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안도현 엮음
김기찬 사진
이가서
안도현의 시가 있는 시집이 아니라 그가 고른 시에 감상과 해설을 덧붙인 시선집이니, 행여 안도현의 시를 읽겠다고 이 시집을 집어 들진 마시길. 그의 시는 한 편도 없으니까. 안도현의 취향과 시를 보는 눈이 마음에 든다면 모를까, 이런 시선집을 선뜻 집어 읽기는 썩 내기지 않았다. 나는 안도현의 시를 한 편도 읽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왜 이 책에 감동했는가.
책을 펴서 시를 읽기 시작했으나 끌리지 않았다. 그냥 덮을까. 더 책장을 넘겼다. 사진. 뭐야 이게, 사진과 시의 부조화. 덮을까 말까. 다음으로 넘겼다. 또 다음. 갑자기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내 눈이 사진 속으로 스며들어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나는 울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김기찬이라는 분이었다. 흑백 사진에 옛 우리네 도시 풍경을 따뜻하게 담아서 보여준다. 연출의 흔적도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억지스럽진 않았다. 많이 기다렸다 찍었으리라. 그림자를 찍기 위해서 인내했으리라. 허나, 나를 울린 것은 사진 찍는 기술이 아니라 사진이 담아낸 그 정감과 추억이었다.
좋아하는 시를 수첩이나 공책에 적어 갖고 다니면서 틈틈이 읽어 본 경험이 다들 있지 않나. 감상과 평까지 붙일 정도는 아니고 그냥 좋아서 말이다. 시 전체도 아니고 시의 일부인 경우도 있지 않나. 그런 시가 내게도 한 편 있었다. "눈물 섞어 마신 술, 피보다 달더라." 이육사의 시인데, 제목은 잊었으나 그 시구만은 기억한다. 이젠 별 감흥이 없으니, 세월이란 참.
시인들도 필사를 하는 모양이다. 좋은 시를 읽으면 그 시를 노트에 필사해 보고 이모저모 뜯어 보나 보다. 시를 외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지난 학창 시절 내내 강요 받은지라, 이렇게 시를 베껴 써서 천천히 감상한다는 걸 이전에는 해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 시선집은 시를 천천히 즐기는 방법을 내게 갈쳐 주었다. 고마운지고.
딱히 기억에 남는 시는 없었지만, 김기찬의 흑백사진과 시를 즐기는 방법을 안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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