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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4.05 이카가와 시 #1 밀실의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히가시가와 도쿠야 - 동기마저 우스개로
  2. 2025.03.29 애거서 크리스티 [0시를 향하여] 조각 맞추기와 뒷이야기
  3. 2025.03.17 탐정 갈릴레오 8 [금단의 마술] 히가시노 게이고 - 과학 윤리 훈계
  4. 2025.03.08 애거서 크리스티 [움직이는 손가락] 익명 험담 편지들 속에 살인
  5. 2025.02.22 애거서 크리스티 [3막의 비극] 세 번의 살인, 그리고 경악의 진실
  6. 2025.02.22 애거서 크리스티 [오리엔트 특급 살인] 열차 밀실 살인
  7. 2025.02.19 애거서 크리스티 [열세 가지 수수께끼 화요일 클럽의 살인 미스 마플 13 수수께끼] 미스 마플 첫 등장
  8. 2025.02.17 애거서 크리스티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클로즈드 서클
  9. 2025.02.16 애거서 크리스티 [빛이 있는 동안] 초기 습작 단편집
  10. 2025.02.15 애거서 크리스티 [살인은 쉽다 위치우드 살인사건] 살인이 쉬운 이유는?
  11. 2025.02.13 애거서 크리스티 [검찰 측의 증인] 권선징악이 아니네?
  12. 2025.02.12 애거서 크리스티 [서재의 시체] 추리소설 장르 클리셰의 변주
  13. 2025.02.09 애거서 크리스티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 인상적인 데뷰작
  14. 2025.02.02 애거서 크리스티 [커튼] 푸아로의 마지막 사건, 탐정소설의 규칙을 깨다
  15. 2025.01.30 애거서 크리스티 [세 번째 여인 세번째 여자] 자신이 누군가를 죽였다?
  16. 2025.01.29 애거서 크리스티 [나일 강의 죽음 나일에서 죽다] 트릭의 정점을 찍다
  17. 2025.01.29 애거서 크리스티 [슬픈 사이프러스 삼나무 관] 법정 드라마
  18. 2025.01.29 애거서 크리스티 [구름 속의 죽음] 비행기 밀실 살인
  19. 2025.01.27 애거서 크리스티 [골프장 살인사건] 푸아로 - 단도, 외투, 사랑
  20. 2025.01.25 애거서 크리스티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푸아로 - 추리소설 규칙 깨기
  21. 2025.01.22 애거서 크리스티 [메소포타미아의 살인] 푸아로 - 밀실 살인 트릭
  22. 2025.01.22 애거서 크리스티 [ABC 살인 사건] 푸아로 - 알파벳 예고 살인
  23. 2025.01.20 도스토예프스키 읽는 순서, 5대 장편소설, 작가 이름 국내 표기
  24. 2025.01.20 도스토예프스키 #13 [죄와 벌] 로댜?
  25. 2025.01.20 [오독 - 문학 비평의 실험] C. S. 루이스
  26. 2025.01.20 [마사토끼의 만화 스토리 매뉴얼 1 2]
  27. 2025.01.20 [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
  28. 2025.01.12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 [통] 타자수 안 예뻤으면 어쩔뻔했을까
  29. 2025.01.03 애거서 크리스티 [다섯 마리 아기 돼지 회상속의 살인] 푸아로 - 과거 재구성
  30. 2024.12.31 2024년 12월 독서 결산 및 한 줄 독후감

밀실의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
密室の鍵貸します (2002년)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식여행 2011년

이 시리즈의 공간적 배경인 이카가와 시는 오징어(이카) 강(가와) 시(City)다.

장편소설 '밀실의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는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데뷰작이다. 인상적이고 놀라웠다. 정교하고 섬세한 트릭을 보여준다. 우연이 개입되어 사실적인 느낌을 준다. 유머는 여전하다. 일본어 말장난이다. 

연쇄 살인에 밀실이다. 그다지 당혹스럽진 않았다. 어느 정도 내 예상이 맞았으나 트릭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렇게 범인이 될 수밖에 없잖아 정도의 감이랄까. 열 단계도 넘는 이 촘촘한 속임수를 어찌 알 수 있으랴. 게다가 이미 풀은 수수께끼를 반전시키니, 대단한 솜씨다.

이 책에는 작가 자신이 추구하는 추리소설 작법에 대한 은밀한 고백이 있다. 78쪽을 보라. 인용해 보면,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가 미스터리의 필수요소인 것처럼 반드시 나오곤 하는데 그런 관계에 대한 설명이 끝도 없이 나와 오히려 지겹게 만들고 결국 나중에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끝나서" 그래서 그가 쓰는 소설에 범행 동기가 간략하게 나온다. 이 작품에서는 아예 그 동기마저 우스개로 써먹는다. 결말에서 웃으면 안 되는데, 웃게 된다.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은 인간의 범행 동기를 중요시해서 진지하게 다룬다.

추리소설의 본령은 추리 게임성이다. 그걸 애써 사회 고발이니 인간의 잔혹성 성찰로 끌어들이겠다는데, 누가 말리겠는가. 하지만 그래서는 그동안 애써 쌓은 재미를 없애고 읽는 이를 지루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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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시를 향하여
애거서 크리스티
황금가지 2013년

배틀 총경이 나오는 소설은 읽다가 포기했었다. 이제서야 다시 챙겨서 읽는다.

이번에 '0시를 향하여'를 완독하면서 예전에 읽다가 포기했던 것이 기억났다. 내가 참을성이 정말 없었던 모양이다. 초반에 본격적으로 사건이 시작되지 않고 그다지 관련이 없는 여러 사건과 인물들이 나열된다.

자살하려다 실패한 남자, 자신이 한 도둑질이 아닌데 자신이 했다고 자백한 소녀, 음모를 꾸미고 있는 누군가. 아무리 봐도 이 세 가지 조각이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리라고 예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인내심이 금방 바닥 나고 더 읽기를 포기했었다.

눈에 잘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흔해 빠진 남녀 삼각관계로 짐작하고 사건을 풀려고 했으니, 당연히 이번에도 어김없이 당했다. 그렇게 당하라고 이야기를 썼으니까 그렇게 읽는 것이 맞다.

범인이 잡혀서 이제 끝났네 했더니 읽을 분량이 아직도 남았고 이야기가 계속 진행된다. 뒷이야기인데, 이 부분에서 그만 읽을까 싶었으나 다 읽으니 상큼한 디저트 같은 재미를 맛보았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여기에 후일담의 반전까지 있다.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역시 애 여사님이다.

나처럼 초반과 후반에 읽기를 포기하려는 독자가 있다면 조금만 참고 더 읽어나아가라. 꿀 같은 재미가 곰처럼 우직하게 기다린다.

황금가지 2017년 1판 5쇄를 읽었다. 띄어쓰기 틀린 데 한 곳 봤다. 오탈자는 없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들 중에 유독 인기가 높은 것은 일반적인 추리소설과는 다른 점이 있다. '0시를 향하여'는 기존 추리소설과 달리 살인 범죄가 나중에야 일어난다.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세 조각(살인 음모자, 하지도 않은 범죄를 인정하는 소녀, 자살 실패자)이 맨 앞에 나오고 끝에서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여기서 재미가 폭발한다.

초반에 지루해서 읽기를 포기할 수 있다.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부분부터는 흥미롭고 그래서 끝까지 다 읽게 된다.

푸아로가 나오지 않지만 배틀 총경이 푸아로를 언급하고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처럼 결정적 증거를 찾아낸다.

범인의 알리바이를 깨야 하는데... 트릭은 아예 생각조차 안 하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을 뒤집는 식이었다. '시태퍼드 미스터리 | 헤이즐무어 살인사건'처럼.

2025.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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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마술
禁斷の魔術
히가시노 게이고
재인 2024년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에 '용의자 X의 헌신'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금단의 마술'은 그에 비하면 잘해 봐야 범작이다.

레일건으로 복수 살인을 하려는 제자를 막으려는 유가와 이야기다.

살인 사건에 정치에 언론 기자에 과학 기술에 로맨스가 잘 엮여서 있어서 흥미로울 수 있다. 하지만 지극히 간단한 것을 장편소설 분량으로 늘리기 위해 굳이 꾸역꾸역 늘려 쓴 티가 팍팍 났다. 같은 얘기를 많이 반복한다. 게다가 신선한 내용이 없다. 이미 어디선가 읽었거나 들은 것이다.

후반부 훈계조 이야기는 다소 실망이었다.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복수는 개인적인 동기인데, 과학 윤리로 그 동기를 무력화시킬 수 있나?

그래도 술술 편하게 잘 읽혔다.

2025.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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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손가락
애거서 크리스티
황금가지
2004년

The Moving Finger (1943) 영어 원서로 읽었다.

추리소설을 읽으려고 했는데, 연애소설을 덤으로 읽었다는 이 기분은 뭘까. 이 소설 '움직이는 손가락'은 멋진 반전 트릭보다는 유쾌한 연애를 기대하는 것이 좋겠다. 왜들 이 소설이 발랄한 연애소설이라고 말해주지 않은 거야. 모태솔로는 이 책 피하길.

시골마을 라임스톡에 익명의 편지가 돌고 있다. 요양차 심지어 이제 갓 마을로 이사온 제리(소설의 화자)와 여동생 조안나한테도 왔는데, 황당하게도 둘이 남매가 아니라는 비방이었다. 별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웃어넘기고 편지를 곧바로 불태워 버린다.

그러던 중 사이밍턴 부인이 그 익명 편지를 받고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정확히 일주일 후에 사미밍턴 집에서 일하던 하녀가 계단 밑 창고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거의 후반부에서 미스 마플이 이 마을로 호출되고, 소설의 화자인 제리의 말에 결정적 힌트를 얻어, 함정을 파서 범인을 잡는다. 증거가 없는 사건은 꼭 이렇게 함정 파서 범인을 잡아 확정하는 식이네. '서재의 시체'도 '목사관의 살인'도 그랬다.

범인을 프로파일링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논리적으로 따져서 성별과 사회계층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고 그게 물론 꼭 딱 맞지는 않을지라도 범인의 심리와 모습을 구체화한다.

사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살인 사건 해결이 아니라 동네 남녀의 연애다. 여신급 미모 엘시를 만난 제리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제리가 메건을 런던에 데려가 변신시켜 주고는 사랑에 빠져 다음날 청혼까지 한다. 조안나가 의사 오웬랑 맺어지는 과정은 설득력 있고 흥미로웠다. 하여, 소설이 끝나며 두 커플이 결혼에 골인한다.

번역서는 아직 안 읽어 봤는데, 영국판을 번역한 황금가지를 추천한다. 미국판을 번역한 것은 생략이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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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막의 비극
애거서 크리스티
황금가지

Three Act Tragedy (1935)
Murder in Three Acts (1934) 미국판 

클래식 음악에서 바흐를 능가하기 힘들 듯, 추리소설에서 애거서 크리스티를 능가하기는 앞으로도 힘들 것 같다. 최근 영화나 소설에서 보았던 트릭이 이미 크리스티 소설에서 다루었던 것들이다. 확장하거나 변형했을 뿐이지 그 기본 틀은 변한 것이 없다.

배우가 감쪽같이 주변 사람들을 속인다는 기법은 구식인 듯 보이나, 그 구식조차 후에 얼마나 자주 써먹었는가. 허기야 요즘에 이 수법을 쓰면 망신당한다. 그만큼 웬만한 트릭에는 추리소설 독자들이 익숙해져 있다. 이제 애 여사님 소설에서 연기력 뛰어난 사람은 그만 나왔으면 싶다. 배우 나오면 의심부터 하게 된다.

'3막의 비극'은 세 번의 살인이 연속적으로 나온다. 1막 살인 사건은 적이 없고 스캔들도 없는 교구 목사의 죽음이라 푸아로는 별다른 살인동기가 보이지 않아 자연사로 판단하고 수사하지 않는다. 

하지만 2막 살인 사건은 의사의 죽음인데 분명한 살인동기가 있어 보여서 푸아로가 사건 조사에 참여한다. 그러던 중 3막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의사가 운영하는 요양원에서 지내던 드 러시브리저 부인이 초콜릿을 먹고 죽고 만다.

세 살인사건을 잇는 공통점은 독약으로 니코틴을 썼다는 점이다. 잉? 담배에 나오는 그 니코틴으로 독살이 되나? 조사해 본 바로는 니코틴이 살충제로 쓰인다고 한다. 독성 물질인 건 맞는데 그럼 얼마나 먹으면 죽을까? 직접 섭취를 하면 담배 2개에 들어 있는 니코틴의 양으로도 죽을 수 있다고. 벨라도나는 동공을 크게 해준다고 해서 예쁘게 보이려고 미용을 썼었단다. 중독성이 있어서 자주 써서 사망에 이른 여성이 많았다고. 애 여사님, 역시 독약 전문가다. 작품 대부분이 독살인 듯하다.

이 소설은 공정한 게임은 아니다. 작가가 정보를 독점한 상태에서 조금씩 힌트라고 주지만 답을 찾지 못하게 하려고 쓸데없는 정보도 많이 준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보느라, 지면은 늘어나고 그거 읽느라 세월은 다 가고 지루했다.

반전의 여왕답게, 애 여사님의 전형적인 스타일답게 가장 범인이 아닐 수 있는 자를 살인자로 지목했다. 또 속았다. 이제 적응할 때도 됐다. 10권을 넘겨야 적응하려나.

등장 밑이 어둡다는 속담은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에게 불멸의 진리다. 반전으로 독자의 허를 찌르고 싶으면 범인을 바싹 붙여 놔라.

BBC 드라마는 시즌 12 에피소드 2다. 각색이 마음에 든다. 원작은 새터스웨이트가 수사에 나서는데, 드라마는 새터스웨이트를 뺐고 푸아로가 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쓸데없이 새터스웨이트라는 인물을 끌여들여서 서술하는 점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푸아로가 주인공인데 앞에 잠깐 나왔다가 사라지고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다시 등장한다.

이야기의 경제성 측면에서 영상은 책보다는 제약이 심하다. 배우 한 명을 더 쓰면 돈이 더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장면도 늘어난다. 제한된 시간 안에서 이야기를 끝내야 한다. 이래서 드라마에서 각색이 필요하다.

드라마를 다시 봤는데, 책을 지루하게 읽었던 것이 기억난다.

1막 살인이 랜덤 독살 리허설이었다는, 경악의 진실이 이 작품의 포인트다. 독배가 푸아로한테 갔으면 사망할 뻔했다. 누가 죽을지 몰랐던 거다.

2025.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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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특급 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황금가지 2013년

Murder on the Orient Express (1934) 영국판
Murder in the Calais Coach 미국판

미국판이 '오리엔트 익스프레스'라는 제목을 피한 이유는 같은 제목의 소설이 출간 전에 나와 있어서 혼동을 피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책으로 읽은 적은 없었으나 영화로 본 기억이 있었다. 결말이 워낙 희안해서 아직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이미 범인을 알고 있었고 그 수법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미 범인과 범행 수법을 알고 있는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 역시 걸작은 다르다. 이 경악스러운 미스터리는 이미 결론을 알고 있어도 감동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 중에서 유명한 축에 속한다. 이런 독창적인 미스터리가 다시 나오기도 힘들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다음으로 손꼽는 작품이다.

설정이 흥미롭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열차는 폭설에 갇혔다. 따라서 이 객차 안에 있는 승객들 중에 범인이 있다. 살해된 곳의 문은 잠기고 안쪽에서 체인이 걸렸다. 피해자의 몸에는 10~15번 찔렸다. 밀실이다!

힌트는 초반에 반복해서 줬다. 하지만 그것에 주목할 독자는 거의, 아니 절대 없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읽은 독자라면 어느 정도 의심은 해 볼 수 있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추리해낼 수 없는 사건이다.

찔린 상처로 봐서는 혼자가 아닌 남자와 여자가 최소 둘 이상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이고,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주홍색 잠옷을 입은 여자와 제복을 입은 남자가 수상한데 도대체가 열차 안 용의자들 중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게다가 그 옷들은 엉뚱한 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용이 그려진 잠옷은 2부 마지막에서 푸아로의 방에서 나온다. "이건 도전이야. 좋아, 받아들여 주지." 푸아로의 회색 뇌세포가 지금까지 모은 증거와 증언을 토대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 소설이 지금도 반전의 재미를 주는 이유는, 추리소설에서 흔하게 나오는 전개와 결말을 배신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독자의 일반적으로 흔한 추리로는 이 사건의 진상을 알 수가 없다. 범죄 살인자 미스터리에서 범인은 대체로 한 명이다. 공범이 있다면 한두 명 정도이다. 이를, 탐정도 독자도 추리를 시작할 때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니 검시를 해도 단서를 발견해도 탐문을 해도 어리둥절해질 뿐이다. 그렇게 되라고 썼으니까 그렇게 읽힐 수밖에 없다.

