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인터넷 전자사전 시대에도 나는 왜 이런 두툼한 종이 사전을 고집하는 것일까. 나는 조카의 전자 사전을 써 보았다. 내 컴퓨터에는 사전이 있어서 글을 쓸 때 종종 마우스 포인터를 글자에 갖다 대서 단어의 뜻을 알아낸다. 나도 당신처럼 전자 사전과 컴퓨터 사전을 쓰고 있고 그 편리함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종이 사전을 샀고 주로 이 사전으로 단어를 찾는다. 2700쪽(부록과 일러두기를 제외한 단어 수록 부분만)이 넘는 이 사전을 쓴다. 두께가 내 팔뚝 만하다. 그럼에도 무게는 가벼운 편이다.

편리함이 언제나 편안함은 아니다. 편리하자고 한다면 걷는 일은 당장 중단해야 할 것이다. 산책은 편리함을 위배하는 가장 멍청한 짓일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걷는다. 평온함을 위해서 걷는 것이다. 나에게 종이 사전, 특히 이 국어 사전을 펼쳐 보는 일은 산책이다. 빙 둘러서 가는 산책인 것이다. 단어를 찾아 가는 도중에 생각을 한다. 이런 뜻일 것 같은데 아닌가 저런 뜻인가. 찾은 단어의 앞뒤에 있는 단어도 살펴 본다.

그동안 동아참국어사전을 썼다. 아무래도 비교가 된다. 동아사전의 장점은 비슷한 단어의 풀이(엔담풀이)와 백과사전식 설명(몇몇 단어는 간략한 그림으로 설명한다.)이다. 초등학생 조카가 초등학생용 국어사전을 갖고 있었는데, 정작 찾는 단어가 사전에 없다며 내가 쓰는 참국어사전을 빌려 가곤 했다. 동아사전은 학습용 사전이다. 엣센스 사전을 산 후에 동아사전은 조카한테 줬다. 가장 필요한 사람한테 주는 게 옳다.

엣센스국어사전에는 앞서 말한 동아참국어사전의 장점이 없다. 그림 설명도 없고, 비슷한 단어 풀이도 없다. 설명은 간결하고 예문은 짧다. 썩 친절한 사전은 아니다.

이 사전의 감수자였던,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희승의 말을 인용해 보면 이렇다. "사전은 우선 간명하고도 광범하여야 되며, 알찬 가운데 간편함을 잃지 말아야 하고, 복잡한 속에서 본연의 순수성을 지녀야 할 것임은 본인의 사전 편찬에 임하는 확고한 신념이다." 그의 신념대로 이 사전은 2006년 제6판에서도 그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런 특징이 당신 취향에 맞는다면, 그리고 단어 산책 놀이에 빠진 활자 중독자라면 이 사전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이 또 있으랴.

충고: 똑딱 단추의 금박은 벗겨지기 쉽다. 그러니 붙어 있는 비닐을 절대로 떼지 말고 쓸 것!
재미: 검은 가죽 장정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성경책으로 오해한다.
크기: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펼친, 남자 어른의 커다란 손바닥만 하다.

Posted by love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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