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Slaughterhouse-five (1966년)
커트 보니것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이 소설의 제목은 세 개다. 제5도살장(Slaughterhouse-5), 소년 십자군(The Children's Crusade), 죽음과 억지로 춘 춤(A Duty-Dance with Death). 독자가 마음대로 골라잡으면 그만이다.

커트 보네거트는 미국의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다. 미국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전세계 젊은 독자들도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에 열광하고 있다.

[제5도살장]은 그의 대표작으로, 작가 스스로도 A학점을 매긴 작품이다. 그의 장기인 블랙 유머와 SF기법을 현란하게 표현했다.

이 작품의 내용은 지은이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보네거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소총수로 참전했다. 

그 전쟁 중에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독일의 작센 지방으로 끌려가 드레스덴의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이 포로수용소에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이 가해졌는데, 그는 용하게 살아났다. 옛날에 도살장으로 쓰였던 포로수용소 건물의 지하 방공호가 깊었기 때문이다. 옛날에 도살장이었던 곳에서 폭격을 피해 살아나다니, 정말 블랙 유머 같지 않은가.

아름다운 도시 드레스덴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한 것을 눈으로 직접 본 작가는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그 체험을 글로 쓴다는 것 자체가 공포였으리라. 그러나 그는 그 공포를 유머로 이겨내며 소설로 쓴다. 그 글이 바로 이 작품 [제5도살장]이다.

이 작품은 과거, 현재, 미래가 질서 정연하게(?) 뒤죽박죽으로 전개된다. 또 SF 기법과 포르노 소설 기법으로 독자를 웃기는데, 정말 못 말릴 정도다.

인간의 허위의식과 겉멋만 든 진지함을 꼬집는 독특한 유머가 가히 천재적이다. 이 작가의 유머는 우리의 상상을 넘는다. 트랄화마도르 인(외계인)을 등장시켜 인간을 풍자한다. 예수도.

이 작품 어디를 봐도 심각하고 진지한 표현은 없다. 가벼운 표현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한다. 그러나 그런 가벼운 유머 뒤에 숨겨진 작가의 고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소설의 바탕에는 작가의 어두운 체험(전쟁 체험)과 인류 미래에 대한 종말론적 시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문장, '뭐 그런 거지'. 나는 이 말이 나올 때마다 웃었다. 작가도 그 문장을 쓰면서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웃음과 그의 웃음에는 차이가 있다. 작가의 웃음은 전쟁의 공포와 인류의 어두운 미래를 이기려는 안타까운 노력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의 웃음은 울음의 다른 표현이다. 울음 같은 웃음이다. 작가 스스로 말하길, "울 수 없으니까 웃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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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퀘이크]
커트 보니것 지음

유정완 옮김

문학동네 펴냄

2022년 10월 발행

 


커트 보네거트의 마지막 장편소설? 마지막 회고록 같다. 마크 트웨인의 자서전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이 할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신다. 이 작가를 처음 대하는 독자라면 이 책부터 읽지 않는 것이 좋다. 우선 그의 다른 책들을 읽은 후에 이 책을 읽는 것이 순서다. 

보네거트의 쓰는 방식이 워낙 독특해서 주변 사람들의 평가가 극과 극이다. 그의 블랙 유머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 하고 이해한다고 해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국내에 그를 좋아하는 독자가 의외로 많다. 이 사람 책이 보이면 무조건 집어서 읽거나 팬 페이지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에서 그의 인기는 스티븐 킹에 맞먹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 ‘패밀리 맨’에서 니콜라스 게이지가 커트 보네거트의 책(제목이 뭐였더라. 고양이 요람?)을 읽는 모습이 보인다. 참고로,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스티븐 킹의 ‘미저리’를 해리가 읽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다고 할 줄거리가 없다. 작가의 단편적인 생각, 기억, 사상을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줄거리가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신기한 일이다.

그가 예전부터 자주 주장하는 대가족론이 나온다. 그의 그런 생각은 낭만주의일 뿐이다. 낭만주의를 비판하는 것만큼 바보스러운 일도 없다. 그래도 하자면, 그가 한국에 살았다면 과연 그 대가족론을 계속 주장할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인류학 석사 논문이 거절당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그랬던 그가 시카고 대학에서 문화인류학 석사 학위를, 인디애나 대학에서 명예 인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塞翁之馬. 도대체 삶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Life goes on! 아카데미즘? 개뿔!