소설 본문 안에서 대놓고 이 소설이 굉장하다고 자찬한다. "이건 정말이지 지금까지 읽은 어떤 추리 소설보다 더 기묘하군요." 맞다. 그리고 아직도 애 여사의 이 작품을 능가하는 추리소설은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유사한 추리소설을 읽은 기억이 없다. 독보적이며 독창적이다. 범죄 미스터리 공학의 최상품이다.

애 여사가 특정 나라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 읽기 불편할 수 있으나 이 작품에서 미국 사법 제도의 헛점을 비난하는 것은 선견지명이다. 오늘날 그 어느 나라의 사법 제도라 해도 제대로 정의를 실현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니까 이 소설의 통쾌한 결말은 여전히 감동이다. 정의를 실현했다.

황금가지 번역본에서 오류를 발견했다. 68쪽. "열네댓 군데나 찌릅니까?" 열네댓이면 14~15를 뜻하는데 영어 원문에는 ten-twelve -fifteen으로 나온다. 10-12-15. 열, 열둘, 열다섯 군데라고 번역해야 한다. 이 소설을 안 읽은 사람은 그깟 숫자가 그리 중요하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후반부에서 이 숫자는 결정적 힌트이자 중요한 의미다. 추리소설은 논리의 일관성이 생명이다.

예전에 읽은 추리소설을 다시 읽으면 또 다른 재미가 있다. 가는 길에서 내내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것처럼 작가가 흘린 힌트 조각을 읽는 재미가 솔솔하다.

추리소설을 쓰는 입장에 서면 초중반부가 다르게 읽혀진다. 재미나 기쁨보다는 절망감 혹은 막막함이 더 크다.

잘 쓴 추리소설은 정교한 기술력을 보여준다. 계속 힌트와 증거와 단서를 주면서도 독자가 사건의 진실에는 도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서 탐정만은 알고 있는 것으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쓸 수 있냐고 자문해 봤다.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드는 노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또한 어느 수준 이상까지는 재능의 영역이라서 노력해서 될 게 아니다.

이 작품은 추리소설 쓰려는 이들한테는 에베레스트 산 같은 것이다. 이 작품을 능가할 야망을 품을 수 있겠으나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2025.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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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열세 가지 수수께끼 | 황금가지
화요일 클럽의 살인 | 해문
미스 마플 13 수수께끼 | 동서문화사
The Thirteen Problems 영국판 1932년
The Tuesday Club Murders 미국판 1933년

읽은 책은 황금가지 번역본 1판 6쇄다.

'열세 가지 수수께끼'는 미스 마플이 처음 등장하는 소설이 담긴 단편집이다. 제목처럼 단편 미스터리 13편이 있고 모두 미스 마플이 해결한다.

할머니 탐정 미스 마플은 1927년 12월 잡지에 발표한 단편 '화요일 밤 모임(The Tuesday Night Club)'으로 첫 선을 보였다. 푸아로가 장편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The Mysterious Affair at Styles)'으로 데뷰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단편집은 여기저기 발표한 것들을 모아서 책으로 내기 때문에 출간년도(1932년)가 장편 '목사관의 살인(The Murder at the Vicarage, 1930년)'보다 늦다. 이 때문에 미스 마플이 장편 '목사관의 살인'에서 처음 등장한다고 잘못 알려져 있다.

이 단편집은 미스 마플 시리즈를 준비하기 위한 스케치다. 매주 화요일 밤에 모여서 한 사람씩 범죄 수수께끼를 내고 이를 맞추는 형식인데, 모조리 미스 마플 승리다. 안락의자형 추리소설이다. 상대가 하는 말과 주는 단서만으로 범인을 잡는다.

미스 마플의 추리 무기는 인생 경험이다. "세인트 메리 미드에서 몇십 년을 사는 동안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많은 걸 깨닫게 됐답니다."(17쪽)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어떤 범죄 미스터리라도 이미 마플 할머니가 알고 있는 유형이다. 그래서 자신의 추리를 이야기할 때마다 그것과 비슷한 사건을 먼저 말한다. "이야기를 들으니까 단번에 그 사람 생각이 나지 뭐니."(26쪽)

이상은 캐릭터상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크리스티가 쓰는 것이기에 원예 지식과 독약 지식을 활용한 트릭이 대부분이었다. 이 두 분야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추리 게임에서 이길 확률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마플 할매가 사는 시골 마을 '세인트 메리 미드'는 미스터리를 위한 허구의 공간이다. 이 마을에 온갖 범죄자란 범죄자는 다 모여서 살인에 절도에 사기를 일삼는다. 어째서 그토록 머리 좋은 범죄자들이 평범한 마을에 몰려오는지 도대체가 알 수가 없다.

이 마을에 사는 이들도 별나긴 마플 못지 않다. 전직 런던 경시청장 헨리 클리서링 경, 미스 마플의 조카인 작가 레이먼드 웨스트, 순박한 밴트리 대령, 대령의 아내이자 못말리는 수다쟁이며 미스 마플의 오른팔 같은 존재인 돌리 밴트리, 아름답지만 영리한 편은 아닌 배우 제인 헬리어 등 별별 캐릭터가 등장한다.


● 화요일 밤 모임 The Tuesday Night Club
음식 독살이다. 생소한, 트라이플이라는 영국 디저트가 나온다. 못 맞췄다.

● 아스타르테의 신당 The Idol House of Astarte
역시 생소한, 아스타르테라는 고대 셈 족의 여신이다. 구체적인 트릭까지 짐작할 순 없었지만 대략의 수법과 범인을 눈치챌 수 있었다. 소거법으로 용의자들을 제거하면 딱 한 명만 남는다. 단검 트릭에 익숙해서 그런가. 트릭이 쉬운 편인가.

● 금괴 Ingots of Gold
사소한 부분에 결정적 힌트를 놓는다. 자동차 바퀴 트릭은 워낙 단순해서 웃음만 나온다.

● 피로 물든 보도 The Blood-Stained Pavement
푸아로 출연 장편소설 '백주의 악마 Evil Under the Sun' 트릭과 같다. 단편으로 먼저 쓰고 나중에 장편으로 늘려 쓴 경우다.

● 동기 vs 기회 Motive v. Opportunity
유서 관련 단순하고도 자주 봤던 아주 식상한 트릭이다.

● 성 베드로의 엄지손가락 The Thumb Mark of St. Peter
음의 유사성 때문에 생기는 언어 혼란을 이용한 트릭이다. 필로카르핀이라는 약물이 나온다. 역시 생소하다.

● 파란색 제라늄 The Blue Geranium
간단한 과학 상식이면 풀리는 수수께끼다. 산성, 중성, 알카리성.

● 동행 The Companion
미스 마플 출연 장편소설 '예고살인'의 틀거리다.

● 네 명의 용의자 The Four Suspects
이 단편집에는 비교적 쉬운 수수께끼를 많이 수록했다. 이 단편은 아예 용의자를 네 명으로 압축해 주며 편지를 힌트로 준다. 편지는 영어로 읽어야 철자가 보이기 때문에 번역문이라서 알아차리긴 곤란했다. 이래서 원서로 읽어야 한다니까. 175쪽에 짧게 언급한 살인 수법은 푸아로 출연 장편 '벙어리 목격자 Dumb Witness'에 나온다. 이래서 발표순으로 읽어야 한다니까.

● 크리스마스의 비극 A Christmas Tragedy
이 트릭도 어디선가 읽은 것 같다. 미스 마플 출연 장편 '서재의 시체 The Body in the Library'가 바로 이 시체 트릭과 비슷하지 않나.

● 독초 The Herb of Death
디기탈리스라는 약초와 디기탈린이라는 강심제가 나온다.

● 방갈로에서 생긴 일 The Affair at the Bungalow 
배우 제인 헬리어의 이야기. 무서운 여자네. 어리숙한 척했던 거군.

● 익사 Death by Drowning
임신한 여자의 익사. 애정의 거미줄에서 일어난 살인.

황금가지 번역본 전자책 구입 후 재독했다.

전반적으로 간단한 추리 퀴즈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1. 화요일 밤 모임
수천 수백. 언어의 다의성을 이용해서 선입견에 빠지도록 했다. 영어권 생활자가 아니면 결정적 힌트를 알 수가 없다. Hundreds and thousands는 케이크에 뿌리는 장식용 작은 설탕 조각을 뜻한다.

2. 아스타르테의 신당
단검 트릭. 트릭보다는 분위기 조성에 정성을 쏟았다. 사악한 기운.

3. 금괴
워낙 사소해서 그것이 결정적 힌트인지 알 수 없게 해 놓았다. 바퀴 트릭은 웃겼다.

4. 피로 물든 보도
화가의 진술로 사건을 묘사한다. 수영복이 힌트였다. 1인2역 트릭. 보험사기살인.

5. 동기 대 기회
유언장을 백지로 바꿀 기회가 있었던 사람은 동기가 없고, 동기가 있는 사람은 기회가 없었다. 과연 누가 왜 유언장을 백지로 바꾼 것일까? 이는 트릭의 핵심을 간과하게 하는 질문이었다. 힌트는 만년필에 있었다.

6. 성 베드로의 엄지손가락
약 전문 지식이 있어야 풀리는 수수께끼다. 음의 유사성 때문에 언어를 잘못 이해하는 점을 트릭이자 힌트로 삼았다.

오역. 

나는 클라라에게 집을 부탁하고 접시와 찰스 왕 맥주 잔을 은행에 맡긴 다음 단숨에 달려갔지요.
I put Clara on board wages and sent the plate and the King Chalrels tankard to the bank, and I went off at once.

bank는 은행이 아니라 저장소다. 아마도 식기 건조대나 거치대인 듯. 접시와 잔을 은행에 맡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board wages는 식사 숙박 수당이다. 클라라한테 수당을 지급했다는 말이다. 클라라를 하녀로 고용해서 집을 맡기고 떠났다는 뜻이다.

오탈자.

숨을 거두는 사람에 → 바람에

7. 파란색 제라늄
귀신이니 저주니 운명이니 다 헛소리다. 그 정체는 간단한 과학상식을 이용한 트릭일 뿐이다.

8. 동행
오늘날에는 신분 위장이 어려워서, 애거서 크리스티 집필 시대에나 통하는 트릭이다.

9. 네 명의 용의자
꽃들의 머리글자를 합하는 식의 암호였다. 난초의 꽃말은 "당신의 마음을 기다릴게요."란다.

10. 크리스마의 비극
시체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게 하는 트릭이다. 모자를 힌트로 알아차리게 된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아마도 사형 찬성주의자였던 것 같다. 미스 마플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즘 보면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사형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요." 

11. 독초 
제목처럼 독초를 사용한 독살 살인이다. 이는 표면적이고 수단적인 것이고 핵심은 인간관계의 애증에 있었다. 반전이 된 이유는 살인 동기가 될 애증이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서다.

12. 방갈로에서 생긴 일
배우 제인 헬리어가 실제 일어난 일이라면 이야기를 하면서 이름과 지명을 바꾸는 것에 힘들어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어리숙하게만 보였던 배우의 치밀한 범죄 계획이었다.

13. 익사
물에 빠져 죽은 여자. 처음에는 자살인 줄 알았으나 살인으로 보여서 주변 남자들을 조사한다. 목격자의 착각. 여자의 적은 여자다.

2025.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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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황금가지 2002년
Ten Little Niggers (1939) 영국판
And Then There Were None (1940) 미국판

추리소설의 재미는 무엇일까? 그 모범 정답을 제시한 작가가 크리스티다. 시간과 장소와 사람을 한정시킨 후 긴장을 높인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제목처럼 등장인물이 모조리 죽는다. 그 당혹스러움의 끝에서 작가는 자신의 트릭을 소개한다. 미스터리는 독자와의 머리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이 소설이 그 모범이다.

열 명이 섬으로 모인다. 죽음으로의 초대, 법으로는 처벌할 수 없는 그들의 죄를 아는 자가 놓은 덫이었다.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고 곧바로 한 사람이 죽는다. 이어서 한 사람씩 누군가에 의해 죽는다. 범인은 섬에 모인 열 명 중에 한 명이다. 그럼에도 범인이 누군지 알 길이 없다. 마침내 모두 죽는다.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 에필로그인 자백서를 읽고서야 수수께끼 살인극의 정체가 드러난다.

미스터리 고전이다. 한 사람이 죽거나 사라질 때마다 인디언/병정 인형이 하나씩 사라진다. 고립된 장소인 섬에서 한 명씩 죽어가면서 범인을 좁혀간다. 수많은 소설과 영화에서 이 플롯을 가져다 썼다. 

이 소설은 여전히 신선하다. 고전은 그 독창성을 꾸준히 유지한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중에 인기 최고다.

아무래도 이 옛날 소설은 오늘날 수준에서 보면 유치하고 엉성해 보인다. 플롯은 작위적이며 문장은 조악하고 인물은 평면적이다. 이 소설을 읽는 관점은 추리소설 구성력에 맞춰야 할 것이다. 한 명씩 죽어가고 범인은 분명히 살아남은 사람들 중 한 명인데 모두 죽은 후에도 누가 어떻게 죽였는지 알 수 없다.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인형을 그대로 두지? 나 같으면 모조리 부셔 버리겠다. 작가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 같은 등장인물들이라 그런지 이야기 플롯을 잘 따라 움직인다. 마지막 인물의 자살도 그렇다. 나 같으면 절대로 자살하지 않는다. 작위적이지만 자살해야 이야기가 완성되니까 넘어간다.

어떤 이들은 이 소설을 애거서 크리스티의 별종으로 취급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여사님의 전형적인 스타일이다. 동요를 차용하는 것과 법으로는 처벌할 수 없는 자를 응징한다는 설정은 이미 다른 소설에서 많이 했다. 인물의 심리를 깊게 파고들지 않는다는 점도 그렇다.

2014.08.01

전자책 구판 표지

전자책으로 다시 읽었다.

범인과 수법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기에, 처음 읽었을 때의 재미와 당혹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추리소설을 두 번 이상 읽는 사람은 대체로 독자가 아니라 추리소설을 쓰려는 사람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문장은 빼어난 미문은 아니지만 인물 심리 묘사와 범죄 트릭은 탁월하다. 추리소설 독자가 읽고자 하는 것은 좋은 문장이 아니라 멋진 범죄 수수께끼다. 애 여사는 트릭의 대가였다.

법으로는 처벌할 수 없는 범죄자들을 섬에 불러 모아서 한 사람씩 죽인다. 이 설정은 다른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서 그대로 혹은 변형해서 재현되고 있다. 미국영화 '쏘우' 시리즈, 일본영화 '케이조쿠', 미국드라마 '퍼슨스 언노운'.

2022.06.04

황금가지 전자책이 2024년 11월 15일 업데이트되었다. 표지가 바뀐 것은 알겠는데 본문에서 뭐가 바뀐 건지는 알 수 없다.

전자책 2024년 업데이트 표지

오탈자 발견. 제2장 자장가 앞에 '이'.

참고로, 종이책에는 이 오탈자가 없다.

2025.01.01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클로즈드 서클의 원조다. 섬 같은 고립된 곳에 사람들이 갇히고 이들 중에 살인범이 있으며 한 명씩 죽어나간다. 갇힌 곳에서 우리들 중에 범인이, 그것도 살인범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긴장감이 높다.

유키 하루오의 '십계'가 이 작품의 설계를 따라해서 만든 최신작이다. 고립된 섬에 있지만 시대에 맞게 언제든 스마트폰으로 연락이 가능하고 인터넷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배를 불러 섬에서 나갈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못하는 이유는 십계라는 조건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안 지키면 전원 사망이라서 지킬 수밖에 없다. 이런 변형이 있어서 역클로즈드 서클물이라고 부른다.

최신 업데이트된 전자책으로 다시 읽어 봤다.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과 어리둥절함은 하나도 없었다. 장르 특성상 수수께끼의 답을 알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도 세세하게 다 기억하지는 못해서 또 나름 재미있게 읽었다.

2025.01.02

1판 11쇄 2018년. 

