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걸 조로 - 열린책들 세계문학 074 - 존스턴 매컬리 지음, 김훈 옮김/열린책들 |
제가 어쩌다 이 책을 읽게 되었는지부터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이 책을 곧장 발견하고 곧장 읽은 것이 아니라, 열린책들 세계문학 접집 전자책을 훑어 보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해서 읽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기준과 의도를 갖고 열린책들 세계문학 전집에서 읽을 책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가장 첫 번째 기준이 읽기 쉬운 책일 것. 그 다음 기준은 러시아 소설은 웬만하면 읽지 말 것.
열린책들 세계문학은 주로 러시아 문학을 많이 수록한 세계문학전집입니다. 이 전자책 전집을 샀을 때, 제 의도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전집으로 소유하자는 것이었고요.
결과는 엉뚱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읽기를 전자책이 아니라 '종이책'으로 해냈습니다. 다시 전자책으로 읽으려고 하니까 잘 안 되었고요.
다시 열린책들 세계문학 전자책 세트를 열어서 '죄와 벌'을 세 번 정도 읽을 후에는 다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을 읽지 않기로 했습니다. 톨스토이도 마찬가지고요. 러시아 문학과는 결별하기로 했습니다. 완전히 안 읽겠다는 아니고, 만약에 쉽게 잘 읽힌다면 읽기로 했습니다.
셰계문학전집이라는 거대하고 육중한 제목 아래 모여진 책들인데 과연 읽기 쉬운 책이 있을지는 무척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러다 이 책을 만났습니다.
쾌걸 조로.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정말? 열린책들 세계문학은 독특하게도 가끔식 이런 책이 들어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막상 실제로 대하니 기분이 이상하더군요. 기존 셰계문학전집의 책이라는 상식에서 벗어났죠.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글을 쓰는 것은 최근에 읽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을 많이 읽은 탓입니다. 어쩌겠어요, 여러분. 받아들이세요. 나도 도 선생한테 당한 만큼 당신들에게도 돌려주겠어. 푸하핫. 으하핫. 정신 챙기고 다시 글 써야지.
전자책으로 읽었습니다. 종이책과 달리 분량을 알지 못하고 무작정 읽어 나아가기 시작했고 결국 다 읽었습니다. 종이책 분량을 확인해 보니 315쪽입니다. 결코 분량이 작은 책은 아닙니다. 하지만 잘 읽힙니다. 이야기가 워낙 간결하고요. 사전 진행이 순서대로 나오고요. 어쩌면 너무 단순하고 직선적이라서 살짝 실망할 수도 있겠더군요.
이 글의 핵심인, '읽기 쉬운 책'이 분명합니다. 쾌걸 조로는 확실히 쉽게 읽히는 책입니다. 대중소설이죠. 어쩌면 너무 만화 같다고 불평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조로는 소설책이 원작입니다. 우리가 흔하게 자주 접했던 것은 영화로, 만화로 나온 조로죠. 원작의 캐릭터와 대립 구조만 가져다 새로 다시 만든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원작 소설을 읽어 볼 만한 것이죠.
조로는 아는데 정작 조로의 창작자인 '존스턴 매컬리'는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이 책 읽고서야 알았습니다. 쓴 작품이 대중적으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음에도 작가 개인 사생활은 그다지 알려진 게 없습니다. '검은 별'도 이 분이 썼더군요.
아쉽게도, 국내에 번역된 존스턴 매컬리의 책 중에 구할 수 있는 것은 현재 딱 이 한 권입니다. '검은 별'은 페이퍼하우스에서 번역 출간했으나 절판되었고요. 저는 검은별 하면 MBC에서 했던 노래가사가 떠오릅니다.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 어린이 인형극으로 나왔었습니다. 모여라 꿈동산이라고, 거대한 탈바지를 쓰고 하는 건데요. 그 시절에 저는 어린이였습니다. 국민학교 학생이었죠.
초등학교를 예전에는 국민학교로 불렀습니다. 제가 다녔던 대학의 한국사 교수님은 국민학교가 일제의 잔재이니까 초등학교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던 분들 중에 한 분이셨습니다. 그 교수님은 보수 권력자들한테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소설 '쾌걸 조로'에는 부정한 권력에 올곧은 말을 하는 펠리페 신부가 나옵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구려, 신부!"
"자꾸 그랬다간 권력을 가진 분들한테 혼쭐이 날 거요."
"나는 정치가들을 두려워하지 않소."
"말투가 어째 마음에 들지 않는구려."
