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갈릴레오 3
[용의자 X의 헌신]
容疑者Xの獻身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현대문학 펴냄 2006년 9월 발행
재인 펴냄 2017년 8월 발행

헌신적 사랑

추리소설 맞아? 뒤집어진 추리소설이다. 어떻게 하면 나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할 수 있을까? 설정은 신선했는데, 결말은 진부했다. 공격은 탐정(물리학자)과 형사가 하고, 방어는 용의자(수학자)와 모녀(살인자)가 한다. 범인을 알아버리면, 추리소설은 맥이 빠져버린다. 더 읽을 이유를 상실한다. 아예 이야기 시작에 범인은 물론이고 범행과정까지 보여준다. 아이고, 어쩌려고 이런 무모한 짓을? 헌신적 사랑을 위해?

사람들이 이 소설 재미있다고 얘기하고, 또한 그동안 히가시노 게이고가 엄청 잘 쓴 소설은 쳐다도 안 보다가 이 소설에 문학상까지 얹어준 이유는 뭘까? 제목에서 이미 결론이 나왔듯, 헌신적인 사랑 이야기로 눈물 짜면서들 읽었겠지.

멜로드라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있다. 우리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보는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나더라. 이 소설은 폭력을 쓰는 남편의 학대를 이기지도 못해 살인을 저지른다는 내용이다. 흔해 빠진 얘기라고? 이런 일이 정말 일어나더라. 물론 용의자 X의 헌신 같은 일은 거의 안 일어나지만. 게다가 그 결말은 이야기를 위한 결말 같다.

제시하는 문제는 흥미로웠다. "자신이 생각해서 답을 내는 것과, 남에게 들은 답이 옳은지 그른지를 확인하는 것 중에 어느 게 더 간단한가." 339~340쪽 "그가 제시한 해답 말고는 절대로 다른 답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해답이 유일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어." 340쪽 선입견을 깨고 진실을 찾으려면 머리를 써서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은 생각하는 게 귀찮다. 그럴 듯한 답이 보이면 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감동 포인트는 맹목적 헌신이라기보다는 논리적 신념이다. 이는 비정상이다. "잘 되지 않을 때는 체념을 한단 말이지. 그것이 보통의 인간이 하는 행동이라고. 최후까지 지켜준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 342쪽

이시가미는 초인이다. 

2012.9.13

이시가마의 독백

촘촘하게 사건을 전개해서 보여준다. 이야기의 장인 정신이 느껴진다. 살인을 은닉하기 위한, 치열한 논리 구성력을 읽고 있으면 한발 한발 계단을 오르는 기분이 든다.

대결 구도를 만들면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진다. 탐정 갈릴레오의 적수가 될 만큼 천재적이면서도 끈질긴 수학자를 적수로 배치해서 읽는 내내 재미있다.

1인칭으로 쓰여진 소설은 아니지만, 이시가마의 독백을 들려주는데 마치 1인칭 하드보일드 소설을 읽는 듯했다. 완전히 타버린 남자지만 그래도 뭔가를 간절히 바라고 누군가를 반드시 구하려는 의지가 있다. 하지만 낭만적인 사랑이나 장밋빛 희망 따위는 없다. 우직하게 치열하게 자기 구원이라고 믿는 행위를 위해 치밀하게 논리적으로 생각할 뿐이다.

2014.7.11

내향인

후반부만 다시 읽어 봤다.

트릭 자체는 그냥 그랬다. 역시 [악의]가 트릭 기준으로 최고의 작품이다.

그 트릭을 이용한 이시가미의 헌신적 사랑은 이제 어째 딱히 별 감흥이 없었다.

이시가미는 그 좋은 두뇌로 왜 그렇게 찌질하게 살았는지. 화가 나더라. 너무 내향인이었다. INFP.

202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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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마술
禁斷の魔術
히가시노 게이고
재인 2024년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에 '용의자 X의 헌신'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금단의 마술'은 그에 비하면 잘해 봐야 범작이다.