병정이 아니라 검둥이로, 병정 섬이 아니라 니거 섬으로 나온다.

검둥이/니거 → 인디언 → 병정. 이렇게 바뀐 것으로 안다. 전자책 최신판 2024년에는 병정으로 나온다.

81쪽 위에서 6번째 줄 오탈자 유산를 → 유산을. 참고로 전자책에는 이 오탈자가 없다.

제3장에 레코드 제목이 '백조의 노래'라고 나와서 뭔가 싶어 찾아 봤더니, 슈베르트의 노래 모음집이다. 14곡 중 4번째곡 '세레나데'가 유명하다. 들어 보니, 귀에 익숙하다. 유명 클래식 곡이 대개들 이렇다. 이미 여러 번 들어 익숙하지만 제목을 모른다.

2025.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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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le The Light Lasts and Other Stories 1997년

빛이 있는 동안
애거서 크리스티
황금가지 2016년 2판

단편집. 총 9편.

추리소설이 아니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과 푸아로 출연작을 섞어 놓았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여러 작품을 골고루 모은 '유작 소설집' 모양새다. 초기 습작이 많다. 

기대보다는 '심하게' 별로다. 그 유명한 '빅 포'랑 막상막하다. 기대 수준을 낮춰라.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독자로서 순례하는 기분으로 책을 펴라. 작가를 사랑하다면 그의 졸작이며 초기작에 별별 잡글까지 다 읽어치울 수 있으니.

애거서 크리스티의 초기작, 습작, 범작, 졸작,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읽는 재미가 나름 솔솔하네. 다시 한 번 경고하는데, 기대 수준을 낮춰 읽어야 한다.

남녀 삼각관계를 다룬 소설이 세 편이다.

소설 쓰기 연습 중인 사람들한테 유명 작가의 초기 습작을 접하는 것은 대단히 유용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잘 썼다고 여겼던 이들도 초기에는 나처럼 그다지 잘 쓰지 못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심이 될 것이다. 명심하라.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습작 단편소설은 주로 누군가, 대개는 주인공이 죽는 것으로 끝을 낸다.


[꿈의 집] The House of Dreams - 공포소설 / 초기 습작의 개작

초기 습작인 아름다운 집 The House of Beauty 을 개작했다. 별로다. 문장력은 초기 때나 전성기 때나 별 차이가 없다. 문장은 왜 그리 잘 쓰지 못하느냐고 면박을 줬다면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은 나오지 못했으리라. 애거서는 반전 플롯의 장인이지 세련된 문장의 작가는 아니었다.

이든 필포츠라는 소설가를 아는가? 추리소설을 많이 읽는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나 알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작가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필포츠가 애거서의 이웃이었다. 이제 막 글을 끄적이며 소설이랍시고 본인이 생각해도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글을 당시에 명성이 자자했던 소설가가 읽어주며 충고를 해 줬다. 그는 애거서한테 "오직 격려만을 해주었을 뿐 비판을 삼갔다"고 한다.

어쨌거나 몽상에 빠져 어떻게든 그것을 글로 문장으로 표현해냈고 다시 고쳐 썼다. 잘생긴 남자 한 명을 두고 두 여자가 경쟁하는 구조는 트릭의 정점을 찍었던 '나일 강의 죽음'에서 본격적으로 나온다.

[여배우] The Actress - 추리소설 / 초기 미스터리 작품

여배우가 몸소 추리소설의 고전 트릭인 '1인2역 연기의 신'을 선보인다. 반전 트릭의 기본 설계도다.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에서 자주 나온다. 여배우가 나오면 또 이 트릭이 나온다 여기면 된다.

이 소설에서는 반전 트릭을 쉽게 볼 수 있으나 트릭 구조가 복잡하고 정교해진,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들에서는 알아차리기 어렵다. '검찰 측의 증인'만 봐도 이 트릭이 절묘하고 세련되게 가공했는지 알 수 있다.


[칼날] The Edge - 심리소설 / 본인 실종 사건에 대한 암시 / 삼각관계


불륜 이야기. 두 개의 삼각관계가 겹치면서 두 여자가 서로 극단에 이른다.

범작이지만, 작가 본인 이야기를 담았으리라 추측되기에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도 애거서 크리스티의 실종 사건은 진상을 모른다. 이 단편소설을 읽어 보면, 남편 아처볼드가 바람피운 것에 대한 화풀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소심한 성격의 애거서는 울분을 참을 수 없었고 이를 소설 쓰기와 자기 숨김으로 표출했던 듯 보인다. 화나서 집 나감. 영화 '아가사: 살인의 진실'은 그 실종 기간 동안 탐정 노릇을 했다는 식으로 상상력을 발휘했다.


[크리스마스 모험] Christmas Adventure - 추리소설 / 푸아로 출연작  


단편집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에 실렸던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의 원작이다. 개작은 분량을 늘려 중편으로 만들었다. 크리스마 푸딩을 먹지 말라는 경고 쪽지를 받은 푸아로! 푸아로가 아이들과 힘을 합쳐 보석 도둑을 잡는다는 이야기다. 자잘한 소품, 즐거운 반전, 연극적 함정이 재미있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읽을 만하다.


[외로운 신] The Lonely God - 연애소설


작가 스스로 "딱하도록 감상적"이라고 했을 만큼 심하게 오글거리는 로맨스 공상이다. 르귄의 단편소설 '파리의 4월 April in Paris'이 생각난다. 재능이 있으나 외로운 남녀의 사랑. 가볍게 읽고 끝에 웃을 수 있다.


[맨 섬의 황금] Manx Gold - 추리소설 / 보물 찾기 게임


보물찾기 이야기다. 유서/유산 찾기 이야기는 크리스티가 종종 다루긴 하지만, 가장 비슷한 소설은 '괴상한 장난 Strange Jest'인 듯, 이 소설처럼 본격적으로 보물 찾기만을 다룬 작품은 없었다.

맨 섬의 관광 진흥을 위해서 '맨 섬 보물 찾기 대회'를 열고 신문에 단서를 발표하고 이 이야기를 애거서 크리스티가 쓰는 식이었단다. 크리스티 여사는 행사 주최자와 상의를 해서 여러 단서와 보물을 묻을 장소를 정했다고.

실제 보물은 제목처럼 황금은 아니었다. 행사 주최자인 앨더맨 크루컬의 서명이 들어 있는 서류였고 그 서류가 코담뱃갑 안에 있었다고. 그걸 가지고 시청 담당자한테 가져 가면 돈을 받는 식이었다.

해설에 따르면, 이 행사가 성공적이었는지 알 수는 없다고 한다. 섬 주민은 보물찾기에 참여할 수 없게 하자, 화가 난 몇몇 사람들이 가짜 힌트와 가짜 보물을 만들어 방해를 하기도 했단다.


[벽 속에서] Within a Wall - 연애소설 / 삼각관계


화가, 화가 부인, 화가가 그리는 여자. 이런 삼각관계를 가져다 쓴 장편소설 '다섯 마리 아기 돼지(황금가지) / 회상 속의 살인(해문)'이라는 걸작을 만들어낸다. 천하의 애거서 크리스티도 초창기 습작은 초라했다.


[바그다드 궤짝의 수수께끼] The Mystery of the Baghdad Chest - 추리소설 / 푸아로 출연작


단편집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에 실렸던 '스페인 궤짝의 비밀'의 원작이다. 거의 똑같다. 개작된 소설은 미스 레몬이 나오는 3인칭 관점으로, 원작은 헤이스팅스 1인칭 관점으로 서술되어 있다. 기계적 트릭인데, 알면 무척 허탈하다. 알기 전에는 참으로 신비롭게 느껴진다.


[빛이 있는 동안] While the Light Lasts - 연애소설 / 삼각관계


진부하다. 발표 당시에 전쟁통에 흔히 일어났을 법한 이야기다. 가난하지만 착한 남자랑 결혼한 여자. 전쟁이 일어난다. 남편이 전사하자, 돈 많은 남자한테 시집간다. 여자는 더럽게 비싼 다이아몬드를 선물로 받고 부자 남편이 좋아하는 담배 농장으로 놀러간다. 그곳에 참으로 우연하고도 전남편을 만난다. 그는 멀쩡하게 살아돌아왔으나 예전보다 더 가난하고 흑인 같은 외모에 다리까지 전다. 여자는 다시 시작하자는 전 남편의 제의를 임신했다는 거짓말로 거절한다. 가난하지만 착한 남자는 절망하고서 자살한다.

202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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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은 쉽다
애거서 크리스티
황금가지 2007년

위치우드 살인사건
해문출판사 1990년

Murder is Easy 1939년 영국
Easy to Kill 1939년 미국

2009년 드라마는 개작을 많이 했다. 사연과 결말에 경악했다. 불쾌했다.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반면 2023년 드라마도 개작인데 밍밍했다. 예쁜 화면만 본 기분. 그나마 원작에 더 가깝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이렇게 저렇게 썼을 리가 없다. 확인차 원작 소설을 영어 원서로 읽었다. 원작을 읽고서야 제대로 이해했다. 드라마 개작은 영 아니었다.


소설은 지루한 편이다. 아무래도 수사와 추리 과정을 자세히 세세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용의자도 많고 피해자도 많고 일일이 추리하려니 그럴 수밖에. 14장이 절정이다. 독자는 더 더욱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에 처한다.

이 소설에서는 살인이 쉽게 많이 계속 일어난다. 무려 일곱 명이 살해된다.

도대체 왜 누가 작은 마을의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것일까?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계속 되는 죽음을 살인이 아니라 사고로 보고 있다.

이들 중에 연쇄 살인범이 있다는 긴장감 속에서 범인을 찾아야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애는 계속된다. 추리소설인데 연애소설을 동시에 읽는 기분이다. 설득력이 있는 로맨스는 아니다. 그렇게 쉽게 돈과 신분 상승의 기회인 결혼을 포기한다고? 첫눈에 반했다는 것과 결혼할 상대자 인성이 나쁘다는 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사랑이 애초에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닐지도. 후반부 닭살 주의.

전직 경찰인 루크가 탐정이다. 범인을 추리한 후 증거를 찾지 못하자 그제서야 경찰을 부른다. 그래서 배틀 총경이 등장한다. 거의 끝에서야 나온다. 딱히 하는 일도 없다. 

물적 증거는 없고 추측으로 한 사람을 거의 범인으로 확정하다가 뒤집는 식이다. 함정 파서 범인의 자백을 듣는 식으로 해결된다. 차 싫어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살인이 그렇게 쉬웠고 좀처럼 범인으로 의심조차 받지 않은 이유는 뭘까? 운도 있지만 직접적인 동기가 없었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이러니 독자는 범인을 절대로 추리해낼 수 없다.

2025.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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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측의 증인
애거서 크리스티
황금가지
2013년

단편집인데 '검찰 측의 증인'만 읽었다. 이 외는 이미 다른 단편집에서 읽었다. 해문에서 펴낸 단편집 '죽음의 사냥개'와 많이 겹쳤다. 해문 단편집에 때마침 이 '검찰 측의 증인'이 빠져 있다. 그래서 황금가지 번역본으로 읽었다.

'검찰 측의 증인'은 애거서 크리스티 단편소설 중에서 유명한 작품이다. 작가가 자주 쓰는 트릭을 이용했다. 명배우 1인 2역. 역심리 이용. 권선징악이 아니라 악의 승리로 결말을 낸다. 독자의 기대를 정확히 배신해서 반전을 만들었다. 피고의 무죄를 증명해내는 해피엔딩인 줄 알았다가 한 방 제대로 먹는다.

영상으로 제작되었다. 1957년 흑백영화가 왓챠에 있다. 후반에 나름 정의를 실현하는 식으로 각색되었다. BBC에서 2016년에 만든 텔레비전 드라마는 봤었는데 이제는 거의 기억에 남은 게 없다.

2025.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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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의 시체
애거서 크리스티
황금가지
2007년 발행
2013년 개정판

드라마 미스 마플 시즌1 1화를 본 후, 결말이 동성애자 레즈비언으로 나와서 깜짝 놀랐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동성애를 다뤘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원작 소설을 읽었다. 역시나 당연하게도 원작은 드라마와 다르게 이성애로 나온다. 각색이 더 흥미롭긴 했다.

제목 때문인지 '서재의 시체'는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 중에 많이 팔리는 책들 중에 하나다. 클리셰의 힘?

미스터리 소설에서 희안한 상황부터 던지고 이를 풀어내는 식은 언제나 잘 먹히는 출발이다. 전개해서 좋은 결말까지 낼 수 있는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바로 작가의 능력이다. 같은 음식 재료라도 요리사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것처럼.

점잖은 밴트리 대령(아서 밴트리)의 서재에 웬 금발머리 젊은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서재에 시체라니. 이 무슨 추리소설에나 나올 상황이지 않은가. 밴트리 부인(돌리 밴트리)는 처음에는 믿지 않는다. 꿈이 덜 깬 모양이다 싶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하고, 톨리한테서 연락을 받은 미스 마플도 사건 현장인 서재로 출동한다.

아무리 봐도 밴트리 대령과 젊은 여자는 연결이 안 된다. 평소 금발머리 아가씨랑 지내던 옆집 영화 관계자 베이즐 블레이크가 범인으로 의심스러워 찾아가 보지만, 평소 그와 지내던 금발 여인은 멀쩡하게 살아나서 나타난다.

실종자 명단을 조사해 보니 시체와 일치하는 사람은 없다. 파멜라 리브즈의 키는 약 167센티미터. 인접 주 경찰서에서 실종 신고 전화가 온다. 루비 킨. 값비싼 럭셔리 호텔에 근무하는 전문 댄서로 금발이며 의상이 서재의 시체와 일치한다. 키는 165센티미터. 흐음.

루비 킨의 사촌인 조세핀 터너(조시)가 신원 확인을 위해서 도착한다. 시체를 보고는 놀라거나 슬퍼하기보다는 화가 난 모습이다. 뭐지?

머제스틱 호텔에서 댄서 겸 브리지(카드 게임의 일종) 호스티스로 일하는 조시는 해수욕을 하러가다가 바위에 미끄러져 발목을 심하게 삐어서 자신의 대타로 사촌 루비 킨을 불러 들였던 것. 그 옛날 영국 고급 호텔에 VIP 손님과 놀아주는 전문 직원이 있다니, 흥미롭다. 요즘도 있나? 비슷한 거로 있을 듯.

드라마에서는 치마를 들어올려 이 삔 발목을 보여주는 장면이 은은하게 야하다. 뭐 그냥 내가 그렇게 느꼈을지도. 조시 앞에 있던 남자 세 사람이 일제히 그 발목을 쳐다본다.

루비 킨의 실종 신고를 한 사람은 머제스틱 호텔에서 머물고 있던 갑부 콘웨이 제퍼슨은 루비를 입양 후 거액의 돈을 물려주겠다는 유서를 썼다.

초반 황당한 상황은 범인의 계획이 틀어져서 생긴 일이었다. 서재에 시체가 발견되기 위해서 작가는 그렇게 조치를 취해야 했지만. 

범인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자 당황했으나 계획대로 베이즐 블레이크가 범인으로 잡혀서 안도한다. 그러던 중 콘웨이가 유서를 다시 고쳐서 루비한테 주려는 돈을 기부한다는 얘기가 들리는데... 함정 파서 범인을 잡는다. 무난한 해피엔딩.

남자아이 티퍼 카모디가 이렇게 말한다. "추리소설이라면 전부 읽었고요. 도로시 세이어스, 애거서 크리스티, 딕슨 카랑 H. C. 베일리한테 사인도 받았는걸요." 대놓고 자기 이름을 거론한다. 애 여사의 자신감.


The Body in the Library (1942) 영어원서 완독 후기


모르는 단어를 한 열 번 정도 찾아 봤던 것 같다. 수월하게 읽어낸 편이다.

드라마를 보고 전반적인 내용을 알고 읽었다. 드라마는 동성애로 반전을 주며 범인을 바꿨다. 원작 소설은 이성애자가 범인이었다. 드라마는 계속 이어지는 화에서 미스 마플의 불륜을 이야기하는데, 원작 소설에는 그런 얘기 없다. 결국 드라마 각색은 원작을 더 다채롭고 더 깊게 바꿨다.

동떨어져 보이는 두 살인 사건의 연결점은 잘린 손톱으로 알아낸다. 이는 순전히 운이었다. 미스터리 소설 팬인 소년이 살인 사건 기념품이라면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 손톱을 챙겼던 것이다.