이 책은, 이 책을 쓸 당시 죽은 형에 대한 추억으로 마무리한다. "고상하고 품위 있었다." 자신이 젊었을 때 벌어진 어처구니없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일이 적힌 편지가 이 책을 쓴 동기다. 책 맨 끝에 형과 찍은 사진이 있다. 1997년 발표작이다. 출간 후 소설가로서 은퇴를 선언했다.

언제나 그랬듯, 웃긴가요? 예. 웃깁니다. 딩동댕!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울거나 웃는 것뿐이라고. 울면서 웃는, 그의 파멸적 웃음은 씁쓸하면서도 유쾌하다.

그가 거짓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이유로 지옥에 갔다면 웃었을 것이고 그가 착한 심성으로 살았다는 이유로 천국에 갔다면 울었을 것이다.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에 있다면, "다들 여기 있군그래. 내 이럴 줄 알았어." 그렇게 너스레를 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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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열린책들 펴냄
2016년 6월 발행

 



딱 1장까지만 재미있었다.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 이거지 이거야. 하나의 이야기 노아의 방주를 시대순으로 변주해서 보여주는데 지루했다.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읽고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아쉽다. 이건 아니지 아니야.

소설에서도 골드베르크 변주곡처럼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줄리언 반스가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소설 형식은 흥미로웠는데, 정작 이야기 자체는 재미가 없었다, 나로서는.

그러고 보니, 어쩌면 골드베르크 변주곡도 첫 아리아만 듣기 좋아하고 나머지 변주곡들은 딱히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도 있겠다 싶었다. 나는 변주곡 모두를 흥미롭게 재미있게 들었지만.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자. 요즘 다시 독서에 재미를 붙이면서 드는 생각이다. 책을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고 전부 다 이해할 할 필요는 없다. 그럴 책이 있고 아닌 책도 있다. 더구나 즐거움을 위해서 읽는다면, 애써 무리해서 읽어내지 말자. 인생은 짧고 읽을 책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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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의 앵무새 Flaubert's Parrot (1984년)
줄리언 반스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을 논할 때 빠짐없이 나오는 소설이 바로 이 '플로베르의 앵무새'다. 워낙 유명해서 모르고 있으면 책하고는 담 쌓고 지내는 사람일 것이다. 아니면 소설 픽션은 아예 안 읽는 독서가일 것이다.

아직 안 읽어 봤더라도, 플로베르의 평전 형식을 띤 소설이다 정도는 어디선가 읽거나 들었을 것이다. 문제는 막상 실제로 읽기 시작하면서 발생한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읽기 어렵다고 하소연을 한다. 간신히 읽어냈다고, 플로베르 관련 배경 지식이나 그의 소설들을 읽은 후에 다시 도전하겠다는 독후감도 보인다.

어이가 없었다. 너무들 진지하게 문학하는 독서를 하려고들 하는 거 아닌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를 몰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잡담 농담 평전 수필 소설이다. 아무 페이지나 읽어도 된다. 아무 쪽에서나 읽기를 중단해도 딱히 아쉬울 건 없다.

읽다가 말다가 읽다가 말다가는 반복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열 번 이상은 분명하다. 이야기의 전반인 분위기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식이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미라는 미케리누스의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았다."(147쪽) 아씨, 어쩌라고 이 양반아.

딱히 줄거리라고 할 것이 없고 궁금한 다음도 없는데, 아! 이런, 계속 야금야금 더 읽고 싶어지는 거였다. 왜 이러지? 희안하네. 어느새 다 읽어 버린 나 자신한테 배신감을 느낄 지경이었다. 어, 이건 아니지.

천박한 음담패설이 있는가 하면 심오한 통찰이 써 있었다. "삶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에 대해 나는 놀라지 않는다. 책은 삶을 의미 있게 한다. 유일한 문제는 책이 의미를 부여하는 삶은 당신 자신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이라는 점이다."(209쪽)

키득키득 웃다가 으잉 황당하다가, 이런 저질하다가 와 놀랍군 하다가, 이것저것 하다가 어느새 더 읽을 문장이 없은 거였다. 정말 맛있는 짬뽕이었다.