레일건으로 복수 살인을 하려는 제자를 막으려는 유가와 이야기다.

살인 사건에 정치에 언론 기자에 과학 기술에 로맨스가 잘 엮여서 있어서 흥미로울 수 있다. 하지만 지극히 간단한 것을 장편소설 분량으로 늘리기 위해 굳이 꾸역꾸역 늘려 쓴 티가 팍팍 났다. 같은 얘기를 많이 반복한다. 게다가 신선한 내용이 없다. 이미 어디선가 읽었거나 들은 것이다.

후반부 훈계조 이야기는 다소 실망이었다.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복수는 개인적인 동기인데, 과학 윤리로 그 동기를 무력화시킬 수 있나?

그래도 술술 편하게 잘 읽혔다.

2025.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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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히가시노 게이고
현대문학
2008년 초판

히가시노 게이고는 소설 '악의'에서 인간성의 단면을 날카롭게 묘파해냈다. 추리소설 장르에서 안주하는 그저그런 이야기로 쓰지 않았다. 범인 찾기 놀이와 트릭 보는 재미로 독자를 위한 놀이 한마당을 열고 잊혀지는 소설이 아니었다. 이토록 읽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다니. 놀라운 솜씨다. 

소설 주인공 가가 형사의 수사만큼 끈질기게 기필코 우리 모두에게 있을법한 '그 괴물'을 기어끼 꺼내 코앞에 들이댄다. 이런 악의적인 작가는 그동안 만나지 못했다. 스콧 스미스의 '심플 플랜' 이후 이런 작품은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 여겼는데...

잘 팔리는 작가라고 해서 어떻게든 책에서 못난 점을 찾으려고 혈안이었다. 아무리 잘 써도 그냥저냥 괜찮네 정도로 폄하시켜 내가 소설을 쓰지 못하는 불행을 감추고 싶었으리라. 그래, 어쩌면 나도 또 한 명의 노노구치이리라. 이름부터가 마음에 안 들더니. 

초반부 서술 트릭을 읽을 때만 해도 별 기대를 안 했다. 뻔히 나 범인이라고 말하는 문장과 이 수기는 제 멋대로 꾸며낸 거라는 게 확연히 보였다. 시시하게 끝나겠네. 하하핫. 드디어 이 작가 씹어 줄 때가 되었다고 속으로 엄청 좋아했다. 후반부를 읽을 때까지도 여전히 나는 이 작가를 어떻게든 깔아뭉게 버리고 싶었다. 예상했던 반전이었다. 그래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데...

마지막 세 쪽에서 지고 말았다. 담배를 피울 수 있으면 좋으려만, 나는 담배를 못 피운다. 그저 찹찹한 심정을 삼키고 한 마디만 덧붙인다. 최고다.

악의
히가시노 게이고
현대문학
2019년 개정판

개정판으로 다시 읽은 '악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고작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지만 감상은 달라졌다. 세월도 많이 지나서 그런지, 트릭과 결말을 어느 정도 알고서 다시 읽어서 그런지.

당시 시대 기술 수준이 그대로 나오고 있어서 낡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포토앨범시디라니. 스마트폰, 인터넷, AI 시대에는 고대 유물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서술 트릭을 이 정도까지 완성시켰다는 점은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서술 트릭. 이 지점에서 이 소설의 호불호가 갈린다. 범인과 수법이 가장 나중에 밝혀지는 식을 선호하는 추리소설 애독자한테는 이 작품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초반에 범인과 수법이 밝혀지고 게다가 신뢰할 수 없는 화자 1인칭 시점 수기라니. 추리소설에서 싫어하는 것이 한 개도 아니고 두 개 연속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 소설은 악의라는 범행 동기를 밝혀내는 과정에 초점을 맞춰 정교하게 디자인된 작품이다. 반전 추리소설 기술력을 보여준다. 이게 최고가 아니면 뭘 최고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이 소설에서 바라는 것은 재미와 감동이다. 둘 다 있으면 좋지만, 둘 다 소설에 쓰기는 만만치가 않다. 그래서 그런지 '악의'보다 '용의자 X의 헌신'을 더 좋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나 자신도 이제 후자에 속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이 소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 선해도 미움을 받는다는 얘기다. 심지어 악의를 품어 선한 자를 죽이려고까지 한다. 인간 본성의 악한 측면을 인정하고 바라보는 것은 결코 유쾌할 수 없다. 악플 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일 수밖에 없나 보다. 집단 따돌림과 학교 폭력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그저 계속 외면할 것이다. 이런 생각에 빠져 버렸다.