진보든 보수든 공산주의든 사회주의든 자유주의든 기독교든 천주교든 조계종이든 친문이든 반문이든 친박이든 반박이든 그 뭐든 그게 권력이면, 그 권력에 반박하는 자는 탄압을 받게 됩니다. 그분들은 그렇다 치죠. 웃기는 것은, 그 권력에 전혀 아무런 의사 표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단지 힘이 없고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착취를 당하고 고난의 쓴맛을 봐야 합니다.
"아, 정말 어지러운 시대야! 이런 시대에는 조용히 들어앉아 음악과 시를 즐기면서 명상도 할 수 없단 말인가?" 돈 디에고가 자주 하는 말입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한숨을 쉬면서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하죠. 소설의 마지막, 화려하고 통쾌한 끝을 장식하는 대사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 말은 이중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밝혀지죠.
조로 이야기는 애써 여기서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 것입니다. 워낙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니까요. 다만, 원작소설로 읽어 본 사람이 많지 않을 뿐이죠.
모르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스포일러를 막기 위해서 더는 자세히 얘기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뭐 좀 말을 해야 하고 하고 싶으니까 재미를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더 써 보겠습니다.
조로는 영웅주의 대중소설의 대표적인 캐릭터입니다. 불의한 자들과 싸우는데, 다분히 신사적으로 싸웁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조로가 사람을 죽인 경우는 딱 한 번인데, 그것은 사회 풍습상의 결투로서 정당한 것으로 처리됩니다.
혹시나 민중 반란이나 정권 교체 같은 진지하고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이야기를 바라진 마세요. 부정한 권력자에 대한 대립은 평화롭고 보수적으로 끝납니다. 유혈 사태 같은 것은 거의 안 나옵니다. 다소 실망스럽게도, 귀족 자제들의 정의로운 반란으로 권력자인 이 지방 지사와 대화해서 더는 박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끝납니다.
제가 느낀 이 소설 '쾌걸 조로'의 재미는 그런 영웅주의 이야기보다는 그런 사건 전개 중에 깨소금처럼 끼어드는 웃음입니다. 롤리타 아가씨와 돈 디에고 베가의 연애는 정말 웃기죠. 장비를 연상시키는 캐릭터 '곤잘레스'의 허풍도 재미납니다.
소설 1장과 2장과 3장만 읽어 봐도 깔깔거리며 웃게 될 겁니다. "그 순간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이런 장면이 두 번 나옵니다. 동일 상황, 같은 말, 같은 행동을 반복해서 웃기는 거죠.
다 읽고나니, 춘향전을 읽은 것 같았습니다. 이상하네. 왜 이러지? 그럴 만했습니다. 워낙 옛날에 나온 이야기더군요. 비슷한 점이 많아요.
조로 이야기는 1919년에 처음 출판물로 나왔습니다. 대중잡지 연재물이었고요. 제목은 The Curse of Capistrano, 카피스트라노의 재앙이었습니다. 직역하면 저주인데, 이 우리말 번역본에는 재앙으로 나오네요. 1927년에 The Mark of Zorro 조로의 마스크라는 제목으로 단행본으로 나왔습니다.
조로는 스페인어로 여우를 뜻합니다. 나쁜 놈들한테 검 끝으로 뺨에 Z자를 그려 놓지요.
소설을 읽어 보면, 아직도 신분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귀족, 고귀한 신분 어쩌고 하면서 나오고 인디언이나 농부는 하급 계층으로 나오고요. 그래서 계급 반란이나 민중 폭동이 아니라 지배계층끼리의 점잖은 대화와 협약으로 갈등이 마무리됩니다.
춘향전과 이야기가 비슷하더군요. 이몽룡이 암행어사 신분을 속이고 춘향이를 놀리는 대목이나 돈 디에고 베가가 조로로 속이고 롤리타 아가씨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그렇고요. 마지막에 자기 정체를 밝히면서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것도 그렇네요.
다른 점은, 춘향은 기생의 딸이지만 롤리타는 귀족의 딸입니다. 비록 약간 몰락한 귀족이지만, 절대 천한 신분은 아니었죠. 그래서 조로 이야기가 춘향전보다 더 보수적으로 느껴집니다.
부정한 권력이 있는 세상에서 이런 영웅 이야기는 불멸입니다. '쾌걸 조로'는 불멸입니다. '춘향전'은 불멸입니다. 권력은 일어났다가 사라져도 정의는 불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대한민국 현실은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 지구촌은 어떤가요? 조로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아, 정말 어지러운 시대야! 이런 시대에는 조용히 들어앉아 음악과 시를 즐기면서 명상도 할 수 없단 말인가?"
어지러운 시대에 읽기 쉬운 책 '쾌걸 조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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