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핌의 선택
조세핀 테이 지음
이리나 옮김
블루프린트 펴냄
3점 ★★★ 무난해

오늘날 우리나라 독자들한테 쉽고 편하게 읽히게 번역하는 것이 좋긴 하지만, 소설(외국소설이라면 더욱)의 시대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하는 것이 상식이고 예의다. 7장 끝에서 '재테크'가 나와서, 고속버스 타고 잘 가다가 급정거한 기분이었다. 사극 드라마에서 전자 손목시계 나온 것보다야 덜하지만. 

추리소설에서 특정 지역, 나라 사람은 이렇다 저렇다 하고 특정 외모를 지난 사람은 이런 성격 저런 기질이 있다느니 하는 말은 늘어 놓다니. 심리학자가 자기 전공을 버리고 관상 책을 써야겠다고 하면서 끝나다니. 관상이라니. 이 찬란한 필력으로 그렇게 쓰다니. 눈썹. 아이고야.

사건 수수께끼가 지나치게 늦게 나오고 결정적 증거 혹은 단서가 단순하다. 반전이 있다. 바로 이 반전이 조세핀 테이의 강조점이다. 미스터리의 재미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성찰로 마무리한다. 그렇다, 사람은 웬만해서는 변하지 않는다.

대학 졸업 반의 갈등 구조 속에 과연 이걸 고발해야 하나 말아야 하는 루시 핌의 고민. 사건 해결보다는 이런 상황이 더 흥미로웠다. 그 물건 하나로는 기소가 될 것 같지 않던데...

2024.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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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의 양초
조세핀 테이 지음
이리나 옮김
블루프린트 펴냄
2016년 9월 발행
2점 ★★ 에효


:: 오빠한테 양초 살 돈 1실링만 남긴 유서

추리소설은 제목이 대개 주요 단서, 힌트,  혹은 맥거핀(중요한 척하는데 시선 돌리기일 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크리스틴의 양초. 크리스틴은 희생자 이름이고 그 사람의 양초라면 단서일 텐데, 초반 아무리 읽어도 양초는 안 보이고 옷에서 떨어진 싸구려 단추가 엄청 중요하다. 그 단추가 범인의 옷에서 떨어졌다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초중반에 와서야 양초가 등장한다. 유서에 나온다. 

'오빠 허버트에게 양초 살 돈으로 1실링' A Shilling for Candle 원서 제목은 유서 내용 그대로다. 초 살 돈 1실링. 크리스틴의 양초가 아니라 허버트의 양초다.

주 용의자는 유서에서야 갑자기 등장한 오빠가 아니라 아주 가까이 최근까지 같이 지내던 사기꾼 같은 남자 로버트 티스덜이다. 최근 작성한 유서에는 그한테 많은 재산을 주는 것으로 나와 있다. 범인인가? 하는 행동을 봐서는 너무 바보 같아서 아닌 것 같은데... 연기라면 대단한 배우겠고. 티스덜은 도망을 치고 그런 중에 자기가 죽였다는 미치광이 여자 등장에 그랜트 경감은 짜증이 나서 미칠 지경이다.

내가 범인이라면? 내가 그라면 다음 행동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다시 스스로 대답해 보는, 두 경찰의 모습이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수사과 경찰이라면 정말 이렇게 할 것 같다. 용의자는 놓치고 수사는 진전이 없다. 진짜 수사는, 코트 찾아 삼만리, 에리카라는 소녀가 맡게 된다. 갑자기 청소년 탐정 소설이 되네.

이야기는 용의자로 이 사람 저 사람 짚어 보다가 다시 허버트와 양초에게로 되돌아간다, 드디어. 이제 후반부다. 그리고 그 망할 단추 떨어진 코트도 찾아낸다. 여기까지 읽었어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 드러난 정체는 정말이지 너무하네. 계속 헛짓했던 거네. 참, 유서는 뭐야? 여전히 의미를 모르겠는데... 맥거핀이었나?