종이책 읽기는 너무 고역이긴 했다. 뭐가 이렇게 빡빡해. 전자책으로 읽는 게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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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송어낚시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비채 펴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암호를 해독하는 기분이었다. 애매모호한 언어의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마침내 구조를 요청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옮긴이가 적어놓은 친절한 주석을 따라 끝까지 다 읽었다.

'미국의 송어낚시'는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대표작이다. 김성곤의 표현을 빌면, 1960년대 미국 대학생들이 이 책을 경전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녔을 정도로 유명했다. '송어낚시'라는 단어를 은유로 쓰면서 물질문명에 찌든 미국사회를 풍자했다. 은유의 기교를 최대한 발휘했다. 한 단어가 의미할 수 있는 뜻을 무한대로 펼쳤다.

송어는 꿈이다. 

순수한 꿈이다. 

아름다운 꿈이다. 

 

송어는 물질문명과 돈에 질식당하기 전 사람다운 삶이다. 

현실에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송어낚시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이 낚으려했던 문학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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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멜론 슈거에서 In Watermelon Sugar (1968년)
리처드 브라우티건 | 비채
2024년 5월 개정판 양장본
2007년 10월 초판

브라우티건의 대표작 '미국의 송어낚시'는 겉보기에 단순한 이야기이다. 아무런 주장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미국 사회 비판이 흐른다.

[워터멜론 슈거에서]는 1968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미국의 송어낚시]가 나온 다음 해다. 전작에 비해 신랄한 풍자가 적었다. 문체는 단순함에서 아름다움으로 나아갔다. 그래도 작가가 추구하는 것은 역시나 같았다. 은유와 말장난으로, 기계 문명을 비웃으며 목가적인 꿈을 옹호한다.

도시 문명을 떠나 자연 생활을 추구하는 면에서 소로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 방법은 무척 달랐다. 소로는 한껏 자연 예찬을 했다. 반면, 브라우티건은 자연이 파괴되는 것을 바라본다. 소로는 숲 속 오두막에서 숨을 쉬지만 브라우티건은 오염된 강에서 죽어가는 송어를 본다. 회복 불가능한 꿈에서 유령처럼 떠돈다.

브라우티건은 소로의 이야기 방식으로 말할 수 없었다. 1960년대 미국은 이미 기계 문명에 의해서 자연은 물론이고 인간의 정신마저 망가져 버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방식을 취한다. 언어의 유희 속에서 침묵한다. 죽음 위에서 환상을 본다. 현실과 꿈의 중간 지대에서 방황한다.

소설은 '워터멜론 슈거'라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야기한다. 그곳은 현실이면서 꿈인 곳이다. 달콤한 이야기인 듯 하지만 잔인한 이야기다. 꿈은 아름다우나 현실은 추하다. 이야기는 그 모두를 담아 덤덤하게 강물처럼 흐른다.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같지만 꼭 그렇지 않으며, 자연과 문명이 대결하고 화합한다는 의미가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것 같은데 역시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지는 독자의 몫이다. 소설에 대한 소설로도 동화로도 시로도 읽힌다. 소설가는 꿈과 현실이 맞닿는 자리인 워터멜론 슈가로 들어가서 절망을 읊조린다.

이처럼 명확한 의미를 알 수 없으면서도 다양한 상상과 갖가지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산문은 드물다. 시처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는 은유적 산문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은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다. 또한 모방해서 될 일도 아니다. 시인은 타고날 뿐이다. 시인은 이런 불완전한 세상에 살기에는 너무나 완벽한 존재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문장을 읽고 있으면 감수성의 극한에 이른 자가 택할 길은 안타깝게도 자살밖에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읽는 동안 멍 때리며 즐거운 기분이 드는, 희안하고 휘귀한 책이다. 미국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알 수 없어 더욱 그렇게 읽힌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수록 재미있다. 기묘한 소설이다.

- 덧붙임 1
2007년 구판 편집 오류로 243쪽 작품 해설의 제목을 역자 후기로 해놓았다. 4쇄까지 찍고도 바로잡지 않았다. 6쇄에서도.

- 덧붙임 2
2007년 구판 그림은 소설의 은유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그렸다. 그림이, 다양한 의미로 풀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방해한다. 표지는 그렇다치고 본문 삽화는 책의 질을 청소년용 소설로 전락시킨다. 본문 그림은 빼는 것이 작가에 대한 예의다.