기존 추리소설의 흔한 설정, 서재의 시체를 가져다 트릭으로 이용했다. 작가의 도전적인 작품이다.

2025.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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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에 완성했으나 계속 퇴짜를 맞았다. 출간하겠다고 했던 곳에서는 1년 동안 보관했다가 1920년 출판한다. 원고료는 보잘것없었으나 이를 계기로 자신감을 얻어 작가는 이후 80여 권을 써낸다. 이 소설을 시작으로 불멸의 추리소설 황금기 역사가 쓰여진다. 명탐정 에르퀼 푸아로의 첫 등장이자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데뷰작이다.

자서전에 보면, 애서거는 이 책 출판 당시만 해도 푸아로라는 캐릭터로 추리소설을 많이 오래 쓸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 편으로 끝날 거라 여겼다. 첫 작품에서 푸아로는 나이가 꽤 들어서 은퇴한 전직 경찰로 나오니까.

푸아로의 마지막 '커튼'은 바로 이 작품 이후에 쓴 것으로 보인다. 완성 후 원고를 금고에 넣어 두었다. 주인공이 죽으면 연재 시리즈물을 만들 수가 없으니까.

장편소설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은 유산을 둘러싼 독살이다. 누구도 범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다들 동기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 여러 인물을 균형있게 배치한 솜씨가 좋다.

단서와 기이한 일을 모래알처럼 뿌려놓았다. 책에는 저택의 2층 평면도, 잉글소프 노부인의 침실 도면, ll and만 남은 종이 조각, 몇 마디 글을 휘갈겨 쓴 편지봉투 등 수수께끼 조각들이 종합선물세트처럼 담겨 있다. 범인잡기 게임을 위한 소도구를 풍부하게 제공한다. 독약, 애증, 유서, 밀실을 잘 섞었다.

곳곳에 긴장 풀라고 유머를 넣었다. 갑작스러운 청혼이라니, 생뚱맞게 웃겼다. 푸아로는 결벽증이 있는데, 이같은 주인공의 특징을 익살스럽게 표현했다. "옷차림은 언제나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말쑥했다. 아마도 그에게는 먼지 하나가 총탄으로 입은 상처보다는 더 큰 고통을 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해문출판사 2002년판 34쪽)

지은이는 제1 차 세계대전 동안 병원 약국에서 일했던 경험 덕에 독약 스트리크닌에 대해 자세히 써 놓았다.

이야기는 헤이스팅스 대위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한다. 자연스럽게 화자가 독자의 입장이 되면서 작가의 입장인 푸아로한테 사건의 해결을 듣는다. 초반 이야기 분위기가 아서 코난 도일의 '주홍색 연구'와 유사하다.

친절하게도, 푸아로는 각 의문점을 정리해서 알려준다. "첫째는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버린 커피잔이야. 둘째는 열쇠가 꽂힌 채로 놓여 있는 편지 상자이고, 셋째는 바닥에 묻어 있는 얼룩일세."(해문출판사 2002년판 64쪽)

추리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푸아로가 헤이스팅스한테 말한다. "한 가지 사실은 다른 또 하나의 사실을 이끌어 주지.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계속 처리해 나가는 거야. 다음 사실이 앞의 것과 일치하는가? 만일 일치한다면 아주 좋은 일이지! 아주 훌륭해! 그렇다면, 우리는 계속 다음 사실들을 추적할 수 있지. 그런데 다음에 나타난 것이 아주 조그만 것이라도 앞의 사실과 어긋난다면, 우리는 계속 추적해 나갈 수가 없어! 아하, 바로 이것이 이상하구나 하고 생각해야지. 거기엔 뭔가 빠진 것이 있다는 걸세. 감추어져 있는 고리의 연결 부분이라고나 할까."(해문출판사 2002년판 55~56쪽)

비범한 관찰력과 뛰어난 추리로 이상한 사건을 풀어내는 탐정소설의 계보라. 뒤팽이 홈즈를 낳고 홈즈는 푸아로를 낳으니라. 이 탐정들의 특징은 고스란히 오늘날까지 전해져 닥터 하우스와 몽크에까지 이른다. 하 박사는 홈즈의, 몽크 씨는 포와로의 자손이다.

코난 도일이 홈즈가 나오는 첫 소설 '분홍색 연구'에서 에드거 앨런 포의 뒤팽을 인용하듯, 애거서 크리스티는 푸아로가 처음 등장하는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에서 홈즈를 인용한다. 헤이스팅스의 입을 통해 말한다. "오, 나는 셜록 홈즈와 같은 탐정이 되고 싶습니다."(해문출판사 2002년판 18쪽)

작가 본인은 추리소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에블린 하워드 양은 헤이스팅스에게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며 "터무니없는 소설도 많이 있어요. 범인은 마지막 장에서 등장하지요. 누구나 깜짝 놀라서 말문이 막혀 버리게 말이에요."(해문출판사 2002년판 18쪽)라고 말한다. 작가는 이 말을 이 작품에서 실현한다. 

◆ 1회독 2011.7.10 (해문 2002년판)

다시 읽어 보니 역시 대단하다. 애 여사는 미스터리 천재다. 첫 작품이 이 정도다! 이토록 정교한 수수께끼 구조물을 만들어내다니, 경이롭다. 남녀의 미묘한 연애 심리와 범죄자의 기이한 심리까지 묘파해내는 솜씨라니. 작가 자신이 가장 자신있는 독약 전문 지식을 활용했다.

◆ 2회독 2014.6.8 (황금가지 2013년 2판)

부록으로 작가 인터뷰가 실렸다. 언니의 말에 반발해서 쓴 소설이라고. "'너까짓 게 감히 미스터리소설의 걸작을 쓸 수 있을라고!' 하던 언니의 말에 반발하다시피 쓴 것이 바로 이 <스타일즈 저택 괴사건>인데, 여기서 처음 내가 좋아하는 포아로가 여러분께 인사를 드리게 되었지요." 300쪽 

◆ 3회독 2014.7.5 (동서문화사 2003년 중판)

번역서로 읽을 때는 쉽지만 원서로 읽으니까 어렵네요. 이유는 당연하게도 작가가 영국식 구어 표현을 많이 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는 영어시험에는 대개는 나오지 않는 것들이죠. 사전으로 찾아 보면 거의 끝부분에 해당 뜻이 있습니다. 영어는 다의어라서 문맥상이 뭐가 알맞은지 골라야 하기 때문에 글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면 오역이 필연이더군요.

1장에 나오는 단어와 표현을 살짝 몇 개만 살펴 보죠.
I had been invalided home from the Front : invalid가 수동형으로 쓰여 상이군인으로 송환되다는 뜻입니다.
We had a good yarn about old times : yarn는 구어로 잡담이란 뜻입니다.
Rotten little bounder too! : bounder는 영국 구어로 상스러운 사내라는 뜻입니다.
it's making life jolly difficult for us : jolly는 영국 구어로 '대단히'를 뜻합니다.
mater : 영국 구어로 어머니를 뜻합니다. 아버지는 pater고요.
A great sport : 뛰어난 스포츠라고요? ㅋㅋ. 아닙니다요. 여기서 sport는 사람을 뜻합니다. 재주 많은 사람.
as game as they make them : 게임이 형용사네요. ㅎㅎ. 의지 있는, 투지만만한, 원기 왕성한.
the mater cottoned to him at once : 어머니께서 단번에 그를 코튼했다? 뭔소리야? 솜옷을 입혔다는 말인가? ㅎㅎ. 구어 표현으로 cotton to는 좋아지다라는 뜻이래요.
번역서에 그리도 간단하고 쉬운 문장이 원서에서는 이토록 이해하기 어려웠던 겁니다.

영어 원서로 통독했다. 문장 구조는 간단해서, 허기야 문장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수준으로 평이하게 쓰는 편이라, 읽기는 수월했다. 다만, 어휘나 표현이 가끔씩 낯설고 어려운 게 있어서 아주 쉽게 술술 읽지는 못했다. 재판 과정은 지루했다.

이번이 4회독인데, 여전히 경이로운 작품이다. 어떻게 이게 데뷰작이냐고, 세상에. 반전에 오해에 함정에 여러 사람의 사연이 꼬여서 복잡해 보이나 푸아로의 경쾌하고 명쾌한 수사는 웃음과 약올림을 섞으며 착착 진행된다. 용의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그동안의 의문과 수수께끼를 차곡차곡 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풀어내며 마침내 살인범을 발표하는, 불꽃놀이처럼 작열하는 푸아로의 파이널이 멋지다.

브라보, 애거서. 브라보. ◆ 4회독 2011.11.6 (영어 원서)  ◆ 5회독 2015.7.15 (영어 원서) ◆ 6회독 2019.11.9 (영어 원서)

아무래도 영어원서로 읽으면 번역본으로 읽을 때보다는 더 천천히 자세히 신중하게 한 문장씩 꼼꼼하게 읽게 된다. 하지만 모르는 단어 숙어가 워낙 많이 나와서 나도 모르게 종종 건너뛰고 읽었다. 아, 정말이지 낯설고 어려운 영국영어 표현이 많이 나왔다. 영어 익히기에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이 좋다고 추천하던데, 나는 추천하지 않는다. 가끔씩 나오는 짤막한 불어도 은근히 거슬렸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다소 복잡하고 약간 지루했지만 말이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추리소설이 아니라 연애소설로 성공했다면 어땠을까? 로맨스 소설에 나올 법한 심쿵한 문장이며 자잘한 연애 심리를 절묘하게 묘사하는 것을 보면, 연애소설로도 성공했을 것 같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메리 웨스트매컷이라는 필명으로 쓴 소설들은 로맨스라고 하기에는 너무 우울했다.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
애거사 크리스티
김남주 황금가지
2015년 7월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은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 중에 가장 여러 번 읽은 책이다. 역시 대단한 작품이다. 이게 첫 추리소설이었다는 게 더욱 놀라운 일이다. 백 번 읽어도 이 정교한 미스터리 구조물의 찬란한 빛이 희미해지지 않으리라.

1판 2쇄 255쪽 오탈자
그렇데 → 그런데

◆ 7회독 2025.1.16 (황금가지 2015년)

국내 번역본은 셋이다.

1. 동서문화사, 미스터리 북스 123번, 2003년판, 스타일즈 저택 괴사건
오탈자가 몇 군 데 있다. 가끔 원문을 무시하고 자기 좋을 대로 자기 마음대로 번역한 문장이 종종 있다. 문장을 아예 빼먹고 번역 안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신기하게도 읽기에 불편하진 않았다. 부록으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인터뷰를 실었다.

2-1.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2, 2013년 2판,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
표지는 독자를 약올렸던 커피잔이다. 한 개 없어졌다고 쇼를 한다. 오탈자가 많다. 저택 평면도에는 '존 잉글소프의 방'이라고 잘못 적혀 있다. 존 캐번디시다. 비교적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다. 오역. 236쪽 다른 하인들이 눈물을 끌썽이며... 원문에는 눈물 흘린다는 말은 없었다. all eyes and ears(신경을 곤두세우다)로 나올 뿐이다. 237쪽 노골적으로... 원문에는 unfeignedly(꾸밈없이)로 나온다.

2-2.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푸아로 셀렉션 1, 2015년 1판,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
지난 판본의 저택 평면도 오류를 수정했고 오탈자를 바로잡았다. 푸아로가 프랑스어로 말하는 부분을 번역에 반영해서 발음을 우리말로 적은 후에 해당 번역을 가로 안에 넣었다. 예를 들면, 비엥!(좋습니다!) 이런 식이다. 

3-1. 해문 1990년판,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
문고판. 작고 가벼워서 가지고 다니며 읽기 좋다. 옛날 번역이라서 예스러운 느낌이 들어서 황금가지 번역본보다 선호하는 이들도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을 빨간책으로 기억하는 세대다. 표지가 고딕 성당을 자르는 거대한 톱니 바퀴다. 해문 표지는 소설 내용을 전혀 짐작할 수 없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인기다. 이상한 인기다.

3-2. 해문 2002년판,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
표지에 제목만 있다. 하드커버 양장본. 휴대성이 떨어진다.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 12장 초고의 비밀

2024년 9월 24일 발행한 이 페이퍼백 영어원서( ISBN 9780063375901)에는 이 책 이 전에는 출판되지 않은, 12장의 초고를 부록으로 수록했다.

이 12장은 소설의 하이라이트다. 이제는 탐정소설의 크리셰가 되어 버린, 푸아로 파이널이다. 놀랍게도, 초고에서는 탐정이 법정에서 진술하는 식이었다.

읽어 본 바로는, 당연하게도 추리 자체는 바뀐 것이 없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용의자들을 다 모아놓고 범인을 밝히는 식보다는 재미가 덜했다.

이 영어원서 책 맨 앞에 있는 소개문에 따르면, 이 책의 출판사 사장 John Lane이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한테 그렇게 바꾸라고 요구했단다. 보라, 편집은 신의 영역이다.

초고를 수정하면서 더 확실하고 더 명확하게 추리를 설명했다.

이 첫 장편소설 추리소설 이후 푸아로 파이널이 반드시는 아니지만 빈번하게 나온다.

이 소설을 탄생시키도록 한 사람 둘, 어머니와 언니

애거서 크리스티는 집안에 문학 야망을 지닌 사람이 자신 말고도 두 명이 더 있었다. 어머니와 언니.

첫 장편추리소설인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을 어머니한테 바친다는 헌사는 그냥 쓴 게 아니다. 실제로 이 장편소설을 써서 완성하도록 응원했던 사람이 그녀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끝내주는 추리소설을 쓰도록 부추긴 것은 언니였다. "I bet you can't write a good detective story." "내 장담하는데, 넌 좋은 탐정소설을 쓰지 못해." 잘 봐라. 그냥 추리소설이 아니다. 잘 쓴, 좋은 추리소설이다. 그래서 아예 끝내주는 추리소설을 써버린다.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은 그녀가 처음 쓴 '추리'소설이지 처음 쓴 소설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너무 기 죽지는 마라. 이미 추리소설 잘 쓰는 재능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 맞긴 하지만.

2025.2.2

13장 읽어 보니, 오류 혹은 억지가 있다. 큰 문제나 잘못은 아니긴 하다. 자신의 손글씨를 흉내내어 쓴 편지를 의심하지 않다니 이상하다. 익명의 편지가 내 글씨체로 써 있는데, 그걸 믿고 편지에서 가라는 곳으로 간다?

20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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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애거서 크리스티
황금가지 2015년

푸아로 시리즈 마지막 사건 | 탐정소설 규칙 세 가지를 어긴 작품

"벨을 울려 커튼을 내리자." 279쪽 커튼을 내린다는 말은 연극의 종료를 뜻한다. 결국 푸아로 시리즈의 마지막, 곧 주인공의 죽음이다. 책 제목 커튼만으로는 알기 힘들지만.

오랜 시간 푸아로 시리즈를 읽어 온 독자한테 '커튼'은 무척 안쓰러운 소설이다. 푸아로의 회색 뇌세포는 여전히 잘 돌아가지만 신체는 이제 다 고장나서 이미 끝이 보이고 있다. 죽음이 예정되어 있으니.

푸아로 시리즈의 시작과 끝은 '스타일스 저택'에서 사건이 일어난다. 시작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전형적인 미스터리 세팅이었고, 끝은 그동안 전혀 보지 못했던 스타일이었다.

끝에서야 범인을 알 수 있다. 푸아로 마지막 사건 소설 '커튼'은 탐정소설의 일반적인 규칙으로 이것 하나만 지키고 나머지는 죄다 파괴해 버린다. 

첫째, 탐정이 범인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헤이스팅스한테는 끝까지 누군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 누구한테도 말해주지 않는다. 독자한테는 물론이다.

둘째, 탐정이 범인을 죽인다. 탐정이 살인자다. 일반적인 경우, 탐정은 범인을 발견하거나 체포는 할 수 있어도 자신이 직접 범인을 죽이지 않는다. 

셋쩨, 탐정이 자살한다. 탐정이 자살하는 탐정소설은 거의 없다. 독자는 탐정의 자살 혹음 죽음을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다.