이 작가는 추리소설이라면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대놓고 하는데,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썼는지 모르겠다. 사람 외모를 보고 판단하고, 경찰이 감으로 수사하고, 결정적인 사람이 이야기 끝에서 자백 혹은 증언을 한다. 초중후반까지 범인이나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없으면 그게 미스터리라고 여긴 모양이다. 끝까지 읽어 준 독자에 대한 예의라고는 십원 한 푼어치도 없는 작가다.

조세핀 테이의 소설은 이야기가 아니라 문장 때문에 읽는다. 아, 정말 글 잘 쓴다. 이야기는 잘해 봐야 2루타지만 문장은 언제나 홈런이다. 문장 속에 살고 싶을 지경이다. 아, 그놈의 관상쟁이는 그만했으면 싶은데, 정말 꾸준히도 나온다. 미스터리 빵점. 문체 백점.

사랑에 빠져도 결점을 무시하지 않는다. 
잘 알고 있으면서 그것마저 끌어안는다. 
그래 그게 사랑이다. 

뭐야? 어느새 조세핀 테이 문체 흉내내고 있네.
사랑했다, 조세핀 테이의 문장을.
잊으리라, 조세핀 테이의 미스터리를.

202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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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랫 패러의 비밀
조세핀 테이 지음
권영주 옮김
시공사 펴냄
2012년 12월 발행


'프랫 패러의 비밀'은 조세핀 테이 소설 중에서 드물게 가장 긴장감이 넘치는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중후반부터는 끝이 궁금해서 읽기를 멈추기 힘들었다. 이 작품이야말로 추리소설답다. 범죄 미스터리 장르에 부합하게 잘 만든 소설이다.

소재는 흔하고도 유명한, 부잣집 유산을 가로채기 위한 신분 사기다. 그런데 중반에서 살인 미스터리로 바뀌더니, 후반에는 대결 구도로 전환시키고, 결국에는 모든 의문을 해결한다. 그리고 어느새 해피엔딩에 이른다.

혼잣말을 통한, 세세한 심리 묘사. 마치 오늘 만난 이웃을 보는 듯한, 생생한 인물 묘사. 어제 내가 했던 친구랑 수다를 연상시킬 만큼 자연스러운 대화. 여기에 과하지 않으면서 잔잔하게 살포시 전개하는 로맨스까지. 다른 작품에서처럼 폭소를 자아내는 유머는 아쉽게도 이 소설에는 없었지만, 자잘한 농담과 깨알 우스개는 여전히 선보였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종이책을 빌려 읽었는데, 그때 초반까지만 읽고 말았었다. 이번에는 전자책으로 읽어 완독했다.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초반을 넘기자 중반부터 환상적인 미스터리가 전개되었고 아름다운 끝 장면을 맞이할 수 있었다.

추천한다.

202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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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사랑
조세핀 테이 지음
이리나 옮김
블루프린트 펴냄
2016년 1월 발행
전자책 O
종이책 X

아, 드디어 로맨스소설을 읽는구나! 잉? 아니네. 추리소설이네. '눈 먼 사랑'은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과는 정반대다. 연애소설을 읽는 줄 알았더니 중반에 추리소설로 바뀐다. 정말 궁금하게 했다. 알고나면 시시해지니까 여기서 언급은 안 하겠다. 시작할 때부터 뭔가 좀 이상하다 싶긴 했지.

조세핀 테이는 이야기를 잘 쓰는 작가는 아니다. 하지만 글 쓰는 솜씨가 워낙 좋은지라 이야기가 이리도 지루한데도 좋아라 문장 하나하나 달콤하게 읽어내게 된다. 이게 말이 되나. 문장은 참 재미있다.

대개들 이야기 초반부를 읽고 로맨스를 기대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작가가 독자한테 안기는 것은 미스터리다. 살인은커녕 그 흔한 타박상도 안 보이는 사건이라니.