- 덧붙임 3
2007년 구판 8쪽에 사진을 싣고 "이 사진은 미국 문명에 대한 작가의 신랄한 비판을 받고 있다."고 했는데, 왜 그런지는 도대체가 알 수 없다. 아는 분?

- 덧붙임 4
2007년 구판 김성곤은 작품 해설에서 "브라우티건은 1968년에 벌써 iDeath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2000년대에 등장하게 될 iPod나 iMac을 예견했던 선구자적 작가였다."(251쪽)라고 썼다. 농담이죠?

- 덧붙임 5
2024년 5월 24일 개정판이 나왔다. 덧붙임 1과 2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드디어!
어, 잘 보니까 제목이 슈에서 슈로 바뀌었다.

개정판 워터멜론 슈거에서
초판 워터멜론 슈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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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 않는 도시들
- 이탈로 칼비노 지음
- 이현경 옮김

- 민음사 펴냄

 


이 작품의 국내 첫 번역본은 1991년 청담사에서 펴냈다. 당시에는 극소수 독서가들한테만 알려진, 아주 특이하고 무척 희안하지만 잘 읽혀지지도 잘 팔리지도 않는 책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별종들이 읽었다. 주변 몇몇 독서가들한테 권했지만 실제로 읽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개들 읽기 어렵다고 포기하거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다며 불평했다.

청담사 번역자가 민음사와 같은 이현경이 아니라 박상진이다. 당시 책 가격이 3천원이었다. 책이 시집처럼 두께가 얇았다. 싼 가격과 적은 부피로 짐작해서 읽기 전에는 서사시인 줄 알았다. 세월이 흘러 책은 사라졌고 내 기억에서 멀어졌다. 그러다가 민음사에서 다시 나왔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탈리아 작가 중 가장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이탈로 칼비노의 1972년 발표작이다. 기호학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진수를 보여준다. 세계와 삶의 본질을 환상으로 진지하게 탐구한다.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 칸에게 자신의 여행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서술한다. 독자는 신비롭고 이상하고 야릇하고 독특하고 매력적인 칼비노의 언어가 만든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여행한다. 다분히 추상적인 것들을 마치 눈에 보이는 도시로 묘사한다.

 


칼비노가 만든 '언어' 도시를 보기 위해서는 애를 먹기 쉽다. 기호학적인 면이 두드러진 이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은, 사물과 그 이름은 인과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여 작가가 마음대로 재구성하고 재편성하여 놓았다. 기존 소설 독법으로 읽다가는 몇 쪽 읽다가 책을 던져 버리기 쉽다. 

환상적인 독서 체험을 위해서는 독자가 노력을 해야 한다. 칼비노는 독자에게 구체적으로 "이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직 제안만 한다. 이것인 것 같다는 투다. 글에 공백이 많다. 그걸 채우는 것은 독자다. 이 여백을 상상력으로 채워야 이 걸작을 맛볼 수 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충돌은 매력적이면서 난해하다. 각 도시들은 철학적이면서 우화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작가는 '도시'를 보기 위한 방법을 중간에 가르쳐 준다. 이렇게 해서 독자와 작가의 게임이 시작된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 놀이처럼 작가가 숨긴 의미를 독자는 작가가 쓴 글에서 찾는다. 여기에 소설 구성의 치밀함이 있다.

도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존재하기도 하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 존재하기도 한다. 자, 당신은 과연 이런 도시를 볼 수 있을까? 도전해 보라. 상상력을 발휘하면 언어의 도시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대단히 산만해보이지만 수학으로 만든 글 구조물이다. 목차를 보면 설계도가 보인다. 총 9부다. 1부와 9부는 10개 도시를, 나머지 부는 5개의 도시를 묘사한다.

10 x 2 + 5 x 7 = 20 + 35 = 55 

55개의 도시들은 11개의 주제(기억, 욕망, 기호들, 교환, 섬세함, 눈, 이름, 죽은 자들, 하늘, 지속됨, 숨겨짐 등)별로 5개의 도시들이 묘사된다.

