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열두 방향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시공사 

이 책은 작가의 회고전이다. 단편마다 작가가 회상한다. 단편에서 장편으로 발전한 사연을 구체적으로 적었다.
르귄의 소설 세계는 중세 낭만주의 SF 판타지다. 주 분위기는 중세 판타지 풍이다. 부가적으로 SF 소재다. 문체는 꿈결처럼 매끄럽고 부드럽게 흐른다. 사건보다 심리를 중시한다.

1. 셈레이의 목걸이 Semley's necklace
이 단편소설은 장편소설 '로캐넌의 세계' 첫부분이 되었다. 중세 판타지다. 여러 계급이 나온다. 그 세계를 둘러싼 것은 우주 식민지라는 SF다. 전설 같은 이야기를 SF로 풀어냈다.

2. 파리의 4월 April in Paris
르귄의 초기 작품이다. 이 단편소설이 자신의 출발점이란다. 자신에게는 무척 의미 있는 작품이겠지. 돈을 받고 쓴 첫 작품이라니까. 작가는 자기랑 맞는 편집자를 만나야 한다. 아무리 작품을 잘 써도 그 작품을 제대로 알아 봐 줄 출판 편집자가 없으면 출판되지 못한 원고로 남을 뿐이다. 어딘지 모르게 작가의 실생활이 조금 보이는 듯하다. 그래서 재미있다.

3. 명인들 The masters
갈릴레이가 받았던 종교 재판이 떠오르는 소설이다. 과학자가 자신이 발견한 과학적 사실이 사회의 지배 질서에 어긋날 때 과연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그 사실을 고수할 수 있겠는가. 과학자가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다면, 그는 과학자가 아니라 철학자다. 기술자가 아니라 사상가인 것이다. 과학의 힘이 약했던 시절에는 꽤나 무게가 나가는 주제였으리라. 하지만 요즘 과학은 지나치게 힘을 얻었다.

4. 어둠상자 Darkness box
그림자라는 소재에 대한 작가의 집착이 시작된 작품인 듯. 그림자에 대한 심리적 해석은 어스시 시리즈 1권에 나타난다.

5. 해제의 주문 The word of unbinding
어스시(EarthSea) 시리즈의 출발점이 된 단편이다. 번역자는 땅바다 시리즈라고 했는데, 그냥 영어로 읽는 게 낫지 않나 싶다. 최근엔 영화로 나와서 게드 마법사 시리즈로 알려진 듯. 그 시리즈 3권에 이 단편의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한다. 웅진에서 출판한 어스시 시리즈 2권까지 읽은 나로서는 3권 이야기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스시 시리즈의 분위기는 그대로 담고 있어서 읽기 편했다.

6. 이름의 법칙 The rule of names
이 단편 역시 어스시 시리즈의 주요 내용을 이룬다. 내용이라기보단 그 마법 세계의 원칙이다. 참된 이름이 그 존재를 통제한다는. 단편의 이런저런 생각이 모여서 어스시를 탄생시킨 것이다. 거대한 세계의 모습이 한 번에 떠오를 일은 없고 그렇게 단편적으로 보이다가 나중에 크게 다 보이는 것이겠지.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작법이다.

7. 겨울의 왕 Winter's king
이 작품은 그 유명한 장편소설 "어둠의 왼손"의 실마리였다고 한다. 작가는 이 작품을 쓴 직후에 이 세계의 사람들이 양성인(여성이 될 수도 남성이 될 수도 있다)인 줄 몰랐다고 한다. 1년 후에나 알았다고. 그래서 다시 이 글을 출판하면서 양성인으로 고쳐 썼다고. 꼭 그래야만 했나 싶다. 그대로 두는 게 낫지 않았을까. 번역에서는 이 점을 크게 고려 하지 않았다. 우리말은 주어의 성을 크게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8. 멋진 여행 The good trip
작가는 자신의 글이 그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현실을 도피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을 반영한다. 작가는 독자의 해석이나 이해나 비평에 대해 자신의 작품이나 입장을 변호해야 할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작가의 손을 떠나 인쇄된 글은 이미 스스로 생명력을 지닌 독립적 존재다. 작가가 그 작품에 대해 뭐라고 떠드는 것은 이미 자신도 독자의 입장일 뿐이다.