 



한 여인을 두고 두 남자가 경쟁하는 삼각구도다. 한쪽 남자는 보는 순간 여자들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잘생겼다. 여자는 흔한 미남이고 그래 봐야 사진작가일 뿐이라며 애써 떨쳐내려고 하지만 자꾸만 끌리는 것을 염려할 지경이다. 딱 봐도 로맨스 소설의 전형적인 설계도 아닌가. 이렇게 깔아놓고 실종 미스터리 해결로 마무리를 짓다니. 아, 너무하네 정말.

살포시 웃기는 것은 여전했다. "시도 써요?" "시 안 쓰는 사람도 있어요?" "비근한 예로 나는 안 씁니다." "말도 안 돼요!" "책 써서 돈 벌어 먹고사는 건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닌 것 같아."

또 은근 어둡고 심오하다. "평생을 사랑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성장한다는 의미겠지요."

책 읽다 보면 글 쓴 사람이 궁금할 때가 있는데, 요즘 조세핀 테이가 그렇다.

2024.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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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조세핀 테이 지음
권영주 옮김
검은숲 펴냄
2011년 8월 발행
전자책 O


보니까 딱이네. 여자애가 거짓말 하는 거네. 더 궁금할 게 없었다. 더 읽을 필요가 없었다. 더 궁금하지도 않고 더 알고 싶은 것도 없다면 왜 더 읽는가. 어느새 나는 계속 읽고 있었다. 

그럴 때 있지 않은가. 영화 보는데 재미는 없는데 배우가 마음에 들어서 끝까지 다 보는 경우 말이다. 소설책도 그럴 때가 있다.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큰 재미가 없는데 문장이 좋은 것이다.

문장이 좋다. 차분하고 착실하다. 성실하게 나아간다. 인물들을 소소하게 세밀하게 표현해낸다. 게다사 살포시 우스개까지 얹는다. 이 정도 필력이면 아무리 시시한 이야기라도 읽혀진다. 벼룩 죽이기 대화 장면에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실제 있었던 옛날 사건을 순화하고 이름 바꿔서 다시 그 진실을 찾아보자는 의도는 이해했는데, 살인 사건도 아니고 실종 사건이고 드러난 진실도 딱히 놀랍지도 않으니, 심심했다.

마지막 장면은 로맨틱 코미디다. 그냥 연애소설이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전자책으로 정독했다. 읽기 편해서 좋다. 깨끗하다.

두 번째 읽은 거라서 대충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추리소설이 아니라 로맨스, 연애소설로 읽었다. 알콩달콩 달달하니 재미있었다.

조세핀 데이의 유머는 소소하게 은근히 웃긴다. 벼룩 잡기로 이렇게 웃긴다.

"댁도 벼룩을 물에 빠뜨려 죽이나요, 블레어 씨?"
"아뇨, 전 눌러 죽입니다. 제 여동생은 비누를 들고 쫓아다니곤 했죠."
"비누라뇨?"
사프 부인이 호기심을 보였다.
"물렁한 쪽으로 때리면 벼룩이 들러붙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 참 흥미롭기도 하지. 처음 들어보는 기술인데요. 나도 다음에 한번 해봐야겠군요."

추리소설로서는 정말이지 별 하나도 아까울 지경이다. 결정적 증인이 갑자기 등장해서 사건이 해결되는 식이라니. 주인공이 끈질긴 수사와 뛰어난 추리력으로 해내는 장르 규칙은 따를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작가 본인의 분신으로 보이는 인물, 매리언을 통해 이 사건의 진짜 피해자는 범인의 어머니임을 다음과 같이 말하며 공감과 동정을 불러 일으킨다.

