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강석경 외 지음
열화당
어떤 사람이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혹은 일상적인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문학에 열중하면,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성공한 문학가의 대열에 올라 돈을 많이 벌거나 대학 교수가 되기 전까지는 좋은 대접을 받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기에. 불확실성과 불안과 불만과 불안정을 감수하면서까지 왜 문학하는가? 왜 사느냐는 물음만큼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글로 살려는 사람은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제정신이 아니다. 어느 분이 이 책에서 푸념처럼 말하듯, 최대노력으로 최소효과를 거두려는 반경제적이고 반이성적인 일이라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니. 시는 아무리 읽어도 돈이 생기지 않으며 음식을 만들 수 없고 주식을 고르는 데 쓸모없다. 그런데도 왜 문학하고 있는가? 물음은 쉽게 떠오르건만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문학하는 대한민국 사람 일흔한 명한테 왜 문학하냐고 묻고 그 답을 묶어 펴냈으니, 이 책은 조각조각 붙어 커다란 이불로 완성한 '퀼트'처럼 산만하면서도 아름답다. 정답이 없는 질문이었기에, 대부분 개인적인 체험을 얘기하여 진심과 푸념과 거짓이 매콤한 짬뽕처럼 섞인 글을 내 보이니, 읽는 사람으로서는 재미있으면서도 싫증난다.
문학에 정답이 있다면 그건 문학이 아니니, 질문 자체가 미친 짓이었고 질문을 받은 사람들도 이미 미친 사람이니, 이 책은 문학에 미친 사람들이 읽으리라. 곱게 미친 분들은 평범한 사람한테 그다지 끌리지 않는 법. 언제나 뭔가에 제대로 미친 사람한테 홀린다.
소설가를 생각해 보자. 이 사람은 무엇을 하는가. 소설을 쓴다. 허구의 삶을 쓰면서 실제의 삶을 지운다. 소설가는 소설 속 인물이 되어 물끄러미 바라본 후 무슨 일이 생기는지 살핀다. 그리고 쓴다. 상상한 인물이 꾸며낸 사건을 일으킨다. 그걸 적는다. 진짜 일어난 것처럼. 이미 일어난 일이라고 과거형으로 쓰면서. 객관적으로 보이려고 대개 삼인칭으로. 자아를 등장시킬 때조차 소설에 들어가면 삼인칭으로. 일인칭으로 써도 삼인칭이다. 관찰된 나이기에.
시인을 보자. 소설의 구체적인 서사로 만족하지 못하는 그들. 언어의 경계를 넘어 있는 그 무엇의 불빛을 본 자들. 그들은 시를 쓴다. 그 빛은 희미하지만 강렬하다. 시인은 그것을 말로 쓰려 한다. 그냥 하는 말로 도저히 그 무엇을 쓸 수 없으니, 운율을 맞추고 단어를 고르고 연과 행으로 배열하여 자신이 본 그 추상적 느낌의 진실을 그린다.
극작가를 보자. 소설의 서사로도 시의 추상적 단어 배열로도 현실의 생생한 느낌을 표현할 수 없으니, 그는 대화를 지시하는 대사와 움직임을 명령하는 지문으로 현장감을 표현한다. 연극은 언제나 현재형이다. 지금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한다. 꾸며낸 일을 지금 진짜로 일어난 일인 양 말한다.
이들은 언어로 뭔가를 표현하여 다른 이한테 뭔가를 전달하는데, 이 일이 성공할지 실패할지에 대한 보장이 없으니, 그저 시도하고 최선을 다해 다시 쓰고 고쳐 쓰고 열심히 쓴다. 그 길밖에 없으니, 외골수 미친 놈이라 불리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문학하는 것은 삶의 여러 일 중에 하나일 뿐, 뭔가 대단한 일이 아니며 그렇다고 시시한 일도 아니다. 밥 먹는 걸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고 할 수 없듯. 글이 곧 밥이 될 수 없음에도 글은 이미 삶이니, 그들한테 글을 쓰지 말라고 할 수 없으며 또 그렇다고 글을 쓰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문학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자. 소설가 김연수의 사진. 턱은 위로 이 센티미터 정도 치켜 올렸고 고개는 십오 도 정도 기울인 채 딱히 어디를 쳐다본다기보다는 그저 바라본다. 고집스레 보인다. 허기야 소설가는 혼자서 일하는 사람이니까. 반면, 사진가의 지시를 받는, 패션 모델의 사진은 어떠한가. 거짓 자신감으로 치켜 올린 턱과 부풀린 가슴. 멍한 두 눈. 웃고 있으나 누구를 향해 웃고 있는지 모를 입술.
김연수의 문학 체험. 이해할 순 없어도 느낄 수는 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썼을 때쯤이었다. 컴퓨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밤하늘이 보였다. 문득, 고독해졌다.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오직 그 문장에만 해당하는 일을 나는 하고 있었다. 그 소설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그 소설로 인해 내 삶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지, 그런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저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그 문장뿐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받았던 모든 상처는 치유됐다. (54쪽)"
그의 글이 내가 생각하는 문학에 가장 가까워서 인용한 것이지, 이게 문학의 정답이라고 여기에 쓴 건 물론 아니다. 애써 문학이 무엇인가 정의해 본다면, 여러 문학가들이 문학하는 행위이니 곧 읽기와 쓰기, 생각의 연속이다.
그는, 나는, 당신은 문학하는 중이다. 생각하는 것이 읽는 것이고 읽는 것이 쓰는 것이며 쓰는 것이 생각하는 것이니. 우리는 문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