55 = 11 x 5

이상의 글 구조물은 작가가 독자한테 스스로 맞춰 원하는 그림을 그려보라고 제안한다. 페이지를 순서대로 넘기며 읽는 것은 여러 읽기 중에 하나일 뿐이다. 작가가 목차로 제시한 주제의 도시들만 읽을 수 있다. 심지어 55개의 도시들 묘사를 모조리 무시하고 각 부의 앞뒤에 있는 '마르크 폴로와 쿠빌라이 칸의 대화'만 남기고 스스로 55개의 도시를 만들어 볼 수 있다. 마지막 읽기의 경지에 이르면 당신은 독자의 경계를 뛰어넘어 작가가 되는 것이다.

 


"이야기를 지배하는 것은 목소리가 아닙니다. 귀입니다."(172쪽) 의미를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읽는 사람의 해석, 즉 귀다. 작가가 쓴 이야기인 목소리는 독자가 읽는 이야기인 의미와 완벽하게 일치할 수 없다.

처음에는 말장난 기호로 만든 도시로 보이나 뒤로 갈수록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도시로 느껴진다. 이 소설이 말하는 도시는 사람들이 천국 혹은 지옥으로 만들고 있다는 바로 우리 세상임을 깨닫는다.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208쪽)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2014년 12월 13일, 세 번 읽게 되었다. 여전히 술술 읽히지 않는다. 이틀이나 걸렸다. 자유도가 지나치게 높은 게임 같다. 텍스트는 텍스트대로 흐르고 나의 상상은 나의 상상대로 달린다. 처음 읽었을 때 읽기 너무 힘들었던 것을 이제는 웃으면서 회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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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
-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 박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작가 자신이 쓴 연보에 작가의 우스개가 넘친다. 소개하면 이렇다. 1950년대, 따분했다. 1983년, 크게 게으름피우다. 더 웃기는 것은 1988년, 이 작품으로 상을 탄 돈을 전액 경마에 걸어 잃었다고 솔직하게 버젓이 적고 있다는 사실이다.

별로 자랑거리는 아닐텐데. 내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작가의 한국어판 서문에 보이듯 미시마 유키오가 천황제, 군국주의 등과 연결되는 사람이라 그 반감의 표현으로 그런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 한몫 벌어 보려고 했나?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이 소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에 대해 비평한 소설이다. 소설에 대한 소설이다. 말장난이라고? 그렇다.

우리는 근대 소설의 어법에 익숙해서 이런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다. 그래서 말장난하고 있네, 신기하군, 새롭다 따위가 고작이다. 또 이런 소설을 읽고자 마음먹는 독자의 대부분은 그저 새롭다는 느낌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는 새롭다는 느낌보다 무섭다는 느낌이 더 드는 소설이다. 왜냐하면 소설에 대한 우리의 기존 생각을 완전하게 비웃고 있는 것을 넘어 완전한 전환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은 소설 장르의 해체와 구태의연한 근대 소설을 벗어나 새로운 형태를 찾으려 한다. 포스트모던 소설가들은 소설의 위기라고 할 수 있는 기존 소설의 매너리즘을 과감하게 타파하려고 노력한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는 겉만 보면 야구 이야기일 뿐이고 속을 보면 기존 문학에 대한 신랄한 비웃음이다.

이 소설의 첫 부분부터 어리둥절할 것이다. 수고양이라면 '365일의 반찬 백과', 암고양이라면 '다자이 오사무 주간'. 이것은 흔히 소설에서 작가와 독자가 이름이란 것에 집착하는 것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사물은 이름과 상관없이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한다. 이것은 흔히 상품 자체에 상관없이 상표 이름에 현혹되는 소비자처럼 우리는 소설의 제목과 주인공의 이름에 집착한다.

르나르의 '박물지'와 한 소설가 쓴 '야쿠르트 아줌마'라는 소설을 대조해 놀랍도록 닮은 곳을 제시해 보이면서, 순수한 창조 행위로 믿었던 문학을 단순히 주어진 정보의 재구성에 지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제4장에는 발빠른 닭과 배고픈 늑대 이야기가 나오는데, 소설은 꼭 이야기 구조를 가져야 하며 사건의 인과관계와 철저한 묘사로 독자의 감동을 유발해야 한다는 것을 완벽하게 뒤집고 있다.