네 번째로 이 소설을 읽으면서도, 애거서 크리스티의 걸작 소설들이 그렇듯, 아주 맨 마지막에서야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있는 식의 이야기 설계 솜씨는 여전히 경이로웠다. 추리소설의 최상극 지점을 찍어 버렸고 이후에 나온 그 어떤 추리소설도 이만큼 절묘한 솜씨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완벽한 작품이란 애당초 없는 것이라, 좀 억지다 싶은 부분이 있다. 아무도 없을 때 총을 그 사람의 화장대에 두어서 그 사람의 총으로 속였다는데, 너무 운이 좋다. 다른 사람이 그 총을 목격하고 그 사람한테 물어 보지 않았을까. 왜 총을 그렇게 보이게 두었냐고. 소설은 소설이니까.

2021.11.15

내가 이 소설을 몇 번째로 읽었는지 알려면 기억을 되살려야 한다. 처음에는 해문에서 펴낸 하드커버로 읽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었는데, 표지가 간신히 붙어 있었다. 다음에는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에서 나온 것으로 읽은 듯 하다, 2014년쯤에. 이번 세 번째로는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푸아로 셀렉션으로 펴낸 책으로 읽었다. 2018년.

4년 세월이 흘렀지만, 아쉽게도 나는 추리소설 '커튼'의 범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트릭도 어느 정도는 생각이 났다.

따라서 독자의 입장이 아니라 작가의 입장에서 읽게 되었다. 범인이 누구인지 궁금한 것이 아니라 과연 범인을 최대한 모르게 하면서 힌트를 어떻게 뿌리는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추리소설에 짜놓은 플롯과 트릭은 워낙 복잡해서, 설명을 다 읽은 후에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지경이다. '커튼'은 그나마 다른 작품에 비해서 덜 복잡한 편이다.

이 글에서 애써 그 트릭과 전개과정을 분석하고 설명할 마음은 없다. 왜?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의 재미는 바로 그 수수께끼, 거의 기적에 가까운 범죄 수법에 있기 때문이다. 문장은 평범하고 인물 묘사는 대충임에도 그 신기에 가까운 범죄 트릭은 최고 수준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커튼'은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 나오는 이아고를 자신의 스타일로 재창조했다. 소설에서도 책 '오셀로'를 등장시키고 종종 언급한다.

그러니까 살인이나 자살을 직접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보다 한층 교활하게 살인이나 자살을 하도록 부추기는 범인을 등장시킨다.

처음 읽었을 때는 엄청난 충격이다. 기존 추리소설의 일반 규칙을 다 배반해 버리다니! 추리소설에서는 일반적으로 거의 하지 않는 짓을 셋이나 해 버린다.

첫째, 탐정이 이미 살인범이 누구인지 안다. 푸아로는 헤이스팅스한테 그렇다고 말하면서 살인범이 누구인지는 정작 안 알려준다. 언제나 그렇듯 그런 식으로 독자를 약올린다.

둘째, 탐정이 살인범을 살인한다. 가장 놀라웠다. 살인을 하는 탐정이라니. '오리엔트 특급살인'에서 이미 어느 정도 예감되어 있긴 했다.

셋째, 탐정이 자살한다. 탐정은 시리즈를 잇기 위해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런데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다고? 소설가가 자기 밥줄을 끊는 꼴이다.

'커튼'의 영어 원서 제목은 Curtain: Poirot's Last Case다. 푸아로의 '마지막' 사건이다. 번역 제목에는 부제인 이 마지막 사건을 안 써서 우리나라 독자는 종종 손해를 보기도 한다.

'커튼'이 푸아로가 등장하는 마지막 책이라면, 당연히 독자 입장에서는 가장 나중에 읽으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걸 모르고 그저 제목 '커튼'만 보고 덥썩 집어 읽었다가 쏟아지는 다른 소설의 스포일러와 푸아로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정신이 어찔해지는 것이다.

푸아로가 처음 등장하는 소설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과 'ABC살인 사건'과 '오리엔트 특급살인'을 읽은 다음에 이 책을 읽기 바란다. 안 그러면 이 책 '커튼'을 읽다가 지난 책들의 범인과 수법을 알게 되니까.

추리소설은 한 번 읽으면 다시는 안 읽는 것이 일반적이다. 범인을 알고 그 수법까지 안다면, 읽는 재미가 없으니까. 추리소설을 쓰려는 사람이라면 여러 번 읽겠지만 독자로서의 재미는 거의 맛볼 수 없다.

기억력이 좋지 못한 이들한테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이 언제나 새 책이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범인도 수법도 다 잊어 버렸을 테니. 망각의 축복이어라!

하여 이 책 '커튼'을 처음 읽는 사람이,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부럽다. 그 사람은 아마도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바로 당신이겠지.

2018.09.04.

커튼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가형 옮김
해문출판사


애거서 크리스티 커튼 - 추리소설의 근본문제 정면 돌파하기

애거서 크리스티는 '푸아로가 죽는 소설'을 미리 써놓았다. 발표는 자신이 죽기 직전에 한다. 짐작하기로는 아서 코난 도일처럼 자신보다 자기 창조물이 더 인기 높은 게 싫었을 것이다. 또 그토록 오래 추리소설을 쓸 거라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커튼'은 '푸아로의 퇴장'으로 추리소설의 근본문제를 정면 돌파한다. 범죄소설은 수수께끼 자문자답 살인 자살의 감옥이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탈옥을 감행한다. 모든 규칙을 깬다. 탐정이 살인하고 자백하고 자살한다. 증거 없는 추리로 정의를 실현한다.

이 소설의 범죄자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에 나오는 이아고를 닮았다. 자신 스스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범행을 하도록 부추긴다. 타인의 감정을 이용하고 거짓을 진짜처럼 보이게 조작해서 그들 스스로 범죄를 저지르게 유도한다. 

스타일즈 저택에서 시작한 푸아로의 살인범 사냥은 스타일즈 저택에서 끝났다. 허구의 인물 에르퀼 푸아로의 죽음은 실제의 신문 '뉴욕 타임스' 부고 기사로 실린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은 트릭의 반전 기술력을 최고로 발휘했다. 추천한다.

커튼 - 금고 속에 넣어두었던 야심작

애거서 크리스티의 이 소설은 본인이 죽기 직전에 발표되었지만 훨씬 이전에 완성해서 금고에 넣어 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의외로 덜 알려져 있고 다른 작품에 비해 대중적 인기는 누리지 못하고 있다. 허기야 애정하는 주인공 탐정이 죽는 소설을 뭐 좋다고 읽으려고 하겠는가.

푸아로 시리즈 읽다가 거의 맨 마지막에 할 수 없이 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해문 번역본은 제목에 푸아로의 마지막 사건이라고 안 붙여서 무심코 읽었다가 낭패를 당하는 이들도 많다.

커튼은 추리소설 장르 규칙 전반을 때려부시고 어기는 소설이다.

1. 이야기 시작할 때부터 탐정이 범인을 알고 있다. 엥?

2. 탐정이 직접 정의실현을 위해 살인한다. 엥?

3. 탐정이 자살한다. 엥?

특히 마지막은 탐정 푸아로가 가톨릭 신자인 점을 생각하면 반전이 아니라 배신이고 신성 모독과 같은 것이었다.

커튼은 작가의 야심작이었던 것 같다. 

내가 셰익스피어보다 잘 쓴다고, 감히 직접 말할 수는 없지만 속으로는 그런 야망을 지녔던 듯하다. 

커튼에서 오셀로가 반복 인용되어 나온다. 게다가 마지막 문장에서 카인의 표식을 갖다 붙이는 걸 보면 더욱 그런 심증을 굳히게 된다.

추리소설의 그 자체의 한계로, 혹은 본질로 인해 기존 순문학을 문학적으로는 능가하지 못한다. 문학적 성취는 재미있는 오락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애 여사는 최선을 다했다. 푸아로는 탐정으로서 악을 징벌하여 결백한 이들의 삶을 구한다. 문학적 감동은 딱히 없지만 그래도.

다시 그럼에도 애 여사의 문학적 성취는 확고하다. 성경보다 많이 팔렸으며 셰익스피어보다 많이 읽힌다. 누가 문학의 승자인가.

202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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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세번째 여자 해문출판사
세 번째 여인 황금가지

Third Girl (1966)

표지 및 제목과 달리, 그다지 흥미롭게 생기지 못한 여자가 나온다. 기본적으로 누가 죽는 이야기에서는 대체로 미인이 살행당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다. 흔히 '곤경에 처한 미녀'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의 세팅은 정반대다.

얼마나 못생기고 한심한 옷차림으로 푸아로를 찾아왔는지 "그녀를 보고 당장 목욕탕으로 밀어 넣고 싶어 할" 정도다. 지지분한 차림새로 약속도 없이 찾아와서는, 이십 대 여자가 하는 말이 "당신은 너무 늙었어요. 정말 죄송해요."다. 그러고는 자기 이름은커녕 사건에 대해서 한 마디도 안 하고 떠나버린다. 푸아로, 심란하다. 상처받은 탐정, 난 퇴물인가.

때마침 마당발 추리소설가 올리버 부인한테서 전화가 온다. "너무 늙었다고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예요? 당신은 하나도 늙지 않았어요." 토닥토닥 위로의 말을 듣는다. 올리버 부인에게 그 여자의 모습을 얘기해 주니 만난 적이 있단다.

자신이 누군가를 죽였다는 '생각하는' 여자. 그래서 사립 탐정을 찾고 있단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살인"을 떠올린 푸아로는 올리버 부인과 함께 수사에 나선다.

두 번이나 자신이 죽였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살인이다. 살인은 자신이 하고 심리 트릭으로 상대가 살인이 했다고 믿게 하다니. 기가 막힌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었다는, 참으로 소설 같은 반전이다. 어떻게 자기 아버지도 못 알아보냐고요. 그게 말이 되냐고요, 여사님. '연기의 신' 트릭보다 더 화가 난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후반기 추리소설에는 가족 혈연의 닮음을 자주 언급하고 이를 소설의 뼈대로 쓴다. 나이 들어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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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 강의 죽음
애거서 크리스티
황금가지 해문출판사

나일에서 죽다
동서문화사

Death on the Nile (1937)

‘나일 강의 죽음’은 살인 미수, 선상 살인, 보석 절도, 스파이, 횡령, 로맨스를 결합한 추리소설이다.

연쇄 살인이 일어나는 가운데도 청혼하는 남자와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를 감싸는 여자가 등장한다. 애 여사의 스타일이다. 추리소설에 남녀의 사랑을 넣는다.

예전에 읽었던 인상과 달리, 그 마지막 장면에는 별다른 장식적 문장이 없었고 마지막 문장은 살해된 부잣집 미녀에 대한 냉소로 끝났다.

애 여사의 천재성은 푸아로의 설명을 들었어도 여전히 믿기기 않을 만큼 기묘한 트릭에 있다. 워낙 복잡해서 다시 사건을 재구성해 보라고 하라면, 나는 못할 것 같다. 이런 트릭을 만들려면 도대체 얼마나 생각을 해야 할까?

“사랑이 전부는 아니랍니다, 마드무아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젊은 시절뿐이지요.” 푸아로는 연애 도사님 같은 소리만 하신다. 본인 연애는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사랑 수호천사 역할만 잘한다. 자기 머리는 자기가 못 자른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읽으면 추리하는 재미에 남녀 사랑 심리 공부를 덤으로 하게 된다. “남자란 자기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여자가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아실 겁니다. (중간 생략) 남자는 몸과 마음을 소유당하는 것 같은 느낌을 싫어하죠. 빌어먹을 그 집착하는 태도 말입니다! 이 남자는 내 거야. 그는 내게 속해 있어. (중간 생략) 남자는 자신을 소유하려 드는 여자를 원하지 않으니까요.”

자신이 바라는 것과 자신이 잘하는 것이 다르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멋진 연애소설을 쓰고 싶었으나 범죄 추리소설에 재능이 있었고, 코난 도일은 훌륭한 역사소설을 쓰고 싶었으나 사람들은 셜록 홈즈 소설가로 기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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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 Cypress (1940)

슬픈 사이프러스
애거서 크리스티
황금가지

삼나무 관
해문출판사

사이프러스? 삼나무다. 슬픈 삼나무? 해문은 번역 제목을 ‘삼나무 관’으로 명확히 했다. 표지는 황금가지가 명확하다. 해문 표지는 엉뚱하다. 삼나무는 죽음을 뜻하니까, 내가 제목을 단다면 ‘슬픈 죽음’이라고 하겠다. 평범한가. 제목 짓기 어렵네.

소설 첫머리에 셰익스피어를 인용한다. 십이야(12夜) 2막 4장. “오노라, 오느라, 죽음이여, 슬픈 사이프러스 관 속에 나를 눕혀다오.” 

정당한 게임이 아니다. 범인 잡겠다고 머리 쓰지 마라. ‘연기의 신’은 안 나오지만 힌트를 치사하게 준다. 등장인물의 과거사를 무슨 수로 알아낼 수 있겠는가. 말해 주기 전에는 모른다. 의약품 전문가가 아니면 트릭을 짐작할 수 없다.

크리스티 소설치고는 특이하게도 법정 드라마다. 기소 장면으로 시작해서 판결로 마무리한다. “자, 모여들 봐. 내가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지.” 용의자들을 자극하며 자신의 추리 실력을 높이높이 드높이 자랑하는 ‘푸아로 피날레’가 나오지 않는다. 의뢰인 피터 로드한테 자기가 어떻게 추리를 했는지 차분히 말하긴 한다. 그래도 여전히 푸아로답다. 설명하는 중에 추측이 어긋날 수도 있었지 않냐 묻자, “난 틀린 적이 없는 사람이오!” 하고 대답한다.

유산과 애증의 거미줄 속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이다. 전형적인, 애거서 여사의 스타일이다.

푸아로는 기어코 중매쟁이 노릇을 이번 작품에서도 한다. “그 아가씨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선생인 것을.” 본인 연애는 제로면서 남 연애는 언제나 플러스다.

피살자 ‘메리 제라드’ 평가가 제각각이다.

테드 빅랜드 : “메리는 한 송이 꽃 같은 아이였어요.”

피터 로드 의사 : “착한 아이.”

홉킨스 간호사 : “당장 영화계로 진출해도 될 정도예요.”

비숍 부인 : “어찌나 거들먹거리는지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예요.”

자신의 감정과 이익이 반영되어 있어,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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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의 죽음
애거서 크리스티
황금가지 해문출판사

Death in the Clouds 1935
Death in the Air 미국판

비행기 밀실 살인 사건이다. 사채업자가 독침에 맞아 죽는다. 생뚱맞게 마침 말벌이 발견되었는데 하필 때마침 고고학에 열중인 부자한테 잡혔다. 게다가 독침을 쏘는 대통은 하필이면 푸아로의 자리 9번석에서 나온다. 범인은 분명히 비행기 탑승자들 중에 있다! 이 판국에 자기가 대통을 갖고 있었다고 자백하는 추리소설가가 납신다. 어이쿠야!

애 여사는 탑승객 거의 모두 의심스럽게 해놓는다. 그리고 탐정 푸아로는 엉뚱한 말벌에 신경을 쓴다. 아니, 지금 대통으로 독침을 맞아 죽었는데 왜 말벌을 신경쓰냐고! 미쳐 미쳐. 도대체 뭐야? 영어 원서 표지에 말벌이 나와서 코미디인 줄 알았더니, 끝까지 읽고서야 제대로 한 방 먹었다.

가난하지만 예쁜 여자 제인의 내 짝 만나기 분위기(돈 많고 잘생긴 남자가 날 좋아해! 헤헤헤.)가 확 풍겨서 거부감이 드는 가운데, 푸아로는 범인잡기 중에도 커플 매니저 노릇 하느라 바쁘시다. 두 커플 탄생했다. 서로 관련 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추리소설이 아닌 연애소설이었으리라.

독자의 주의를 정답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지극히 당연하고 단순한 추리를 늘어놓는 것이 정석이다. 탑승객 명단과 좌석 배치표에 객실 도면까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당신을 바보로 만들기 위해서다.

옛날 추리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연기의 신' 트릭은 이제 그만 좀 나왔으면 싶다. 이 트릭을 요즘 추리소설에서 쓰면 완전 바보 취급 당한다. 이 트릭을 쓰지 않고서는 반전을 만들기 어려운 것일까.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음악만 있으면 모든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으며 플루트를 쓰다듬는 브라이언트 박사의 모습이었다.

영어원서 완독 후기

책 삼 분의 일 지점에서 독자와 작가의 승부를 걸었다.

비행기 밀실 살인에서 용의자들 소지품 목록만 보고서 범인을 확정했다고 말하는 푸아로. 틀릴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의심 확정 certain suspicion 이라는 표현으로 조심스럽고 정확히 말한다.

