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살 클럽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임종기 옮김
열린책들 펴냄
이 책은 몇 번인가 제목 때문에 눈길이 갔다. 뭘까? 새로 나온 추리소설인가. 일본 작가인 모양이군. 궁금해서 책장을 열어 보니, 보물섬을 쓴 바로 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쓴 소설이다. 모험소설이라면 모를까, 범죄소설은 아니다 싶었다.
그렇게 안 읽고 있는데, 도서관 서가를 거닐 때마다 '자살 클럽'이라는 제목의 책이 계속 보였다. 호기심을 이겨낼 고양이, 아니 사람은 없는 법. 때마침 열린책들 세계문학판 번역으로 나왔고 도서관에 새 책으로 얌전하게 꽂혀 있어서 드디어 읽었다.
역시나 스티븐슨은 모험소설가였다. 소재가 범죄더라도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모험극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위험을 무릎쓰고 기괴한 사건을 직면한다.
기승전결로 이야기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식이 아니다. 기이하고 이상한 일들이 터지고 그런 사건에 휘말리다가 그냥저냥 대충 마무리된다. 뭐야 이게 끝이냐? 그러면 끝이다. 한참 재미가 나서 다음에 어떻게 될까 궁금증이 고조되면 바로 끝이다. 초점은 사건의 완벽한 종결이 아니라 사건 그 자체의 체험이다.
이 책은 총 4편을 골라 실은 단편소설집이다.
[자살 클럽]
아라비안 나이트 이야기 형식이다. 보헤미아 왕자의 모험담 외형으로 기괴한 범죄를 보여준다. 연재하는 식으로 세 편으로 쪼개져 있다.
- 크림 타르트 청년 이야기 : 삶의 권태와 파산에 몰린 사람들이 자살 클럽을 운영한다. 임의로 카드를 돌려 클럽 에이스를 가진 자가 스페이드 에이스 패를 쥐게 된 자를 죽인다.
- 의사와 사라토가 크렁크 이야기 : 시체를 여행가방 트렁크에 실어 운반한다. 당사자는 시체가 발견될까 봐 안절부절인데, 주변 사람들은 가방 안에 돈이 가득 들었다고 단정한다.
- 이륜마차의 모험 : 임시 도박/연회장을 마련해 용사를 모집하고 악당과는 일대일 검투로 정의를 실현한다. 자살 클럽 회장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린다.
[시체 도둑]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1829년 해부학 실습용 시체를 공급하기 위해 16여 명을 죽인 두 사람은 그 다음해 사형에 처해졌단다.
액자식 소설이다. 나는 젊은 시절 의학을 공부했던 페테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페테스는 해부용 시체를 관리하면서 무서운 일을 경험한다. 전날 희롱했던 소녀가 시체로 들어오고 어제 동료와 다투던 남자가 오늘 해부용 시체로 들어온다.
전개는 모험소설이고 마무리는 공포소설이다.
[병 속의 악마]
소원을 들어주는 악마가 있는데, 병 속에 있다.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이라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소재를 차용해서 익살스럽게 현대식으로 바꿨다.
이 병을 사고 팔 때 규칙이 있는데, 산 가격보다 더 적은 가격으로 팔아야 한다. 가격은 점점 작아져 현재 자기 나라의 통화로는 더 싸게 팔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화폐 단위가 더 작은 나라로 간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사랑한 나머지 그 병을 사고 또 되팔고를 반복하다가 한계에 이르는데...
심각하게 파국 직전으로 가던 이야기가 웃음으로 유쾌하게 끝난다.
[말트루아 경의 대문]
아라비안 나이트 이야기 풍이다. 때는 1429년 세상은 전쟁 중이다. 드니는 밤중 길을 잃어 헤매던 중 적군한테 들켜 도망치던 중 대결을 하려고 칼을 뽑아 들고 등을 대문에 대자, 놀랍게도 문이 활짝 열렸다. 일단 몸을 숨기고자 들어가자 문이 스스로 닫혔다.
성에 갇힌 청년은 노인으로부터 자신의 조카딸과 결혼하거나 죽으라고 강요한다.
갈등에 비해 결론은 흐지부지다. 남녀가 서로 얘기해서 그냥 부조리한 현실에 타협하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이다.
스티븐슨의 소설은 모험에의 매혹이다. 기승전결식으로 딱딱 사건이 들어맞고 확실하게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기이하고 이상하고 위험한 일이 일어난다. 독자는 그 모험을 글로 체험한다.
그의 소설에서 악당은 근사하다. 왜? 위선이 없기 때문이다. 위선적인 도덕에 침을 뱉는다. "난 선천적으로 모든 위선적인 것들을 경멸해요. 지옥, 신, 악마, 정의, 부정, 죄악, 범죄, 이런 따위의 낡은 골동품들은 어린아이들이나 무서워 하죠. 선배나 나같이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은 그것들을 경멸하죠." 156쪽
놀라움과 호기심 충족을 위한 모험 이야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이 지점이다. "처음엔 놀라움에 오싹한 기분이 들었지만, 놀라움은 곧 은근한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136~137쪽 아무리 읽어도 교훈은 없으며 좋은 문장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흥미로운 모험이 가득하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이야기 형식을 가져다가 자기 시대의 이야기로 바꾼 점이 흥미로웠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은 기이한 모험에 매혹되어 점점 빠져드는 인물에 공감되면서 이야기의 재미가 증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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