"그 오랜 세월 같이 살고 사랑했던 사람이 그냥 존재하지 않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만큼 더 충격적인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렇게 사랑했던 상대방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한테 관심이 눈곱만큼도 없고 전에도 없었다는 걸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런 사람한테 대체 뭐가 남아 있죠?"

대개의 추리소설, 법정소설에서는 정의실현의 승리감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원고도 피고도 아닌, 범인을 사랑했던 엄마에 대한 동정으로 마무리된다. 그 고통을 강조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감동을 조세핀 테이한테서 느낄 줄이야. 예상밖이었다.

이야기는 물론 지루하다. 매번 나오는 그놈의 관상 이야기는 짜증난다. 하지만 인물 묘사력은 명품 도자기 같다. 손으로 작고 알차게 빚은 만두 같은 유머는 맛있다. 나, 이 작가 사랑한다.

덧붙임 : 서양의 현대 마녀 사냥 이야기는 비슷했다. 셜리 잭슨의 장편소설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랑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은 거의 같은 모습이다. 집이 불타고, 이를 즐거워 하는 주변 사람들이 즐거워한다. 다른 점은 그들의 최후였다. 잭슨 이야기에서는 마녀들이 계속 거기 살았으나 테이 이야기에서는 그곳을 떠난다.

2024.7.29

Posted by love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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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가 병원 침실에 누워서 역사 미스터리를 푼다. 리처드 3세는 정말 두 조카를 죽였는가? 역사책을 읽고 사료를 조사해서 교과서에 나오는 통념의 역사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깨닫고 경악한다.

영국의 역사에 흥미가 있는 사람들은 재미있게 읽을 것이다. 추리를 가장한 역사소설이란 평도 있으니. 역사에 관심이 없는 이들한테는 지루하다.

시작부터 웃기고 유쾌한 진행이다. 오밀조밀 개성있게 그려낸 인물 묘사라니, 역시 조세핀 테이다. 벽 천장 노려 보는 첫 문단은 왜 이렇게 재미있나 몰라. 영국 역사 미스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흥 그랬구나 그랬어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런 식이었지만.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중간까지 읽다가 포기한 것이 세 번 정도였다. 역사에, 영국 역사에 큰 관심이나 딱히 흥미가 없다 보니 그랬다. 종이책으로 읽다가 포기한 부분부터 전자책으로 바꿔서 마저 다 읽어냈다. 대단한 대단원은 없었다. 소소하게 끝난다.

문체는 정말 마음에 쏙 든다. 당장 작가랑 만나서 커피 한 잔 하고 싶을 지경이다. 문장 참 좋다. 편안하다.

조세핀 테이. 이야기 자체에는 흥미롭지 않지만 등장 인물의 묘사는 와 정말 대단하다.

국내에는 이 작품 번역본이 셋이다. 동서문화사, 엘릭시르, 블루프린트.

동서문화사는 다들 알 거라 믿고 거른다. 모른다고? 추리소설 처음 읽는 모양이군.

엘릭시르 번역본 - 읽기에 편한 의역

엘릭시르는 우리나라 독자들한테 읽기 편하도록 의역했다. 직역하면 어색하고 뭐지 싶은 부분을 잘 다듬어 놓았다. 옮긴이 주석과 설명 삽화가 있다.

블루프린트 번역본 - 원문에 충실한 직역, 본문에 초상화 수록

반면 전자책으로만 나온 블루프린트의 번역은 직역이다. 원문에 충실하고 철저하게 잘 번역하려고 했던 것 같다, 원서를 안 본 이들한테는 이해가 안 되겠지만. 읽기는 불편하다. 종종 이건 뭐지 싶을 때가 있다. 외국소설 읽을 때마다 그렇긴 하지.

책 표지로 리처드 3세 초상화를 해야 하지 않나. 적어도 책 안에 넣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출판사에서 왜들 안 그랬는지. 전자책으로만 나온 블루프린트에서는 본문에 초상화 넣어 주었다. 

2024.07.19

Posted by love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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