안 알려줌으로 독자를 약올린다. 처음 읽었을 때 이 부분에서 아주 환장했었던 게 기억났다. 범인 알고 읽는 지금은 편안하고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13장은 결혼 얘기다. 내 맘대로 해석 요약해 보면 세 가지 유형이다.

1. 돈으로 비싸게 결혼하는 것은 세월이 가면 가치가 떨어진다. 

2. 본인과 취향이 맞는 사람과의 결혼은 시간이 갈수록 좋아진다. 

3. 가능성은 낮지만 신이 운명처럼 맺어준 사람과 결혼은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낸다.

탐정은 세 커플 결혼을 확정 짓는다. 심지어 기부금을 내서 커플을 만들어 버리기까지.

추리소설 작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 작가 자신의 하소연 비슷하게 들렸다.

2025.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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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골프장 살인사건
이가형 해문출판사

제목 '골프장 살인사건'만 보고 골프채나 골프공에 맞아 죽는 장면을 떠올린 것은 나만이 아니었으리라. 표지마저 골프공이 그려져 있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허나, 살인 현장 근처에 골프장이 있을 뿐이었다. 이게 다야? 그게 전부다. 흉기는 짧은 칼이고 시체가 발견된 장소는 별장 정원 근처 웅덩이다. 뭐야? 골프장하고 아무 관련도 없잖아.

골프장을 포와로는 무질서하다며 무척 싫어하는데 다만 한 가지는 좋아한다. "티 박스들 말이오, 공을 얹어 놓는 거. 적어도 그것들은 균형이 잡혀 있지."(73쪽) 해문의 표지는 적어도 이를 표현했다. 포와로에게 "'질서'와 '절차'는 종교와도"(13쪽) 같다.

여전히 황금가지의 표지는 내 상상을 지지한다. 맑은 하늘을 가로지르다가 골프장 근처를 걷던 사람의 머리를 강타하여 아주 그냥 죽여주는 새하얀 골프공을 말이다. 아쉽다. 내가 얼마나 기대했다고!

크리스티 여사는 반전의 여왕답게 세 번째 발표작에서도 여러 번 뒤집는다. 적어도 세 번 이상은 예상을 깨고나서야 결론에 도달했다.

포와로가 등장하는 두 번째 소설이다. 첫 번째보다 미스터리가 발전했다. 시체가 두 번 나타나고 20년 전 사건이 재현되며 한 사람이 두 사람 역할을 한다. 이렇게 복잡한 수수께끼를 초창기에 써내다니, 경이롭다. 전작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에서 커피잔으로 괴롭히더니, 이 소설에서는 단도로 사람 헷갈리게 한다.

로맨스를 강화했다. 사랑을 위해선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커플들. '스타일즈'에서 청혼했다가 퇴자를 맞았던 헤이스팅스는 '골프장'에서 자기 짝을 만나 키스한다. 왕자 신데렐라 쇼 하며 장밋빛으로 끝을 장식한다.

■ 1회독 해문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9
애거서 크리스티
이은선 황금가지
 
한국이 나온다. 지명으로 딱 한 번 나온다. 집사 가브리엘 스토너를 얘기하면서 나온다. "아프리카에서 맹수 사냥을 하고 한국을 여행했는가 하면."(111쪽) 애 여사님이 한국을 알고는 있었던 모양이다. 괜히 반갑다.

사건의 진상을 이미 아는 상태에서 추리소설을 읽으면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처음에 읽었을 때 어리둥절했거나 사소하다고 지나쳤던 것이 새삼 다시 새롭게 보인다. 더구나 크리스티 작품의 특징이 아주 사소하고도 엉뚱하게 보이는 단서를 맨 앞에 놓고 끝에서 회수해서 사건의 진상을 설명하는 식이라서 더욱 인상적으로 읽힌다. 아, 이렇게 힌트를 줬구나. 그래도 진상을 알긴 대단히 어렵다.

작가는 셜록 홈즈를 의식하면서 푸아로의 캐릭터를 만들어 추리소설을 썼다. 이 소설에서 발자국과 담배꽁초를 중시해서 수사하는 지로 형사를 대비시켰다. 푸아로는 그런 증거보다 사람들의 심리에 초점을 맞춰 수수께끼를 푼다. 헤이스팅스가 미인을 보고 '여신' 봤냐고 묻자, 푸아로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 아가씨'가 보일 뿐이라고 답한다. 에르퀼 푸아로는 사람의 심리를 본능적으로 관찰하고 심문을 통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곰곰 생각한다.

트릭의 복잡함과 반전의 연속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다. 여기에 목숨 같은 사랑으로 마무리한다. 수수께끼의 정교함은 세계 최고다.

황금가지 번역본의 오탈자는 여전하다. 띄어쓰기가 멋대로다.

■ 2회독 2014. 07.09 황금가지 2007년 1판

The Murder on the Links (1923)
Agatha Christie

제기랄(Hell! said the Duchess.)로 시작해서 제기랄(Hell! said the Prince-and kissed her!)로 끝난다.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The Styles Case? the old lady who was poisoned? Somewhere down in Essex? the Cavendish Case)을 언급하며 푸아로 시리즈 두 번째를 이어간다.

이 작품에서 푸아로는 자신은 발자국과 담뱃재를 추적하는 '사냥개'(당연히 셜록 홈즈를 가리킨다.)가 아니라 회색 뇌세포(자신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쓴다.)를 쓰며 왜 그런지에 대한 답을 내는 전문가라고 말한다. 육체보다는 머리를 쓰는 안락의자형 탐정이다. 안락의자형이라고 표현했지만 푸아로는 대체로 현장에 가는 편이고 발자국를 비롯한 현장의 여러 단서를 관찰하고 수집한다. 그러니까 푸아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논리적 추리다. 증거 수집, 필적 조회는 그런 전문가한테 맡기면 그만이지만 사건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자신이 전문가라는 얘기다.

푸아로는 현장에는 가지 않고 수사관 재프(Japp)의 말만 듣고서 플리머스 급행열차 사건(The Plymouth Express Mystery)을 해결했다고 말하는데, 이 이야기는 단편집 패배한 개(The Under Dog and Other Stories)에 있다.

전작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에 이어 헤이스팅스의 일인칭 서술이다.

시작부터가 특이하다. 의뢰인의 집에 도착하니, 의뢰인이 살해당했다. 이런 식의 시작은 다른 작품 '벙어리 목격자(Dumb Witness)'에서 또 한 번 반복된다.

푸아로가 프랑스 형사와 '누가 먼저 범인을 잡나'를 두고 내기를 하는데, 만약에 푸아로가 지면 콧수염을 밀어버려야 했다. 대신에 이기면 형사가 아끼는 담뱃대를 트로피로 가진다.

'의심의 여지 없이(without doubt)', 이 표현이 너무 자주 나온다. 눈에 거슬린다.

◆ 3회독 2015.07.16 ~ 20 영어원서

골프장 살인사건 해문 2010년 중판 완독 후기

번역은 괜찮은데, 접속사 뒤에 쉼표는 거슬렸다.

용의자들 모아놓고 사건 추리하는, 푸아로 파이널이 이 작품에는 없다.

뒤집기 반전이 워낙 많아서 짜증 혹은 곤란할 지경이다. 독자가 범인 못 맞추게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집필 목표로 삼은 탓이겠지. 이래서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다. 

푸아로가 지로랑 범인 잡기 내기를 하는데 그냥 돈이다. 각색한 드라마에서 푸아로가 지면 콧수염을 미는 거고 지로가 지면 담배 파이프를 주는 거로 나온다.

미스터리가 워낙 복잡해서 따라잡으려면 생각 좀 해야 한다. 드라마 각색은 더 간결하게 바꾸고 더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로맨스를 제대로 다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는 두 남녀. 

특히, 헤이스팅스의 사랑. 드라마는 더 멋진 장면으로 연출해서 보여준다.

추리물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클리셰가 보인다.

1. 사건 의뢰를 받아서 가 보니, 의뢰인이 살해되었다.

2.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범죄 사건이 재현된다.

2025.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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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The Murder of Roger Ackroyd (1926)

이 장편소설은 1926년 발표했지만, 이야기 속 시간 흐름 순으로 1927년 발표작 '빅 포' 다음이다. '빅 포' 끝장면에서 "나는 은퇴할 걸세. 가능하다면 호박을 심고 가꾸겠네."라고 나온다. 푸아로의 희망과 달리, 푸아로는 은퇴는커녕 죽는 그 순간까지도 사건 해결하는 탐정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게 된다. 이 소설로 애거서 크리스티는 추리소설가로서 확고한 명성을 얻었고 이후 푸아로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은 창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은 '스타일즈 저택의 괴사건'과 비슷한 세팅이다. 애 여사 스타일이다. 시골 작은 마을인 킹스 애버트의 부잣집 저택인 펀리 파크를 배경으로 돈 문제와 애증이 얽혀 있다. 대지주인 로저 애크로이드가 죽자, 때마침 이곳에 은퇴해서 호박을 기르고 있던 푸아로가 사건 수사에 착수한다. 헤이스팅스 대신에 마을 의사인 셰퍼드가 사건의 충실한 기록자로서 푸아로를 돕는다.

모든 사람들에게 동기가 있고 모든 이들이 의심스럽다. 가장 손쉽게 범인으로 지목되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무고한 사람이다. 애 여사 추리소설이 언제나 그렇듯,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람이 살인자로 밝혀진다. 사람들 모아놓고 푸아로가 사건 해설을 친절하게 자신의 추리력을 뽐내면서 들려준다.

이 소설은 살인-자살-살인-자살의 연속 구조가 흥미롭다. 푸아로의 마지막 사건 '커튼'에서 이 구조를 반복한다. 인과의 사슬이며 추리소설의 운명이다. 범인 잡기 놀이로 치부되는 추리소설에서 인간의 운명론이라니.

이 작품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전조로 보인다. 상황을 더욱 극단으로 몰아넣은 점을 뺀다면 기본 구조인 살인-자살 구성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과 같다. 스포일러가 되려나. 이렇게 말해도 범인 잡기는 쉽지 않으리라.

걸작이자 논란이 많은 소설이다. 

독자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때리는 반전을 주려면 철석같이 믿는 규칙을 깨야 한다.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말이다. 계란을 특별한 도구 없이 맨손으로 세워 보라. 이 말에 사람들은 절대로 알을 깨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얽매여 해내지 못한다. 결국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답은 간단했다. 모서리를 조금 깨면 된다. 깬 부분으로 세운다.

추리소설 독자는 책장을 열어 읽기 시작할 때부터 무조건 따르는 믿는 것들이 있다. 탐정은 범인이 아니다. 탐정을 제외한 여러 인물들 중에 한 명이 범인이다. 사건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범인이 아니다. 살인자는 이야기가 끝나 전에는 자살하지 않는다. 그래야 잡히고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있으니까.

크리스티의 걸작으로 불리는 작품들을 살펴보면, 대개 추리소설의 암묵적 약속을 사다리 걷어차듯 과감하게 어긴다. 절대로 사다리를 치우지 않으리라 믿었던 사람들은 난리가 난다. 이 서술 트릭이 아직도 지금도 통한다. 읽은 사람들 여전히 난리를 친다.

대개들 절대로 범인이 될 수 없는 사람은 빼고 답을 찾는다. 이러니 작가의 폭군적인 횡포에 당하고 만다. 나는 언제나 범인이 제일 아닐 것 같은 사람부터 찾는다. 절대 아니라고 여기는 것부터 의심한다. 이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러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생각한다. 범인은 맞추지만 과연 어떻게 그가 범인이 되었는지는 모르긴 마찬가지지만.

크리스티의 전기문에 보면, 작가는 언제나 소설을 완성한 후에 주변 지인들한테 읽힌 후 범인을 쉽게 찾아내면 범인을 바꿔서 다시 썼다고 한다. 그러니 범인을 못 맞춘다고 자책하진 마라. 못 찾겠게 썼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맞추려고 하는가.

크리스티가 만든 미스터리는 복잡하고 정교하다. 결과를 보니까 쉬워보일 뿐이다.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말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문장에는 문학적 수식이라는 거품이 거의 없다. 단순한 문장으로 계속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재치 있는 우스개를 넉넉히 종종 넣어서 읽는 재미를 더한다. 문장에 뿌린 양념은 웃음이다. 쉼표처럼 살인 사건의 범인 잡기라는 긴장감을 풀어준다.

크리스티의 미스터리는 내용상 그다지 큰 사건이나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한정된 장소에서 복잡다단한 인간관계의 사슬이 추적하며 누가 누구를 어떻게 죽였는지 짐작해 보는 재미는 독자의 취향에 호불호가 있다. 범인이 될 수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알아보고 기억하고 관찰한다. 어느 정도 끈기가 있어야 한다. 물론 책 읽기 자체가 어느 정도의 인내심이 필요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확신하고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누군가 다른 사람이 먼저 말하면, 이상하게도 화를 내며 부인하고 싶어진다." 아무리 진실이더라도 상대가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 예상되면 침묵하라.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을 누구한테 말할지 말지 안다.


영어원서로 완독한 후기

이 작품이 워낙에 서술 트릭으로 유명하다 보니, 누가 범인인지는 다들 기억한다. 반면에 전반적으로 보여준 용의자들의 비밀은 잊어 버린다.

남는 기억은 결과지만 읽는 재미는 과정이다. 자잘한 비밀들이 하나씩 밝혀지는 재미가 쏠쏠했다.

용의자 모두 모아놓고 진실을 밝히는, 푸아로 파이널 작렬은 언제나 최고의 즐거움이다. 계속 안 알려줌. 아직 때가 아님. 이러다가 끝에서 다 풀어준다.

끝까지 궁금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최강이다. 우리들 중에 살인자가 있다는 긴장감은 거의 대부분 기본값으로 만들어 놓는다.

서술 트릭과 과학기술 트릭이 있다. 우연인지,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도 그렇다. 다만, 이 소설에 나오는 기술은 아직도 쓰고 있다. 사라지지 않을, 과학기술 트릭을 써야 함을 명심해 본다.

2025.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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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의 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김남주 황금가지

메소포타미아의 죽음
유명우 해문출판사

Murder in Mesopotamia (1936)

메소포타미아 유적 발굴 현장에서 일어난 밀실 살인이다. 수수께끼 풀이식 추리소설이다. '연기의 신' 같은 말도 안 되는 설정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지낼 수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어떻게 못 알아 보지?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고 하지만. 이 때문에 좀 억지였다.

레더런 간호사가 수기 형식으로 사건을 기록한다. 헤이스팅스 대위와 재프 경감은 등장하지 않는다. 코믹 삼인방의 치고받기 개그를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쉽다. 푸아로는 사건이 일어난 후에 등장한다. 사건 현장에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살인 사건을 해결해달라는 의뢰를 받고서 가기 때문에 100쪽 넘게 읽어서야 푸아로를 만날 수 있다.
   
간호사의 눈에 비친 푸아로의 모습은 이렇다. "키는 165센티미터쯤 되고, 인상이 기묘하고 몸집이 통통했으며 몹시 눈에 띄는 콧수염에 달걀 같은 두상을 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희극에 나오는 이발사 같았다!"(127쪽)  

애 여사는 일부러 푸아로를 셜록 홈즈와는 정반대의 캐릭터로 만들었다. 푸아로는 증거 수집과 관찰을 통한 물적 추리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애 여사는 이런 방식의 추리를 쓰면 독자가 함정에 빠지도록 이야기를 구성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진술과 외모에서 드러나는 심적 추리에 집중한다. 

모두 살인할 동기가 있다. 모두 의심해야 한다. 푸아로는 소거법을 이용한다. 일어난 사건과 남겨진 증거에 제대로 맞는지를 하나씩 따지면서 범인을 찾아낸다. 그렇게 해서 멋진 마무리를 해내는 '푸아로 피날레'는 실제 현실에서는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가상 소설에서는 극적 효과가 뛰어나니까 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모인 사람들 중에 살인자가 있는데, 자기가 머리 좋다고 뽐내기 위해 목숨을 걸면서까지 범인을 그 자리에서 밝히겠는가. 한 번 죽이고 두 번 죽이고 세 번 죽인 살인자가 가만있겠는가. 

