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 혐오
Cop Hater (1956)
에드 맥베인
동서문화사 2003년
ISBN 9788949701493
경찰소설의 모범
'경관 혐오'는 경찰소설의 모범이 된, 87분서 시리즈의 첫 번째 소설이다.
권총소지허가신청서, 탄환감정서, 검시해부보고서. 소설에 이렇게 세세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나. 내 평생에 범죄 관련, 특히 살인 관련 공문서를 실제로 볼 일은 단 한 번도 없을 듯 싶다. 작가가 경찰 업무를 잘 알고 있다는 건 알겠다.
에드 맥베인은 경찰소설이라는 장르를 확립한다. 기존 초인적인 능력과 복잡기교한 트릭의 탐정 주인공 소설과는 거리를 두면서 사실적이고도 현실적인 형사들의 이야기를 창작한다.
87분서 시리즈를 4권째 읽었다. 그의 이야기 작법이 보인다. 뛰어난 인물 묘사과 생생한 대화는 따라잡지 못할지라도, 그리고 온갖 경찰 관련 전문 지식도 못 따라하겠지만,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방법은 확실히 배웠다.
무더운 여름날, 87분서 형사들이 45구경 총에 맞아 하나, 둘, 세 명이 차례차례 죽는다. 형사에게 원한이 있는 자가 범인일 거라 여기고 여러 단서를 잡아 추적해 보지만 막다른 골목에 이를 뿐이다. 스티브 카렐라 형사는 경관 혐오자가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경관이라서 죽인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이유 때문에 죽인 것이라며 자기 나름의 추리를 기자에게 이야기한다. 살인범 '검은 양복의 사나이'가 기사를 보고서 카렐라 형사의 애인 테디의 집에 찾아가는데...
제목과 사건 전개는 독자가 오인하도록 하기 위한 미끼다. 덥석 물고 끌려가다가 끝에 가서 아 사실은 그런 거였어 의외네 하면서 독서를 끝낸다.
연쇄 살인이 일어나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각 사건의 관련성이 보이지 않으니, 미치광이 짓이라고 할밖에 없다. 하지만 살인은 의도적이고 논리적이며 직선이다. 인간의 죽음은 우연한 사고지만 타인의 목숨을 훔치는 행위는 필연적 사건이다.
시리즈의 다른 작품과 달리, 유머가 썰렁하다. 이 정도로 심하게 안 웃기지는 않았는데, 첫 작품이라 그랬나.
맥베인의 범죄 수수께끼는 거의 끝에서야 갑자기 확 풀리면서 딱히 강한 반전 같은 것은 없다. 현란한 트릭이나 대단한 추리력을 보여주진 않는다.
다만, 이 소설 '경관 혐오'에서는 셜록 홈즈 시리즈 첫 편 '주홍색 연구'에서 보여준 용의자 신상 알아맞추기를 선보였다. 166쪽부터 나오는데, 과학수사대가 DNA 같은 고도의 과학기술력이 없어도 관찰과 과학 지식을 통해 훌륭한 추리를 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머리카락만으로 그 사람의 성별과 직업과 나이를, 탄환 검사와 옷에 묻은 핏자국으로 키를 추정해낸다.
'경관 혐오'는 독창적인 소설이라고 말할 순 없다. 범죄추리소설의 장르 틀거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소설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ABC 살인사건'과 똑같다. 인물, 배경, 문장은 다르지만 범죄 행위의 틀과 이야기 전개 방식은 같다. 잘 가져다 썼다.
추리소설을 쓰려는 사람은 아서 코난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의 영향력을 피할 수 없다. 경찰소설을 쓰려는 사람은 에드 맥베인의 동시다발 다큐멘터리식 이야기 방식을 따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장르의 굳건한 틀이다. 이 틀에서 벗어나 추리/범죄/탐정/경찰 소설을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애드거 앨런 포를 창조자로 모시는 '추리소설' 신전에서는 다음의 신조를 따르라. "수수께끼 같은 범죄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그 범인과 사건의 진상은 맨 마지막에 밝혀라." 아멘.
동서미스터리북스의 재미 혹은 수수께끼 중에 하나는 책 제목에는 없는 중단편이 하나 더 들어 있다는 점이다. 오탈자가 있어도 그럭저럭 읽을 만하다는 것, 표지가 본문 내용과는 별 관련이 없다는 것, 가끔은 종이에서 요상하게 불쾌한 냄새가 난다는 점과 더불어서 말이다.
DMB 64권 이 책에는 '한밤의 공허한 시간'이라는 중편소설이 실렸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책에서 아무런 설명도 해설도 원제도 없다. 아마도 1962년 출간된 중편집 The Empty Hours에 있는 세 편 중에 하나로 보인다.
그다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사건이 진행되다가 끝에 가서 합치며 마무리되는 형식이다. '살의의 쐐기', '아이스'도 같은 이야기 형식이다. 작가 스타일이다.
살해된 여자의 계좌와 수표 사용 내역을 끈질지게 추적하지만 이야기가 끝나기 바로 직전까지 누가 왜 죽였는지 알 수 없다.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에서 종종 보이는 신분 바꿔치기 수법인데 그 흔적을 따라 끝까지 가 봤지만 살인범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절도 사건 조사에서 나온 프랑스 화폐 금액과 살해된 여자 관련 금액에서 사라진 돈이 일치하면서 수수께끼는 확 풀린다, 씁쓸한 여운을 남기면서.
장편 '경관 혐오'보다 중편 '한밤의 공허한 시간'이 더 낫다 싶다. 허기야 첫 작품의 어색하고 어설픈 모습보다야 능글맞고 능숙한 중후반기 작품이 더 나은 것은 당연하고도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경관 혐오 별3개, 한밤의 공허한 시간 별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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