9. 아홉 생명 Nine lives
클론 이야기다. 인간 복제. 기술적인 측면보다는 심리적 측면에 치중했다. 주변 사람들한테 르귄을 잘 권하지 않는다. 르귄의 심리적 측면에 치중하는 이야기 방식 때문이다. 딱히 사건 전개 위주가 아니라 인물의 미묘한 심리 변화를 중시한다. 따라서 지루하느니 재미없다느니 하는 독자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하다. 자기가 읽고자 하는 게 없는 것만 나오는 책을 누가 재미있게 끝까지 읽겠는가.

10. 물건들 Things
편집자가 제목을 바꿔야 한다고 말할 때는 객관적인 이유 때문이다. 편집자가 작가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대다수 독자의 해석을 잘 아는 사람이다. 제목을 바꾸는 문제에 대해서는 편집자 의견을 따르는 것이 좋다. 이렇게 애써 자신이 처음 붙인 제목을 고집해서 다시 출간하는 것은 자기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겠지. 하지만 대다수의 독자가 작가의 의도대로 읽는 것은 아니다.

11. 머리로의 여행 A trip to the head
글이 막힐 때가 있다. 어느 작가나 언제나 술술 글이 풀려서 쓰진 않는다. 글이 안 팔리는 것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글이 안 써지면 최악의 경우 작가를 죽음으로 몬다. 더 안 써지면 존재 의미가 사라진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작가의 자살이 빈번한 건 그래서다. 쓴 글이 아주 형편없다고 하더라도 일단 하나 완성하면 다음에 또 쓸 수 있다. 작가에게 자신의 존재 의미는 자신이 쓴 책이 많이 팔리거나 읽히는 것보다 자신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12.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Vaster than empires and more slow
외계 존재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다루고 있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는 철학적 인식론으로 접근했다면 르귄의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는 심리적 감정론으로 접근했다. 타자는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타자를 대하는 우리의 일차적 감정은 공포인 듯하다. 그 다음이 혐오. 왜 사랑일 수 없을까. 르귄이 그에 대해 명확한 답을 하진 않는다. 르귄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감정과 심리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것이다. 이성적이라기보단 감성적인 사람이다. 르귄이 주로 다루는 문제는 감정이다. 감정은 명확히 말할 수는 없어도 우리를 둘러싼 공기처럼 큰 영향을 미친다. 감정의 미묘한 변화에 따라 우리 삶은 변한다.

13. 땅속의 별들 The stars below
지상에서 쫓겨난 천문학자가 지하에서 발견한 별.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할 수 없는데, 이런 말이 있었다. 한 쪽이 닫히며 다른 쪽이 열리기 마련이라고. "명인들"처럼 과학자의 이상형을 그리고 있다.

14. 시야 The field of vision
외계 생명체가 우리에게 자신의 신을 가르칠 수 있다는 생각을 왜 지금껏 못했을까.

15. 길의 방향 Direction of the road
상대성의 원리. 나무가 느끼는 속도와 자동차의 속도. 왜 이렇게 웃기지. 웃으라고 쓴 건 분명 아닌데.

16.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The ones who walk away from omelas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대한 기억과 도로 표지판(Salem Oregon)을 거꾸로 읽어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농담이겠지. 실제 동기는 따로 있다. 미국 사상가 윌리엄 제임스가 쓴 '도덕적 철학자와 도덕적 삶'을 읽고, 그 글의 주제를 은유로 표현한 이야기로 만들었다. 당신은 집단의 불의에 저항할 수 있는가? 타인의 불행을 담보한 다수의 행복은 정당한가? 질문을 하는 소설이다. 이 책에서 당신을 가장 괴롭히는 작품이리라. 가장 잊혀지지 않는 소설이 되리라.

17. 혁명 전날 The day before the revolution
장편소설 '빼앗긴 자들(The Dispossessed)'에 나오는 오도주의 사상가 오도에 관한 이야기다. 장편을 끝내고 외전으로 만든 단편이다. 오도주의는 일종의 무정부주의다.

이 책을 다 읽는 데 5일이 걸렸다. 읽는 속도가 빠르고 이해력이 높다고 해도, 이 책은 빠른 독서를 용납하지 않는다. 빨리 읽으면 남는 게 없고 느낄 수 있는 것도 적다. 천천히 읽으면서 글쓴이가 전하려는 감정과 심리를 느끼길 바란다.

Posted by 러브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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