이 작품의 밀실 트릭은 알고 나면 화가 나서 근처에 있는 창문을 부셔버리고 싶을 것이다. 밀실 트릭 대부분이 단순하지만 그걸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콜럼버스의 달걀 같다. 알고 나면 쉽지. 그전에는 불가능해 보인다. 나는 이 책을 예전에 읽었었고 해당 트릭을 기억하고 읽었다. 우리 집 창문은 멀쩡하다. 햇살이 따사롭다.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밑도 끝도 없는 심연의 심리 묘사인 '도스토옙스키'식이 아니라 '실용 심리학'이다. 폐쇄적인 집단인 유적 발굴단에 매력적인 미인이 들어온다. 어떻게 될까? 발굴단장의 아내는 주변 남자들을 유혹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이내 차버리는 '치명적인 여인'이다. 주변 여자들의 질투가 하늘 높이 치솟는다. 

정교하게 만든 수수께끼 정통 추리물이다. 비스말라히 아르 라흐만 아르 라힘.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알라신의 이름으로. 사건 재구성으로 과거를 복원하는, 범죄 추리의 고고학을 즐겨라.


메소포타미아의 살인 영어원서 완독 후기

밀실 살인 트릭을 알고 읽었다. 이것이 소설의 핵심이자 충격이었다. 중학생 때 읽은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니. 나만 그런 게 아니더라.

범인이 자백하지 않았다면 이 범죄는 법의 심판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푸아로 탐정은 심리적 추리만 했을 뿐이고 물질적 증거로 범인을 확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심리 성격 분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는 지루한 편이라서 기억하는 독자가 드물다.

살인이 일어나고 푸아로가 초빙되는 식이라서 다행히 시작부터 그 짜증나는 초급 불어를 안 만날 수 있었다. 나중에 결국 보게 되는데 무시하고 읽었다.

이야기 끝 후일담에서 오리엔트 특급 살인(1934년)을 언급하고 있다. 출판이 메소포타미아의 살인(1936년)가 늦지만 시간순으로는 더 빠른 듯.

푸아로 파이널은 역시 재미있었다.

2025.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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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 살인 사건
The A.B.C. Murders (1936)
애거서 크리스티
김남주 황금가지
유명우 해문출판사
박순녀 동서문화사

예고 연쇄 살인 사건. 푸아로에게 도전장 편지가 날아든다. "이달 21일 앤도버를 주목하십시오. - ABC" 알파벳 순서대로 살인이 일어난다. A로 시작하는 장소에서 A로 시작하는 사람이 죽는다. B가 터지고 C가 실현된다. D에서는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ABC 씨가 잡히는데 푸아로는 그가 범인이 아니라고 한다. 도대체 범인은 누구인가?

박진감 넘치게 전개된다. 헤이스팅스의 1인칭 서술과 ABC 씨의 모습을 보여주는 3인칭 시점이 교차된다. 읽기 시작하면 애 여사 스타일에서 벗어난 사이코패스 범죄려니 싶다. 절대 아니지. 이런 식은 영국적이지 않다. 모든 것은 논리적 설명으로 해명되어야 한다. 다 읽고나면, 전형적인 애 여사님의 영국 추리소설이다. 서술 방식이 독자를 속이기 위한 장치임을 알아채는 것은 소설을 다 읽어서야 가능하다.

예고살인이 착착 진행되면서 범죄자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며 긴장감과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구성력이 훌륭하다. 푸아로가 이미 일어난 살인사건 관계자들을 수사팀으로 꾸려가면서 범인을 잡아낸다. 역시나 다들 모여라 하고서는 "범인은 너야!" 하고 꼭 찍어내는, 그 유명한 '푸아로 피날레'가 마지막을 장식한다.

중학생 때 이 소설을 처음 읽었다. 다시 읽으니, 중간쯤 읽었을 때 범인이 기억났다. 당시에는 범인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라서 뒤쪽을 읽었고 그래도 왜 범인인지 이해가 안 되서 다시 앞으로 가서 읽고 역시 또 궁금해서 다시 뒤쪽을 읽는, 이상한 독서였다.

이제 크리스티 반전 스타일을 워낙 잘 알아서 순진하게 속지 않는다. 독자가 범인을 도저히 예상하지 못하게 하려면 범인을 눈앞이 아니라 아예 코밑에 배치해야 한다. 그러면서 독자의 눈길을 명백하게 잘 보이는 쪽으로 몰아야 한다. 이러면 독자는 범인과 직접 관련된 것에 집중해서 읽게 되고 결정적 힌트는 대충 빨리 읽거나 건너뛴다.

다음에 읽을 '메소포타미아의 살인'도 중학생 때 읽은 기억이 있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범인을 알고 읽어도 재미있는 것은 뭘까. 정답을 못 맞히게 문제를 만들어내는, 글쓰기의 재미를 엿보는 재미다. 재미의 재미다.

오탈자
게신 → 계신
182쪽 ABC 살인 사건 황금가지 1판 6쇄 2017년

수법을 아는 상태에서 읽었다. 범인이 누군지는 모르고 읽었다. 그래서 푸아로 파이널을 재미있게 즐겼다. 그래 이 맛이지. 이 재미에 추리소설을 거듭 찾아 읽는 것이다.

타자기 지문은 좀 아니지 않나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추리소설 읽기 경력자라서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딱 감이 온다.

영어원서에는 푸아로가 하는 프랑스 어가 나오는데, 이게 은근 귀찮고 짜증난다. 모나미는 안 찾아 봐도 되지만 나머지는 해당 뜻을 불어 사전 검색해서 찾아야했다. 초반 읽다가 번역본으로 갈아탔다.

꿈의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2025.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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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전집 읽는 순서, 5대 장편소설, 작가 이름 국내 표기

열린책들 세계문학 총 26권

예전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25권짜리는 열린책들 세계문학 전집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권수는 총 26권으로 늘어났다. 기존에 한 권에 수록했던 '가난한 사람들'과 '분신'을 분리해서 2권이다.

문제가 하나 있다. 기존 25권짜리 전집은 작품이 시대 순으로 배열되어 있었으나 열린책들 세계문학으로는 이런 순서가 없다. 무작위다. 그래서 시대 순서대로 작품을 읽고자 하는 도스토예프스키 독자를 위해 예전 전집 순서대로 열린책들 세계문학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나열해 보았다. 

:: 알아둘 점 

1. 전기, 중기, 후기 시대 구분은 내가 한 것이다.
2. 제목 앞 번호는 열린책들 세계문학 번호다.

 

이상하게 전자책으로는 통독이 잘 안 되어서, 모두 종이책으로 구입해서 다 읽었네요. 그리고서 종이책은 중고서점에 모두 팔아버렸습니다. 자리를 너무 많이 차지해서요. 남은 건 전자책. 다시 통독할 날이 오려나 모르겠네요. 그때는 전자책으로 읽어 보려고요. 2017.11.14


📑 초기 작품들 (데뷰부터 시베리아 유형을 가기 전까지) - 전반적으로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경향이 짙다.

#1 
117 가난한 사람들

#2
116 분신

#3
128 뻬쩨르부르그 연대기 외
쁘로하르친 씨 /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 / 뻬쩨르부르그 연대기 / 여주인

#4
126 백야 외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 약한 마음 / 뽈준꼬프 / 정직한 도둑 /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 백야 / 꼬마 영웅

#5
124 네또츠까 네즈바노바


📑 중기 작품들 (사회로 복귀하고서 재기를 노리던 시기) - 코미디 풍자에 집중한다.

#6
123 아저씨의 꿈

#7
114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8
129 130 상처받은 사람들

#9
105 죽음의 집의 기록

#10
121 지하로부터의 수기

#11
131 악어 외
악몽같은 이야기 / 여름 인상에 대한 겨울 메모 / 악어

#12
97 노름꾼

📑 후기 작품들 (기술적 완성과 사색의 깊이가 더해진 시기) - 종교적 철학적 사상가 면모를 보인다.


#13
12 죄와 벌

#14
15 16 백치

#15
57 58 59 악령

#16
119 영원한 남편 외
영원한 남편 / 보보끄 / 예수의 크리스마스에 초대된 아이 / 농부 마레이 / 백 살의 노파 / 온순한 여자 / 우스운 사람의 꿈

#17
108 109 미성년

#18
29 30 31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도스토예프스키 5대 장편소설

죄와 벌, 백치, 악령, 미성년,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모두 후기에 집필했다. 미성년은 다른 작품에 비해 많이 상대적으로 별로였다. 

참고로, 국내에서 작가 이름 표기는 세 가지다.

도스토옙스키 - 외래어 표기법
도스토예프스키 - 외래어 표기법 이전 표기
도스또예프스끼 - 열린책들 출판사만 이렇게 표기했었다가 외래어 표기법 '도스토옙스키'로 쓰고 있다. 

결론. 도스토옙스키로 표준화된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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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전집 읽기 #13 죄와 벌
줄거리 독후감 느낀점 등장인물 첫문장
열린책들 큰글자판
 

:: 죄와 벌 첫 문장

"찌든 듯이 무더운 7월 초의 어느 날 해질 무렵, S골목의 하숙집에서 살고 있던 한 청년이 자신의 작은 방에서 거리로 나와, 왠지 망설이는 듯한 모습으로 K다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11쪽)

첫 문장입니다. 석영중의 해설로는 이 한 문장에 시간, 공간, 사람, 움직임이 다 들어갔다고 합니다. 완벽한 문장이니, 방과 걸음의 의미니 하는 것들은 해석을 하던데요. 작가가 애써 의도적으로 그런 상징이나 의미를 생각해서 그렇게 썼다고는 생각진 않습니다. 쓰다 보니 어쩌다 그렇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죠.

:: 죄와 벌 줄거리

죄와 벌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중에 유별나게 잘 알려졌다. 학교에서 읽기 과제로 많이 내서 그런지도. 느낀 점 써오라고 하니 줄거리 써야 하고 독후감을 내야 하니까.

문제는 막상 이 책을 읽으려고 하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대부분이 그런 편이지만, '죄와 벌'은 술술 읽히지 않는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주인공이 내내 뭐라뭐라 계속 혼잣말로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기존 소설 독법 입장에서는 참으로 불친절한 서술이다.

줄거리라고 해 봐야 딱히 사건이랄 것이 없다. 핵심 사건만 추리면, 청년이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후 소녀 가장한테서 감동을 받아 자수하고서 감옥살이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전부다. 독후감 과제 숙제 때문에 줄거리를 써야 한다면 이보다는 더 많이 써야하겠지. 열린책들 홍대화 번역본에는 하권 끝에 옮긴이가 쓴 다섯 쪽에 달하는 줄거리가 붙어 있다.


:: '좌와 벌'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이 많은 분량의 소설을 읽어낸 사람이라면 기대감이 클 것이다. 뭔가 대단한 결말을 바랄 것이다. 하지만 끝을 읽으면 허탈할 수 있다. 어쩌면 쓰다가 에라 모르겠다고 하고 이야기를 멈춰 버리는 듯한 인상마저 준다. 

'죄와 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사건 전개 줄거리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집중해서 다시 읽어야 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소설 '죄와 벌'에서 이야기하는 살인은 철학적 의미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의미를 넘어선다. 그래서 소설이다.

주인공 청년 로쟈가 노파를 살인하는 것은 자기 논리적으로는 정의 실현이었다. 하지만 '정의 실현' 후에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양심의 괴로움에 사로잡힌다.

그런 그를 소냐가 부활시킨다. 요한복음에서 라자로의 부활 부분을 읽는 장면은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부분이지만, 소설의 주제를 위해서는 꼭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소냐는 소설 후반부에서는 성녀에 가까운 모습으로 묘사된다.

소설 '죄와 벌' 마지막 부분에서 주목해 볼 문장은 다음과 같다. 열린책들 홍대화 번역본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는 다만 느꼈다.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고, 의식 속에서 무언가 전혀 다른 것이 형성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809쪽

"새로운 이야기, 한 사람이 점차로 소생되어 가는 이야기, 그가 새롭게 태어나는 이야기, 그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 가는 이야기, 이제까지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현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810쪽

이성과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참모습은 정신적 부활로 드러난다. 사람의 삶은, 그리고 영혼은 이론으로 간단하고 명료하게 정리하고 처리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영혼의 순수함을 열정적으로 집요하게 파고든다. 광기에 사로잡힌 영혼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도 선생이 '죄와 벌'에서 펼쳐보이는 심리 묘사는 놀랍다. 읽는 이가 그 등장인물이 된 기분이 든다.


:: 소설 '죄와 벌' 등장인물 정리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 소설을 등장인물 이름 때문에 읽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일부러 등장인물 이름을 따로 적어두거나 아예 책에 맨앞에 정리해서 적혀 있다. 그래도 헷갈리고 어려운 이유는, 러시아 이름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기 못한 탓이다.

러시아 사람의 이름은 총 세 개가 있다. 영어권 이름이 세 개 있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똑같진 않다. 영어 이름에서 가운데 이름, 즉 미들 네임은 세례명인데 거의 안 쓴다. 하지만 러시아 사람의 중간 이름은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이고 일상에서 자주 쓴다. 오히려 마지막 이름, 라스트 네임은 미들 네임에 비해 자주 쓰지 않는 편이다. 라스트 네임은 여자가 결혼할 경우 남편의 성을 따른다. 이 점은 영어 이름과 똑같다.

죄와 벌 주인공의 이름은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꼴리니꼬프다. 로마노비치는 아버지 이름이다. 여성은 오브나, 예브나를 붙여서 만들고 남성은 오비치, 예비치를 덧붙여서 만든다.

그리고 퍼스트 네임은 종종 애칭을 쓴다. 이 점은 영어 이름이랑 비슷하다. 로지온의 애칭은 로쟈, 로지까이다.

주요인물만 정리하겠다.

로쟈, 로지까,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꼴리니꼬프 : 주인공
뿔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라스꼴리니꼬바 : 주인공의 어머니
두냐, 두네치까, 아브도찌야 로마노브나 라스꼴리꼬바 : 주인공의 여동생 

알료나 이바노브나 : 전당포 주인
리자베따 이바노브나 : 전당포 주인공의 이복동생
나스따시야 빼뜨로브나 : 주인공 하숙집의 하녀

드미뜨리 쁘로꼬비치 라주미힌 : 주인공의 친구
조시모프 : 주인공의 의사

뽀로피리 빼뜨로비치 : 주인공에게 자수를 다그치는 예심 판사

아르까지 이바노비치 스비드리가일로프 : 주인공의 여동생 두냐에게 흑심을 품은 지주
마르파 빼뜨로브나 스비드리가일로바 : 지주의 아내

뽀뜨로 빼뜨로비치 루쥔 : 두냐의 약혼자 

세묜 지하로비치 마르멜라도프 : 퇴역 관리
까쩨리나 이바노브나 마르멜라도바 : 퇴역 관리의 두 번째 아내
소냐, 소네치까, 소피아 세묘노브나 마르멜라도바 : 퇴역 관리의 첫 번째 아내가 낳은 딸


:: 영문 위키에서 알아낸, 흥미로운 사실 - 노란색의 상징은 고통 받는 상태 혹은 정신병이다

정당포 주인 알료나 이바노브나의 방 벽의 벽지 색은 노란색이다.
루쥔의 반지 색은 노란색이다.
로쟈의 다락방 벽 색은 노란색이다.
소냐의 매춘 신분증/허가증의 색은 노란색이다.
러시아 어로 정신병원을 노란색 집이라고 부른단다.

:: 열린책들 출판사에서는 왜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로 표기하는 것일까?

러시아 원음 발음에 가깝게 우리말로 표기한 것 같다.

우리말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도스토옙스키'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많이 쓰는 표기는 '도스토예프스키'다.


※ 열린책들에서 큰글자판이 나왔다. 
 

판형은 기존과 동일하다. 다만, 본문 글자 크기가 2포인트 커져 12포인트다. 그래서 쪽수가 30% 늘어났다. 물론 인쇄 내용 자체는 똑같다.

 

:: 양심의 불꽃, 여윈 말 이야기

마흔, 도스토옙스키 읽기

의도한 것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열린책들의 전자책 '세계문학 e컬렉션 세트(전170권)'가 도스토옙스키 전집(총 26권)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세운 목표가 도스토옙스키 전집 독파다. 155 세트를 산 후에 15 업그레이드 팩 세트를 사서야 비로소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완성했다. 총 스물여섯 권이다.

2016년 12월 27일 현재에는 열린책들 세계문학 전집 세트가 180권이 되었고 도스토옙스키 전집(총 26권)을 포함하고 있다.

