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Ice: An 87th Precinct Mystery (1983)
에드 맥베인
검은숲 2013년
ISBN 9788952767929
너무 장황해
아무리 좋은 것도 넘치고 지나치면 물리고 실증이 나는 법이다.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 중 '아이스'는 자신의 장기를 너무 많이 발휘해서 너무 많이 썼다. 인물이 너무 많고 이야기가 장황하다.
영화로 나온 걸 봤다. 소설에 비해 잡스러운 게 제거되어 좋긴 한데, 여전히 87분서 스타일을 완전히 벗어나서 새롭게 만든 건 아니라서 여전히 잡스럽다.
경찰 관련 업무 내용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그렇게까지 자세히 쓸 필요는 없고 그렇게까지 알고 싶지도 않다.
'아이스'는 이런저런 사람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다. 포도송이 같다. 중심 이야기가 있고 거기에 자잘한 이야기들이 많이 매달렸다. 한 알씩 먹으면 어느새 이야기가 끝난다.
'아이스'는 '10 플러스 1'과 비슷한 이야기다. 계속 같은 총에 여러 사람이 죽어나가고 누가 왜 이들을 죽이는지 알지 못한다. '10 플러스 1'처럼 직선이 아니라 두 선이 꼬였다가 봉합되며 끝난다. 동시 진행하다가 끝에 합쳐지는 것은 '살의의 쐐기'를 닮았다. 시리즈로 워낙 많이 쓰다보니 이야기 틀거리가 비슷해진 것이겠지.
마약 이야기가 나오기에 '아이스'가 신종 마약 이름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극장 암표 판매를 뜻하는 거였다. 이것도 아주 자세히 써 놓았다. 그렇게 세세하게 알려 줄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탄도학, 회계학(돈 세탁하는 방법), 형법, 마약 감별법, 심리학, 정보원 구인 및 관리법, 마약 제조 및 유통, 다아이몬드를 숨기는 방법 등 온갖 범죄 관련 지식을 쓸데없이 자세히 알려준다. 그렇게까지 상세하게 알고 싶지 않단 말이다.
87분서 시리즈의 후반기 작품인데, 실망했다. 면도칼로 사람을 난도질해서 죽이는 뚱뚱한 여자 범죄자에, 질 낮은 농담들, 이전에 설명했던 인물 묘사와 사연의 반복. 선정성이 심하다. 게다가 이야기는 초반에 너저분하게 벌려 놓고 후반에 간단하게 풀린다.
시리즈에서 마음에 드는 캐릭터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게 아니라 망가지고 부셔지는 것을 보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버트 클링은 왜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놓았는지, 작가한테 따지고 싶다. 성격 좋은 데다가 잘생긴 사람을 미워하나?
뛰어난 글솜씨로 질 낮은 범죄 이야기나 쓰다니. 재능이 아깝다. 많은 작가들이 돈벌이 잘 된다는 이유만으로 추리소설을 썼다. 피와 폭력, 살인과 범죄. 쓰레기들. 욕설들. 모든 작가가 '죄와 벌' 같은 소설을 쓸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작가가 범죄 소설을 써야 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에드 맥베인이 글을 잘 쓰지만 과연 좋은 작가인지는 의문이다. 반면에 글 쓰는 걸 좋아했던 것은 분명하다. 형사들 식성까지 세세하게 글로 쓰는 걸 보면 말이다. 즐기면서 글을 쓴 게 뻔히 보인다. "카렐라는 소지시와 후추가 든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형사실 안에서 서로 식성이 갈리는 모습을 보면 굉장히 재미있었다. 마이어는 파스트라미를 넣은 호밀빵을, 클링은 참치를 넣은 흰 빵을, 브라운은 토스터에 구워 햄을 얹은 식빵을 먹고 있었다." 477쪽
실제 형사들이 사건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모르지만, 이 소설에서 형사들이 각자 조사한 사항과 추리를 모아서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본 끝에 나름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은 멋지다.
이 소설의 끝은 그리 유쾌하지 못하다. 선행이 악행으로 바꾸고 재판에서 범죄자가 가석방으로 풀려나고 정의는 씁쓸하게 실현된다. 형사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제대로 일을 마무리짓지는 못했다. 87분서 형사들(정확히는 번스 반장)은 사건을 5분서로 넘긴다. 그리고 끝난다.
오탈자 한 개 있었던 듯하고, 521쪽 '쉬운 남자'라는 번역에 할 말을 잃었다. 혹시 이 번역자 전직이 노무현 대통령 번역사 아니었을까.
검은숲에서 그 많은 87분서 시리즈 중에 하필 '아이스'를 고른 이유를 모르겠다. 혹시 분량 때문에? 차라리 마지막 발표작을 하든지 많이 번역되어 알려진 '경관 혐오' 다음 작품을 하는 게 더 나은 전략이지 않았을까.
피니스 아프리카에서 이 시리즈가 계속 잘 나오고 있어서 다행이다. 표지가 어쩜 그리 예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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