물론 이 소설은 야구를 재미있게 묘사하는 부분도 있다. "오! 이런 표현이 가능하구나." 하고 감탄이 절로 나온다. 또 아기자기한 야구광의 이야기는 소설의 실험성과 별도로 재미있다.

이 책이 스포츠 코너에 있는 것을 종종 봤다고 작가는 서문에 쓰고 있다. 우리나라 공공도서관에서도 이 책을 스포츠로 분류해서 비치해 놓을 걸, 내가 직접 봤다. 세상은 요지경이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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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거미원숭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1996년 열림원 펴냄 절판
2003년 문학사상사 펴냄 절판
2008년 문학사상상 개정판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철 안에서 이 책을 읽었다. 첫 쪽부터 글에 빨려 들어갔다. 웃음, 기발한 착상, 독특한 상상력, 가벼움 속에 알 듯 모를 듯 느껴지는 진지함, 간결하고 이해가 빠른 문체.

한 편이 서너 쪽 분량이다. 아주 짧은 소설이다. 재미있다. 즐겁다. 유쾌하다. 요즘 같이 메시지가 빨리 즉각적으로 전달되는 시대에 어울리는 글이다. 글이 빠르게 읽혀지고 빠르게 이해된다.

하루키의 이 짧은 소설들은 어떤 것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것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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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작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군조신인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에 등장했다.
그의 첫 작품이다.

하루키의 작품에 왜 90년대 우리 나라 젊은이들이 공감하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는데, 두 가지만 생각해 본다.

우선, 일본 대학 사회의 변동과 우리 나라 대학 사회의 변동이 비슷하다는 점 때문이다. 비슷했지, 똑같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특정한 학생 운동의 불꽃이 사라진 후, 젊은이들이 느끼는 공허감과 상실감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대학 사회는 1980년대에 전두환 노태우 군사 정권과의 치열한 투쟁으로 활발했었다. 그 후 1990년대는 80년대 학번들은 그 시대를 추억을 간직하고 90년대를 살며 방황하거나 현실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다. 

일본 대학 사회는 1960년대 중후반에 전공투(全共鬪) 운동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그 전공투 세대들은 1970년대에 방황하거나 적응하려고 애썼다. 소위 우리나라에는 80년대 운동권 학생들, 일본에는 60년대 전공투 세대들이, 어쩌면 이 두 나라의 젊은이들이 사회에 느꼈던 배신감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1970년 8월 8일부터 8월 26일까지의 이야기다. 전공투 운동이 막을 내린 해 이야기. 우리 나라에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상실의 시대(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에도 이 전공투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90년대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하루키의 소설에 공감한 것은, 알게 모르게 소설 속에 스며들어 있는 혼란스러운 대학 생활과 그 시기 뒤의 느끼는 감정들이 비슷하게 맞아 떨어졌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다음으로, 소설가 장정일이 지적한 것처럼 소설 여기 저기 뿌려 놓은 미끼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독자들과 공감할 수 있는 여러 팝송과 소설들. 우리는 같은 음악을 들었고 우리는 같은 책을 읽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커뮤니케이션한다. 이것은 부수적인 것이지만 꽤 타당한 이유로 볼 수 있다.

하루키 소설은 가벼운 표현으로 무거운 주제를 소화한다. 사회적 억압과 자아 상실감을 간접적으로 비유를 통해 말한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상당히 가볍고 경쾌한 문장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뚜렷한 줄거리이나 극적 반전이나 대립도 없이 물 흐르듯 전개된다. 잘 읽어보면, 이 가벼움 속에 너무나도 무거운 절망과 진지한 주제들이 담겨 있다.

이 소설에는 대학생인 나와 대학을 중퇴한 '쥐'가 제이스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 그 이야기에 몇 가지 이야기들이 같이 곁들어 전개된다. "완벽한 문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이렇게 시작하는 이 소설은 그 첫 문장과 달리 완벽한 문장과 완벽한 절망이 담겨 있다. 하루키는 여러 이야기를 파편적으로 뿌려 놓으면서 결국은 그 모든 파편들이 하나로 통합된다. 놀라운 일! 그 파편적인 모든 이야기들은 잘 읽어보면, 절망감과 상실감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하루키는 미국 포스트모더니즘 작가 커트 보니것한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커트 보니것가 '제5도살장'에서 참혹한 죽음을 목격해야 하는 그 충격을 유머로 극복하듯, 하루키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커다란 상실감과 절망감을 유머로 극복한다.

