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 (1866)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홍대화 | 열린책들 | 2016


범죄소설이지만 추리소설은 아니다
열린책들 2023년 4차 수정 전자책이 있는데 예전 번역으로 읽고자 헌책을 구입했다. 열린책들 창립 30주년 기념판 1040쪽짜리 더블 벽돌책이다. 500쪽 X 2. 가지고 다니며 읽기에는 불편하지만 집에서 누워 읽기에는 편하다. 책 읽는 것이 아니라 고봉밥 먹는 기분이다. 좋다.
아무래도 이 책은 독서용보다는 장식용이다. 뒤표지 도 선생 캐리커처 때문에 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작가 연보 1866년 보니까 죄와 벌은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1월 14일 고리대금업자 뽀뽀프와 그의 하녀 노르만이 대학생 다닐로프에게 살해되고 금품을 강탈당함." 1029쪽. 대학생이 고리대금업자를 도끼로 살해하는 사건 자체는 작가가 상상해서 꾸며낸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사건이 신문에 보도된 것을 가져다 쓴 것이다. 신문기사 한 꼭지를 기나긴 장편소설로 바꿔 놓다니.
이미 여러 번 읽은 책을 다시 읽어도, 좋은 것은 여전히 좋다. 문장은 익숙하지만 그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은 낯설고 예리한 감각을 준다.
범죄자의 머릿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써내는, 도 선생님의 필력은 읽을 때마다 놀랍다. 깊게 파고들어가서 끝장을 보는, 심리 묘사만큼은 이 작가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 그의 스타일을 흉내를 내서 어느 정도 해내도 좋은 평가를 들으니까 그렇게들 소설가들이 이 책에 도 선생한테 환장하는 것이다. 소설가들의 선생님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그 누구도 추리소설이라고 하지 않는다. 범죄소설이라고 한다. 장르소설로서의 재미가 없다. 스릴러로 읽었다는 사람도 있던데, 얼마나 필력이 압도적인지 보여주는 예다, 애초에 종교소설이다. 독자 입장에서는 쓸데없이 보이는 장면은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갑자기 대지에 키스를 한다든지, 굳이 해당 성경 구절을 읽는다든지.
너 왜 사람을 죽인 거야? 돈 때문에요. 끝. 이런 식이 아니다. 그런 거였으면 이야기 시작부터 주인공이 그렇게 괴로워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인간 영혼과 신 존재에 대해 열광적으로 말하고 싶었고 그렇게 썼다. 독자가 그걸 받아들이느냐는 별개지만.
작가가 이 살인자를 다루는 의도는 무신론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서다. 그다지 성공한 것 같진 않지만. 독자는 오히려 이 무신론에 매료되어 공감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래도 현대는 무신론자 혹은 종교에 관심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으니까.
종교는 믿고 싶다고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교회 다닌다고 믿게 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어떻게 애를 써도 불가지론자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해당 종교를 이해하는 것과 믿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이 소설을 읽고 유신론자가 될 가능성은 그다지 없겠지만 인간 영혼의 뜨거운 감정을 느끼지 않기란 어려울 것이다. 소설은 예술이지 종교도 철학도 정치도 아니다.
사이코패스 살인자 이야기를 현실에서건 픽션에서건 자주 접하다 보니, '죄와 벌' 주인공은 예외적인 인물로 보인다. 작가의 의도에 따라 고립감과 양심에 괴로워 한다. 그러니 엄밀한 의미에서 제대로 된 범죄소설도 아니다. 종교소설이 맞다.
포르피리. 뽀르피리. 소설 '죄와 벌' 등장인물 이름 중에 유일하게 쉽게 기억된다. 피리라서? 주인공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인물이다. 단지 이해 받는 것만으로는 주인공이 구원의 길에 이르지 못한다. 소냐는 그래서 나오는 인물이다. 로쟈는 무조건의 사랑을 받으면서 부활의 길에 들어선다. 범죄를 다루지만 종교소설이 되어 버린 이유다. 끝이 추상적으로 끝나는 것도 그래서다.
안타깝게도, 이미 아는 이야기 내용을 다시 확인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감정과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책도 처음 읽었을 때의 감각과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추리소설은 말할 것도 없고 '죄와 벌' 같은 고전 걸작조차 그렇다. 늙는다는 것은 이런 것 아닐까. 처음 경험하는 것이 거의 없는 상태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결국 뭔가. 철학적인 살인자와 성스러운 매춘부의 사랑 이야기다.
2025.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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