성찰한다. "여러분들은 계속 용서하고 싶은 악덕과 죄만 용서한다"(마른 후작의 상주) 같은 문장을 읽었을 때 체스터튼이란 작가를 다시 보게 된다.

범죄자의 자백을 듣고 용서한다는 게 순진하고 별 설득력도 없어 보이는데, '플랑보의 비밀'에서 전 범죄자 플랑보가 왜 브라운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도둑질을 그만두었는지 들어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흔히들 범죄자라고 하면 광인이나 악인으로 취급하고 체포해서 어서 빨리 벌하는 것에만 신경을 쓴다. 자신도 범죄자가 될 수 있다고 인정하지 않으며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범행을 저지르게 되었는지는 알고자 하지도 않는다.

플랑보는 브라운이 가톨릭 신부라서 그에게 자신의 죄를 고하고 더는 죄를 짓지 않게 된 것이 아니라 브라운 신부만이 자신이 왜 그렇게 물건을 훔치지는 알고 있었고 그걸 자신한테 말해줬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해성사가 가능한 이유였다. 물론 여전히 논쟁 여지가 있지만 말이다.

4권 '비밀'도 여전히 기발하지만 이번 단편집에 수록된 것들은 제목처럼, 해당 범죄자의 비밀을 알기 전에는 범인이 누구인지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겉모습만 봐서 그 사람의 사정을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무시무시한 비밀을 간직한 범죄자들이다.

'보드리 경 실종 사건' 예술적 복수라는 이야기인데, 정말 소설 같은 일이다. 읽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게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후반부에 강렬한 반전이 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바꿔서 사건을 설명해준다.

'배우와 알리바이' 배우가 알리바이를 만드는데, 자신이 리허설할 연극을 잘 알고 이를 이용하는 식이다. 뻔뻔하게 선하고 지적인 사람인 척 연기를 하며 살다가 탐욕에 살인까지 대범하게 저지르는 자의 모습이 경악이었다.

'최악의 범죄' 1인 2역 트릭은 추리소설에서 진부할 정도로 자주 나오고 일종의 불문법 같은 거라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인정하고 읽어야 한다. 풀어내는 방식은 신선했다.

'마른 후작의 상주' 애거서 크리스티의 트릭과 비슷해 보인다. 배우가 나오면 거의 대부분 뛰어난 연기력을 주변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것으로 추리소설에서 설정된다. 추리소설을 많이 읽을 덕에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판사의 거울' 우리가 흔히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직업군의 사람을 살인범으로 심어놓는 식인데, 오늘날도 먹히는 수법이다.

'두 개의 수염' 제목에 나오는 듯 연기의 신 트릭이다. 변장 수염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서 들통이 난다.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된 범죄자와 회개하지 않는 범죄자를 겹쳐 보여준다.

'날아다니는 물고기의 노래'와 '메루 산의 레드문'은 보석 절도 이야기다.

 

범인을 잡으려면 범인이 되어야 한다
범죄의 욕망이 곧 범죄학
이 책에는 브라운 신부가 범인을 잡는 비결이 담겨 있다. 다른 추리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들과 달리, 브라운 신부의 범인 접근 방법은 외부 관찰보단 사람의 내부 욕망에 치중한다.

"저는 모든 사건을 세밀하게 계획을 짰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유형이나 정신 상태에서 사람이 실제로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를 생각해 내는 겁니다. 그렇게 나 자신이 살인자와 똑같이 느낄 때 살인자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18쪽)

"저는 실제로 살인을 결심하는 최종적인 단계만 제외하고 그 이전까지 살인자들이 어떻게 그런 상태가 되었는지를 제가 직접 그렇게 될 때까지 계속해서 생각해보고 또 생각합니다."(20쪽)

브라운 신부는 범죄자의 어두운 욕망을 그대로 따라간다. 그가 범죄자를 찾는 것은 죄를 벌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죄인을 이해하고 용서하려는 것이다. 종교인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범인을 이해하기보단 범인을 잡아서 벌을 줄려는 생각밖에 없다. 이런 차이는 [마른 후작의 상주]에서 잘 드러난다.

이 책 끝에는 체스터튼이 쓴 칼럼 [추리소설 쓰는 법]이 있다. "이야기가 폭로되는 시점에, 탐정의 접근은 밖에서부터 이루어지지만, 작가는 안쪽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한다."(343쪽)

그는 이야기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이야기는 진실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설사 이야기가 환상을 다룬다 해도 그 환상도 단순한 꿈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343쪽)  체스터튼이 범인 찾기 놀이 추리소설 이상의 소설을 완성시킬 수 있었던 비결이다.

Posted by love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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