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1890
오스카 와일드 | 임슬애 | 민음사 | 2022

표지를 보는 순간, 너는 이 책을 이미 샀다


오스카 와일드의 유미주의 예술론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이미 아는 이야기지만 실제로 원작을 읽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마음먹고 읽어 봤다.

예전에 열린책들 번역본 전자책으로 서문만 읽었긴 했다. 시작이 지루해서 읽지 않았던 듯. 알라딘 100자평에 읽기 힘들었다는 말이 있던 걸 보면,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번역에 문제가 있는 모양새다.

국내 여러 번역본이 있는데, 쏜살문고를 택했다. 임슬애 번역본이 굳이 제목에 '1890'을 붙인 이유는 "최초의 원고"를 번역했음을 강조한 것이다. 다른 번역본은 대체로 1891년 원고를 택했다.

두 원고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수정한 1891년 원고는 사회적 비난과 검열에 굴복했다. 

오늘날 관점에서는, 불륜과 동성애가 넘치는 드라마를 딱히 별다른 윤리적 비난 없이 보는 요즘에는, 그 차이를 느끼려면 이 쏜살문고 번역판 끝에 붙은, 옮긴이의 설명 글을 읽어야 겨우 알 수 있을 정도지만 어쨌거나.

1891년 원고가 분량이 더 많다. 1890년 원고는 13장이 끝이지만, 1891년 원고는 20장이 끝이다. 1891년 수정판도 읽어 봐야겠다. 1890년 초판은 일찍 끝난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가나 말거나 표지 때문에 이 책을 택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쏜살문고 로고가 하필이면 초상화 얼굴의 코 부분에 위치해서 옥에 티지만, 잘생김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이야기 줄거리 요약은 의미가 딱히 없다. 워낙 유명해서 다들 알고 있고 나 자신도 책을 읽기 전에 알고 있었다.

작품 전반적인 인상은 희곡 같은 소설로 보인다. 등장인물들이 말이 정말이지 많다.

작가의 세 분신(사랑의 바질 홀워드, 풍자의 헨리 워튼, 아름다움의 도리언 그레이)이 계속 수다를 떠는, 다소 위험 수위를 넘는, 그러니까 선을 넘는 발언을 한다. 이야기에 집중하기보다는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등장인물 뒤에서 열심히 해대는 모습이다. 동성애 고백을 한다. "난 여자를 사랑한 적이 없어." 136쪽.

그렇게 하는 말이 재치있고 날카롭고 철학적이라서 좋은데, 그 말하는 방식은 갑갑하고 기계적이고 어색해 보인다. 홈즈와 왓슨의 대화처럼 자문자답의 폐쇄적인 구조에 갇혀 있다.

겉은 소설이고 속은 사소설 혹은 자서전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초상이다. 작가 자신의 모습을 글로 그려 놓았다.

나는, 이 소설을 오스카 와일드의 예술론으로 읽었다. 유미주의 선언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서문에 있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어야 한다. 의미도 쓸모도 도덕도 아름다움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를 장편소설에 길게 풀어낸 것이다.

"괘락주의의 가르침은 삶의 순간순간에 집중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삶 전체가 한순간에 지나지 않으니까." 160쪽. 가끔 이런 문장을 툭툭 소설에 던져 놓아서, 이야기 자체에 몰입해서 빠르게 읽기를 방해한다. 

이야기와 큰 관련이 없는 문장을 제거하면 단편소설 분량일 것이다. 말이 많아서 분량이 늘어나서 장편소설이 된 꼴이다. 읽는 내내 지루했다. 말의 홍수에 이야기의 재미가 밀려난다.

그리하여, 밀린 방학숙제 하듯 다소 억지로 읽어야 했다. 선악이 외모에 드러난다는, 순진한 생각에 옛날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그냥 빨리 읽어치웠다.

소재는 흥미로운데, 이야기는 삐걱거리는 의자처럼 불편했다. 주인공의 타락에 별다른 설득력이 없다. 사건들은 그냥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왜 갑자기 죽이는가.

2025.11.14

Posted by love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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