2017년 1월 18일 현재,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만 묶어서 전자책 세트로 팔고 있다. 종이책으로는 도스토옙스키 전집은 아직 안 팔고 있다. 그냥 낱권으로 26권을 사면 되겠다.

나이 마흔이 넘으면 자신이 더는 젊지도 그렇다고 늙지도 않았음을 깨닫고 의미있는 일을 해보려고 한다. 늙을수록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 촉박할수록 신중한 법이니, 독서도 신간보다는 고전에 손이 간다.

나이 드니 고전이 더 깊게 더 많이 이해된다. 머리가 아니라 경험으로 이해한다.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세상 부조리와 더러운 년놈들과의 타협을 피할 수 없다. 그렇게 쌓인 독을 고전 읽기로 해독하자. 

죄와 벌, 양심의 불꽃

소설 '죄와 벌'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여윈 말을 억지로 짐수레에 묶어 사람들이 학대하는 부분이다. 언뜻 보기에 이야기의 전개와 큰 관련이 없는 듯 보일 수 있으나 이야기 전체를 이끄는 중심 감정이다. 소냐의 어머니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소냐에게 하는 말("잘 있어라, 이 불쌍한 것...! 여윈 말을 너무 부려 먹었구나...!")로 다시 이 작은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라스꼴리니꼬프가 폭리를 취하는 전당포 노파를 죽이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고 '이론적 정의 실현 살인'을 실천에 이르지만 양심의 열병에 걸리고 만다. 그의 살인은 논리적으로는 옳지만 삶은 그렇게 논리적으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논리적으로만 보자면 삶은 모순이며 오직 죽음만이 타당하다.

로쟈의 그림자로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있다. 그는 갈등 많은 양심 대신에 명쾌한 욕망을 택한다. 욕망의 끝은 충족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로쟈의 여동생 두냐의 사랑을 얻지 못하자 그는 논리적인 귀결로 더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반면 로쟈는 소냐의 사랑이 있고 주변 사람들의 사랑이 있어 삶으로 나아간다.

양심의 괴로움 속에서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은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다. 그들은 논리적이지 못하고 상식적으로 수긍이 안 되는 행동을 한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창녀 노릇을 하는 소냐는 미친년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소냐를 무자비하게 착취할 뿐인데도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돈을 벌어다 갖다 바친다.

로쟈는 자기가 가진 돈 전부를 소냐의 아버지 장례 비용으로 쓰라고 줘 버린다. 일부가 아니라 전부다. 우리의 정상적인 선행은 자기의 일부를 주고서 사회적 존경과 인기를 얻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재산 전부를 남을 돕기 위해 쓴다고 하면 미쳤다고 하지 제정신이라고 하지 않는다.

도스토옙스키 소설에서는 등장인물의 광기 어린 혼잣말이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쏟아진다. 순수한 마음과 현실의 부조리가 대립하면서 정신은 비명을 지르고 행동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극한 상황에 처하자, 양심의 울부짖음이 불꽃처럼 타오르며 삶의 희망을 만든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은 새로운 삶의 부활을 예감한다. "그는 다만 느꼈다.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고, 의식 속에서 무언가 전혀 다른 것이 형성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성경 요한복음(번역서는 '요한의 복음서') 11장 나사로(번역서는 '라자로')의 부활 이야기를 억지스럽게(뜬금없이 로쟈가 소냐한테 성경 책을 읽어달란다.) 추가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소설 '죄와 벌'이 추구하는 것은 영웅주의 무신론이 아니라 구원과 자기 희생의 기독교 유신론이다.

로쟈는 살인으로 마치 자신이 죽은 것처럼 느끼는데 자수를 하고 소냐의 사랑을 받으면서 부활을 시작한다. 소설 '죄와 벌'은 바로 이 정신적 부활을 강조하며 끝난다. "새로운 이야기, 한 사람이 점차로 소생되어 가는 이야기, 그가 새롭게 태어나는 이야기, 그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 가는 이야기, 이제까지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현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2014.04.28

죄와 벌 세트 - 전2권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학수 옮김/문예출판사

죄의식, 욕망, 양심의 심리소설

인간의 불안, 갈등, 슬픔, 기쁨, 절망, 희망, 특히 죄의식, 욕망, 양심을 심연의 깊이로 보여주는 심리소설이다.

가난한 대학생이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다는 범죄소설이지만 추리소설로 보는 이는 드물다. 범죄의 스릴이나 반전의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 본성을 파헤치는 '철학소설'에 가깝다.

사건 전개를 치중해서 읽어내고자 하는 이들은 도스토옙스키 소설이 대체로 그렇듯 등장인물들의 장광설 독백에 질려서 더 읽기를 포기한다. 반면 읽는 이의 심장을 움켜쥐고 마구 흔들어대는 문장의 미칠 듯한 폭주에 사로잡히면 도저히 책에서 눈을 떼기가 불가능하다. 도스토옙스키에 중독되면 커피 마시듯 읽어 열 번 스무 번 백 번 읽는다.

이미 줄거리와 사건 전개를 아는 상태에서 다시 읽어 보니, 주인공의 불안 심리가 수술용 매스처럼 정확히 날카롭게 묘사해 나아간다. 경악스러운 문장이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냐. 

이 옛날 소설이 오늘날까지 폭탄 같은 감동을 주는 이유는 뭘까. 자기 아내의 양말까지 팔아서 술을 마시는 사내. 그래 이건 가난을 과장해서 만든 이야기에 불과하지. 정원 감원 때문에 실직한 가장이 허름한 술집에서 넋두리를 해댄다. 요즘 얘기잖아?

지독한 가난에 빠져 정신이 돌아버린 사람들을 집요하게 그리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처음에는 낡아빠진 옛날 이야기라는 인상을 받지만 나중에는 오늘날 이야기로 읽힌다. 경제불황과 장기실업을 피할 수 없는 요즘에 사람다움을 유지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살인과 자살, 학대와 자학은 극단 상황에 놓인 인간이 자주 보이는 행태다.

김학수 문예출판사, 한문투 옛날 번역

2013년 4월에 나온, 문예출판사 김학수 번역본은 옛날 번역이다. 도스토옙스키 150주년인 1971년에 출간한 책을 다시 편집했다. 옛날에나 썼던 한자어가 종종 나와서 읽기 거북할 수 있다.

열린책들 홍대화 번역과 비교해 보니, 정확성에서도 떨어진다. 읽는 데 큰 지장을 주진 않지만 이런 거다.

홍대화 : 1베르스따 밖에서도
김학수 : 1킬로미터 밖에서도

홍대화 주석에 보면, 베르스따는 미터법 시행 전 러시아의 거리 단위란다. 1베르스따는 1.067킬로미터다.

홍대화는 우리말 위주고 김학수는 한문투다. 읽으면 느낌이 다르다.

홍대화 : 7백30발자국이었다.
김학수 : 730보였다.

너무 사소한 거 아니냐고?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렇게 중얼거린다.

홍대화 : 사소한 것, 사소한 것이 중요하다……!
김학수 ; 사소한 것, 사소한 것일수록 중요하다!

2015.01.01

죄와 벌 - 상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은이), 홍대화 (옮긴이)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3부 5장 예심판사 뽀르피리와의 심리 대결 묘사와 3부 6장 주인공 로쟈가 악몽에 빠지는 장면이 압권이다. 사람이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니, 놀랍다. 도선생은 천재다. 최고다.

2018.11.5

죄와 벌 - 하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은이), 홍대화 (옮긴이)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횡설수설, 쓸데없는 말, 난데없이 등장하는 권총. 소설로의 이성적 논리는 내팽개치고 열광적 광기로 써내려간 글이다. 로쟈는 끝까지 양심의 가책이나 반성이 없다. 결말은, 로쟈가 소냐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냐는 성녀처럼 보인다. 소냐의 사랑이 로쟈를 구원한다.

2018.11.9

열린책들 번역본 전자책 열어 봤더니, 로쟈가 로댜로 나온다. 왜 이러는지. 오탈자나 잡지. 

202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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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독 - 문학 비평의 실험 ㅣ 정본 C. S. 루이스 클래식 22 
C. S. 루이스 (지은이), 홍종락 (옮긴이) | 홍성사 | 2017년 7월

‘나니아 연대기 - 사자와 마녀와 옷장‘을 읽은 지금에서는 이 작은 책자가 새롭고 흥미롭게 읽혔다. ˝저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동물들에게 대부분의 아이들보다 훨씬 더 많이 매료된 상태였고˝(24쪽)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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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토끼의 만화 스토리 매뉴얼 1 2 
마사토끼 (지은이)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9년 10월

웹소설 창작자에게도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책이다. 유용하고 간결한 도움말이다. 작가의 체험담은 이 책의 보물이다.

소설 창작자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다. 스토리 작가로서의 일은 소설 쓰기에서 이야기 짜기 기술이라면, 작화가로서의 일은 소설 쓰기에서 묘사와 서사의 기술이다. 컷은 소설에서 하나의 단락, 장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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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은이), 곽복록 (옮긴이) | 지식공작소 | 2014년 2월

역시 슈테판 츠바이크다. 자서전이지만 전기문에서 보여준 글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로댕과의 만남 에피소드는 소설 같다.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고 예술가의 열정을 찬미하는 글은 신비로운 수정체처럼 매혹적인 광휘를 내뿜는다. 전자책의 오탈자는 좀 그러네. 중간중간 사진 보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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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먼 윌스 크로프츠 지음
오형태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
2003년 1월 발행


천재적 탐정이 나오는 추리물과 달리, 일상적인 수준의 지능과 능력의 형사가 나온다. 여기서 호불호가 갈린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딱히 없다. 통이 주인공이랄까. 시체와 금화가 담겨져 추리의 대상이 된 후 계속 주목하게 된다.

리얼리즘 미스터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착각 속에서 추리 추적에 참여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고전 명작으로 불리는 이유다.

용의자가 두 명밖에 없다. 동기와 알리바이 확인이 명확하진 못하다. 심심한 편이다. 박진감이나 스릴감이 없다. 무미건조한 벽돌쌓기 하는 기분이다.

탐정 고용해서 알리바이 깨는 게 핵심이었다. 범인과 범행 과정은 변호사가 추리해 버려서 당혹스러웠다. 평범한 지능의 독자라도 추리할 수 있을 정도라서 놀랍지도 않았다.

타자수가 안 예뻤으면 어쩔뻔했을까. 후반부는 대단히 아쉽다. 이 책 읽으라도 추천 못하겠다 나는.

202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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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2
다섯 마리 아기 돼지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
황금가지 펴냄
종이책 2007년 발행 2013년 개정판
전자책 2014년 발행 2022년 업데이트

회상속의 살인
이가형 옮김
해문출판사 펴냄
종이책 1998년 10월 발행

Murder in Retrospect (1942) 미국판
Five Little Pigs (1943) 영국판

'다섯 마리 아기 돼지'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 중 예외적인 작법을 썼다. 애증의 거미줄 속에 살인 수수께끼가 있고 푸아로가 짜잔 놀라운 반전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여전하지만, 과거의 사건을 용의자들의 진술만으로 재구성하여 진실을 밝혀낸다는 점에서 이색적이다.

이 책 제목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동요를 이야기의 뼈대로 차용해서 그렇게 붙인 모양인데, 이야기 전개와 별 상관은 없다. 애써 관련이 있다고 한다면 고작해야 유력한 용의자가 다섯 명이라는 점 정도다. 미국판/해문 제목이 소설 내용과 잘 어울린다. '회상 속의 살인(Murder in Retrospect)'이다.

별다른 트릭이 없고 독살한 것이 뻔히 드러난 판국에서 단서는 오로지 그때 그곳에 함께 있었던 용의자들의 진술뿐이다. 그것도 16년이 지난 일을 기억해내며 자기 입장에서 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진술에서 과연 살인범을 잡아낼 수 있을까.

같은 살인 사건이지만 사람마다 다르게 진술된다. 이 설정을 천재적으로 써내려간 작가가 있었으니, 아쿠다카와 류노스케다. 단편 ‘덤불 속’이다. 영화 ‘라쇼몽’으로 더 잘 알려졌다. 애 여사의 이 작품도 같은 설정이라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읽어 보니 기대만큼은 아니었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문학의 천재는 아니었다. 인물의 심리를 깊게 파고들지 않고, 묘사력이 훌륭해서 읽으면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은 문장력도 없다. 정교한 추리게임 오락구조물을 만드는 데 천재였을 뿐이다. 

이 소설의 후반부 반전에 반전은 놀라웠다. 기교의 반전이 아니라 심리의 반전이었다. 결과적으로, 살인자는 살인으로 심리적으로는 자신을 죽이는 비극에 처한다.


황금가지 전자책으로 구입해서 다시 읽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이야기 공학이 멋지다. 세세하게 가공한 솜씨는 역시 미스터리 소설의 장인임을 증명한다. 케롤라인 크레일의 모습을 그려내는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인물의 깊은 감정까지는 나아가지 않으며 중점적으로 묘사하지도 않는다. 추리소설 범죄 수수께끼 장르 틀 안에서 자제한다.

이야기 기술력은 '예술 문학'이 아니다. '기술'이다. 반전에 반전을 만들면서 세세한 것들이 다 들어맞아서 결론을 제시하는 기교다. 바로 이것이 애 여사의 매력이다.

추리소설은 글의 목적이 범죄 수수께끼다. 따라서 인물의 감정을 깊게 파고들거나 세세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그것이 목표 지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차적이다. 범죄 관련 심리적 상태까지가 묘사의 한계다. 더는 나아가지 않는다. 벗어나기 시작하면 예술이고 문학이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아무도 '추리소설'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범죄는 있으나 수수께끼 제시와 그 해결이 글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역이 있어서 출판사에 제보했다. '배다른 여동생'이라고 나오는데, 아버지가 다른 여동생이다. 본문에도 나온다. "두 사람은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가 달라서요."

2021.11.01

전자책 관련 수정이 있었다.
1. 제보한 오역이 수정된 것을 확인했다. '이부 여동생'으로 올바르게 나온다.
2. 표지가 바뀌었다. 본래는 한글 번역 제목이 크게 나오고 영어 원서 제목이 없었었다. 이제는 영어 제목이 크게 나오고 그 밑에 한글 번역 제목이 작게 보인다. 종이책 표지와 동일하게 한 것이다.

수정 전
수정 후

2024.06.18

말의 오해로 반전을 만들었다.
심리적 일치/불일치를 추리의 방법으로 이용했다.
짧고 강렬한 마무리가 인상적이었다.

전자책에 오탈자
바램 → 바람
바래요 → 바라요

2025.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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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독서 결산 및 한 줄 독후감

죽은 자와의 결혼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김석환 옮김 / 해문출판사 / 2002년 3월
다시 읽으려고 하니, 문장이 술술 읽히는 편이 아니었다. 같은 문장, 같은 문단을 처음과 마지막에 반복하고 있다.

한국 괴물 백과
곽재식 지음, 이강훈 그림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8년 12월
한국 오컬트 추리소설을 써 보면 어떨까 싶어서 봤는데, 역시나 나랑 오컬트는 안 어울리는 모양이다. 노잼.

바람이 분다, 가라-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대화문을 왜 따옴표 처리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지루하고 재미없다. 국내작가 소설은 영 내 취향이 아니다.

처칠의 검은 개 카프카의 쥐- 우울증은 어떻게 빛나는 성취가 되었나
앤서니 스토 지음, 김영선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2월
상상은 불만에서 비롯된다. 실현되지 못한 소망을 공상에서 이루는 것이다. 머리말만 읽음. 본문은 위인전?

[eBook] 황금가지 1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지음, 박규태 역주 / 을유문화사 / 2022년 9월
앞 몇 쪽 읽고 말았다. 흥미를 못 느끼겠다. 이해도 안 되고. 그 황금가지가 뭔지만 알고는 읽기를 중단함.

[eBook] 녹나무의 여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8월
시집 팔고 독후감까지 요구하는, 당돌한 소녀. 팔리지 않고 읽히지 않는 시는 의미가 없지.

[eBook] 녹나무의 파수꾼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4월
구질구질한 가족사. 비호감 주인공. 소원 나무 이야기는 안 알려줌. 초반 고구마 연속. 읽다가 포기했다.

숨겨진 건 죽음
앤서니 호로위츠 지음, 이은선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8월
두 번 반전. 허나 쓸데없이 꼬아놓은 게 많아서 좀 그랬다. 다음부터 이 작가는 거른다.

Posted by love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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