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지음
원유경 옮김/열린책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을 때면 언제나 뒤가 비치는 습자지를 보는 느낌이 든다. 저렇게 말하는 캐릭터 뒤에 작가의 육성. 이렇게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차분하게 내는 수필 같은 문장들.
부유하고 행운이 가득한 삶 속에서 우아하게 사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불행하고 가난한 삶을 사는 중에 자신감을 잃지 않고 산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끝장난 결혼과 경제적 곤란 속에서 세련된 인품을 유지하는 여성을, '오만과 편견'에 쓰인 문장에서 볼 수 있다. 솔직하면서도 당당한 '제인 오스틴'을 읽을 수 있다.
연애와 결혼을 대단히 현실적으로 실질적으로 다루면서도 그 과정과 결말은 낭만적으로, 혹은 로맨스장르 소설의 규칙을 충실하게 따른다. 결혼했다로 끝난다. 그 후로 둘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을 거라고 암시한다.
전반적으로 번역이 나쁘진 않지만, 아주 좋다고 할 수도 없었다.
YOU를 당신으로 고지식하게 직역한 건 거슬린다. 다른 말은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최대한 바꿨으면서 유독 YOU만은 당신으로 꼬박꼬박 옮긴 이유를 모르겠다.
하나 더. 영어의 어순을 고지식하게 옮기다 보니 우리말 어순을 지키지 못해 오류가 났다. "나의 결혼에 대한 생각." 수식어는 피수식어 바로 앞에 두던지 쉼표를 이용해서 독자의 혼동을 피해야 한다. "결혼에 대한 나의 생각" 또는 "나의, 결혼에 대한 생각"으로 써야 맞다.
인간을 개미 보듯 관찰하며 글을 쓰는 사람은 고독한 게 아니라 고집스러운 것이다. 인간에 대해 실망한 사람은 대체로 인간 외의 것에서 위안을 찾는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을 인간이 아닌 관찰 대상자로 바꾼다. "엘리자베스는 그 상황에 눌리지 않고 차분하게 자기 앞의 세 여성을 관찰할 수 있었다."
제인 오스틴은 성공적인 결혼은커녕 경제적인 독립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았다. 갖지 못한 것,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을까. 현실은 시궁창이었으나 소설은 궁전이었다. 작가는 소설에서 연애와 결혼에 모두 성공한 주인공을 그려낸다. 자신이 원하는 환상 속 나라로 들어간다.
"재산이 많은 미혼 남성이라면 반드시 아내를 필요로 한다는 말은 널리 인정되는 진리이다." 이 첫 문장은 소설 전체를 요약하고 대변한다. 그리고 할리퀸 로맨스소설의 법칙이기도 하다.
키 크고 잘생겼으며 부자에다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젊은 미혼 남성이 가난하지만 독립심이 있으면서 착한 성품에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운다는, 밝은 성격의 미혼 여성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
이 결혼은 말 그대로 소설이며 환상이자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로또 복권 1등 당첨이 연속으로 세 번 일어나거나 같은 장소에서 벼락을 두 번 맞는 것만큼이나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런 결혼은 여성의 가장 절실한 욕망이기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여성의 가장 손쉽고 빠른 신분 상승 및 부의 획득은 결혼이다. 문제는 그런 일은 실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는 점이며, 웬만해서는 절대로 이 판타지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상은 자유다. 게다가 공짜다.
세계문학고전으로 불리며 계속 읽히고 연구되는 소설 중에는 그다지 납득이 안 되는 경우가 있는데, 제인 오스틴의 소설도 그중 하나다. 사실주의 어쩌니 여성의 목소리니 사회소설이니 하면서 애써 훌륭한 작품이니 대단한 소설이니 떠들어대지만 그래봤자 요즘 흔히 보는 할리퀸 칙릿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않는가.
최신 여성지의 한쪽에 실린 연애 충고 칼럼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드는, 옛날 소설이라니. 연애와 결혼 문제는 과학기술과 달리 거의 발달하지 못한 모양이다. 연애고 결혼이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요즘이라도 말이다. 사랑은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이며 비논리적인 환상이면서 구차스러운 현실에 빠져 죽지 않도록 해준다. 상상이라도 해도 감정은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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