이런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문제점, 혹은 특징일 수도 있겠다, 중에 하나는 오독(誤讀)의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소설이 오독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경우 더 심하다. '제5도살장'은 그냥 우스꽝스러운 SF로 읽혀질 가능성이 많다. 드레스덴의 참혹한 살육은 독자의 기억에 남지 않을 수도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그냥 웃기는 청춘 소설로 읽혀질 수도 있다. 상실감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독자가 해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쿤데라의 소설들이 그냥 가벼운 사랑 이야기로 읽혀지는 것처럼.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도 독자가 소설에 대한 비판으로 읽지 않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루키도 쿤데라도 커트 보네커트도 전세계 젊은이들이 열광적으로 읽었다. 그러나 과연 그 작가들의 고통을 읽었는가는 의문이다. 우리 나라 독자들은 하루키를 열광적으로 읽었다. 그러나 하루키의 고통을 읽었는가 묻고 싶다. 단순히 하루키의 재미있고 단순한 문장 읽고, '즐거웠다' 하며 책장을 덮을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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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 지음
이용숙 옮김
예담 펴냄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꽤 오래 전이다. 도서관에서 제목이 특이해서 책을 뽑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곤, 그 자리에서 모두 읽었다. 문장에서 펴낸 그 책은 절판되었다. 예담에서 펴낸 이 책보다는 더 많은 글이 있었다. 수필이 몇 편 더 있었다. 가까운 도서관에서 찾아 보면, 아마 있을 것이다. 많은 독자의 손을 거쳤기에 때가 많이 묻은 채로. 몇 쪽 정도는 떨어져 나갔을 수도 있다. 그 정도로 이 책은 인기가 높다.

입사동기한테 읽어 보라고 이 책을 권했다. 반응이 시큰둥이다. "어때요?" 하고 물으니, "뭔지 잘 모르겠어요." 하고 대답한다. 이청준은 페터 빅셀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수필집 '야윈 젖가슴'에서 페티 빅셀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의 경향에 대해 투덜거렸다. 글의 겉만 읽고 속을 읽지 않은 탓이다.

언어에 대한 불신으로 시작하는 이런 류의 소설을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이라 묶어 부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작품을 분류하고 구분하기 위한 문학 비평 용어이면서 현대 사회의 흐름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도 이 계열이다. 이성과 언어에 대한 불신을 표현하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시시한 장난을 치는 것 같다.

자, 여기 이런 사람이 있다. 지구가 둥글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실제로 자신의 발로 걸어서 지구 한바퀴를 일직선으로 걸어 보려고 한다. 앗, 문제가 생겼다. 바로 앞에 집이 있다. 그냥 돌아갈까 싶은데, 그러면 일직선으로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지구가 둥글다는 걸 증명할 수 없다. 그 집을 일직선으로 건너려면 사다리가 필요하다. 앗, 또 문제가 발생했다. 앞에 호수가 있다. 배가 필요했다. 앗, 앞에 높은 산이 있다. 그럼에도 그는 여행을 포기하지 않는다.

발명가가 있었다. 그는 세상과 단절하여 오랜 연구 끝에 전화기와 TV를 발명했다. 이제 다시 세상에 나아가 자신의 발명품을 얘기하려고 하니, 그 발명품은 이미 세상에 쓰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발명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 이렇게 만든 거구나 이해하며 다시 발명에 열중한다.

이런 사람도 있다. 책상은 책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싫다. 자신만의 언어로 부르기로 했다. 그는 점점 사람들과 얘기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결국 고립된다.

아무것도 더 알고 싶지 않은 남자가 있다. 그런데, 세상에 대해 더 알고 싶지 않으려고 하자, 자신이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는 더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먼저 알고 난 후에 그걸 알고 싶지 않기 위해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배우기 시작한다.

페터 빅셀은 말장난처럼 이야기를 꾸며 간다. 진지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실제로 읽어 보면 진지하다. 작가의 눈은 사회의 부조리를 응시한다. 그의 마음은 사회의 약자를 끌어안는다. 진지함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작가가 선택할 수 있는 언어는 말장난이었으리라.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우리를 위로하다니. 슬픈 일이다.

난 이 책을 읽고 위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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