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 밀매인
The Pusher (1956)
에드 맥베인
피니스아프리카에 2015년
ISBN 9791185190082

마지막 장면이 멋지다


셜록 홈즈, 에르퀼 푸아로, 스티브 카렐라. 이들의 공통점은? 작가가 죽였으나 독자들의 아우성 때문에 억지로 되살리거나 생명을 연장시킨 캐릭터다. 그리고 모두 시리즈를 오래 끌며 인기를 누렸던 주인공들이다.

소설가가 등장인물을 만들면 캐릭터는 스스로 생명력을 얻어 작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죽이고 싶어도 못 죽이고 작가 좋을 대로 캐릭터가 행동하거나 말하게 할 수 없다. 어느새 입장이 뒤바뀐다. 작가가 캐릭터를 가지고 노는 게 아니라 캐릭터가 작가의 멱살을 쥐고 흔들며 채찍질을 해대며 어서 글을 써내라고 명령한다. 글 쓰는 노예다. 아서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를 미워했던 이유는 그래서다.

87분서 시리즈 세 번째 소설 '마약 밀매인'에서 스티브 카렐라 형사는 작가 에드 맥베인에 의해 '멋지게' 죽었다가 출판대리인과 담당편집자의 동시 폭격에 항복하고 초본을 수정해서 살려낸다. 이후 카렐라 형사는 이 시리즈의 중심이자 주인공으로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절대 죽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는 사람이고 암으로 사망했다.

에이전트라 불리는 출판대리인은 출판 전 원고를 읽는다. 우리나라와 달리, 영미쪽에서는 출판계약 관련 업무만 전문적으로 전담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 작가 대신에 여러 출판사에 원고를 보여주고 출판계약을 따내면 중개수수료를 챙긴다. 자기 나름대로 출판시장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작가한테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 권할 수 있고, 출판 관계자랑 이야기해보고서 그쪽 권고 사항을 전하기도 한다.

에디터라 불리는 출판편집자는 출판대리인보다 더욱 더 작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우리나라와 달리, 영미쪽에서는 편집자가 작가의 글에 신과 같은 권력을 행사한다. 이야기의 방향과 결론은 물론이고 글의 분량을 조절하거나 심지어 문체까지 바꾸라고 명령할 수 있다. 스티븐 킹이 저술은 인간의 영역이고 편집은 신의 영역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래서다.

가장 성공적인 편집 사례는 '바다와 노인'이다. 헤밍웨이가 쓴 이 소설의 초본 분량은 단편이 아니라 중장편에 가까웠다. 한국전 참전 중 참호 속에서 원고를 읽어 본 편집자는 너무 장황해서 독자들이 참지 못하고 읽어주지 않을 거라면서 단편으로 줄이라고 작가에게 명령했다. 이 편집자의 이름은 제임스 미치너, '소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쓴 소설가이기도 하다.

에드 맥베인이 캐릭터를 죽였다가 되살리는 글솜씨가 귀신같다. "이제 크리스마스였고, 온 세상이 평온했다. 그러나 스티브 카렐라는 숨을 거두었다."를 마지막 문장만 삭제하고 그 앞부분 장면을 조금 수정해서 정반대 분위기로 만들었다. 3부작으로 완결되는 거였다면 카렐라가 죽는 장면으로 끝나는 것도 나름 멋졌으리라.

시리즈물은 출간일순으로 읽어야 한다. 후반기에 쓴 소설에 전반기의 사연과 사건을 말하기 때문이다. '마약 밀매인'은 시리즈 세 번째 소설인데, 이 사건 이야기가 '살의의 쐐기'에 나와 있다. 그러니, '살의의 쐐기'를 '마약 밀매인'보다 먼저 읽은 나로서는 읽다가 놀라지 못하고 확인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87분서 시리즈물을 내 준 것만 해도 어디냐 싶다만, 시리즈 순서를 맞춰 출판해 주면 안 되냐고.

셜록 홈즈와 애거서 크리스티식 수수께끼 정통 추리물이 강세인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해 많이 팔리지 않을 게 뻔하기 때문에, 게다가 열린책들의 매그레 시리즈가 판매부진으로 더는 내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 걸 봤기 때문에, 피니스 아프리카에의 87분서 시리즈도 같은 꼴이 될 것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럼에도 표지가 예쁘고 크기가 아담하고 교정을 네 사람이나 봐서 그런지 오탈자가 거의 없고 온라인에서 본 발행인이자 출판사 사장 박세진 씨가 미남이다. 작가 에드 맥베인의 우중한 사진보다는 번역 출판사 사장인 박세진의 사진을 책날개에 인쇄하는 게 판매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다. 농담이다. 좀 더 나은 작가 사진을 컬러로 실어 주면 좋겠다. 아니면 아예 없는 게 나을 듯.

부디 많이 팔려서 이 시리즈 전권이 나오는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 카렐라가 가슴에 총 세 방 맞고 죽은 지 삼일만 부활했다. 나는 기적을 믿는다.

'마약 밀매인'은 마약 관련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이야기인데, 작가의 글솜씨는 좋지만 중심 이야기는 훌륭하지 않았다. 밋밋하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의 인간적인 모습과 사연을 읽는 재미는 대단히 좋다. 대사를 어쩜 이렇게 멋지고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으로 잘 쓰는지. 마지막 장면이 멋지다. 멋진 작가다.

가끔씩 소설이 아니라 다큐멘터리 같다. 범죄 수사 과정을 전문적이고 자세한 수준까지 설명하며 보여준다. 138쪽에 보면 지문 조사 방법이 나오는데, 지문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단다. 잠재적 지문, 식별 가능 지문, 가소성 지문. 이 정도면 범죄수사학 교과서나 전공서적에나 나올 법한 글이다.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를 읽으면 경찰소설을 쓰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경찰이 어떻게 범죄를 수사하는지 경찰보다 더 잘 알 수 있다.

Posted by love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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