학교 폭력(집단 따돌림)을 다루고 있지만 속시원하게 뭔가 해결해 주는 건 없다. 소설 '악의'는 좀 과하게 요약하면 악플 다는 인간 본성을 보여준다.

고양이 독살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 서술 트릭. 추리소설에서 1인칭 서술이 시작되면 거르는 게 낫겠다.

작가는 독자를 속이는 재미로 독자는 속는 재미로 추리소설을 읽는다지만 읽은 후 허무함을 달래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재미있었잖아? 그래 최고로 재미있었다. 그럼 됐지 뭐.

2024.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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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
히가시노 게이고
북다 2024년


묻지마 범죄 속에 숨겨진 의도적 살인


가가 형사 시리즈다. 이전에 나온 작품을 읽어야 하는가? 아니다. 이 장편소설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는 가가 형사 개인의 이야기가 없다. 처음 읽는다면 이 주인공에 대한 매력도 딱히 못 느낄 것이다. 그냥 형사라는 것 정도가 고작이다.

"교묘한 복선과 연이은 반전, 충격적인 결말, 재미." 그 어떤 추리소설에도 갖다붙일 수 있는 광고문구다. 복선 있지만 딱히 재미는 없었다. 반전 있지만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충격적인 결말인가? 실망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지난 작품에 비하면 잘해 봐야 평작이다. 처음에는 다소 지루하고 차츰 재미있어지고 결말을 보고 그럭저럭 나쁘지 않네 하고 책장을 덮을 수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이야기가 정말 끝내주거나 끝에서 눈물 펑펑 나서 손수건 없으면 감당이 안 될 지경이 된다. 잘 쓴 소설에서만 그렇다. 모든 작품을 다 잘 쓸 수야 없다.

소설은 '묻지마 범죄'를 다룬다. 자세히 수사에 들어가면 사건의 진상으로 또 다른 것이 숨어 있다. 작가는 여기에 방점을 두었다. 제목에도 그렇다고 얘기하고 있으니, 독자는 이를 기대하고 읽기 마련이다. 기대를 낮게 해라. 예전 작품의 수준을 기대하지 말 것.

그래도 책 첫장에 산장 별장 컬러 지도가 보이니, 어찌 기대를 안 할 수 있으랴. 띠지에는 온통 격찬뿐이다. 최고 걸작? 어디서 거짓말을. "그에게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431쪽. '악의'를 능가하는 소설을 기대했다, 순진하게도.

이번 가가 형사의 추리는 대단하고 놀라운 것이 아니라 차분하고 세밀한 것이었다. 묻지마 범죄 속에 숨겨진 의도된 살인을 찾기 위해서는 그래야 했다. 뭔가 대단한 트릭으로 숨겨진 것이 아니라 우연히 겹친 것이었다.

2024.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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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십자가
히기시노 게이코 지음
이선희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책 표지가 논란이다. 사형 폐지론 옹호론을 논하는 진지하고 진중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소설과 달리, 무슨 동화책 느낌이다. 첫인상은 그랬다. 안 어울린다고 여겼다. 소설을 다 읽고나니, 표지에 나온 각 사물들은 소설 내용의 핵심에 해당되는 것으로 잘 표현된 것이었다. 그래도 표지는 아동용 도서처럼 보인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문체는 간결하고 명료하다. 거의 멈추지 않고 빠르게 읽힌다. 별 꾸밈이나 수식이 없다보니, 문장 읽는 맛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체보다는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프롤로그의 두 남녀 연애는 뭘까 싶었더니, 역시나 결말과 결정적으로 이어지는 힌트이자 암시였다. 시작의 궁금증 때문에 끝까지 읽었다.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이 도대체 왜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추리소설의 기본에 충실한 설정이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살인자의 주변 지인과 살해된 자의 친인척이 어떤 고민과 고통, 혹은 어려움을 겪는지 워낙 잘 써 놓아서 소설이 아니라 심층 뉴스 기사처럼 읽힌다. 아마 이 점 때문에 2014년에 나온 책이 꾸준히 출판되어 나오는 것 같다. 스테디셀러가 될 수밖에 없는 책이다.

사형 폐지론 논란은 딱히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진 않는다. 그리고 역시나 딱히 정답이 없어 보였다. 흥미롭고 새로운 점은, 각 사건별로 사형할지 여부를 잘 따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범인의 범행이 단지 살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형을 부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살인범이 사형을 바라기도 한다.

살인한 자는 사형 혹은 무거운 죄를 무조건 받아야 한다고 여기고 이를 실현/실천하려는 사요코는, 원리주의/원칙주의자의 한계/실패를 보여준다. 소설의 결말은 상식과 감정에 따른 약간의 해피엔딩이었다. 현실상으로는 살인했다고 무조건 죄를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죄가 입증되어야 죄를 받는다.

자신의 과거 죄로 인해, 거의 성인의 경지(노인의 관점/평가에 따르면)에 오른 의사 후미야는 묘한 인상을 남겼다. 그의 죄가 없었다면, 과연 그가 그정도까지 선행을 할 수 있었을까 싶다.

반면, 과거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 파괴적인 성향을 유지한 사오리는, 죄 때문에 더는 나은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 사형이든 죄든 과거든 각 사람마다 각 상황마다 다르게 적절하게 판단해서 다뤄야 한다.

비약한 전개가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죽일 것까지야 싶은데, 각 인물들의 고민과 생각은 공감이 가고 안타까웠다. 작가 히가시노가 이야기에 신파적인 면이 있긴 해도, 인간 감정의 핵심을 잘 짚어서 보여준다.

소설 '공허한 십자가'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작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긴장감이 덜하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만 나름 감동의 깊이는 있다. 읽어 볼만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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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사람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윤성원 옮김
알에이치코리아(RHK)
2021
10

이상해서 궁금증이 생기는 사건을 짧고 명료한 문체로 쓴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대개는 범죄이고 아닌 것도 있다.

책 광고 문구 이 책을 덮는 순간 인간에 대한 공포가 밀려온다!”는 아니다. “, 그랬던 거였구나!” 정도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명작 장편 수준을 기대하진 마라. 홈런이 아니라 2루타 정도다. 그럭저럭 읽을만하다.

이 단편집에 있는 소설들은 그의 평소 작품들에 비하면 평작이지만, 독자에게 궁금증이 생기게 하고 절묘하게 그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솜씨는 여전하다.

일단 읽기 시작하면 궁금해서 계속 읽고 마침내 끝까지 다 읽고야 만다. 미스터리로서의 기본에 충실하다. 추리소설 작가 지망생이라면 기본기 수련하기에 좋은 단편이다.

결말, 혹은 해결을 제외하고 궁금증을 유발하는 데까지만 소개한다. 스포일러 없음.

[자고 있던 여자]

직장 동료들한테 자신의 아파트를 빌려주던 나는
, 어느 날 집에 들어가보니 생판 모르는 여자가 침대에서 자고 있다.

여자는 뻔뻔하게도 혹시라도 자신이 임신할지도 모르니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야겠다고 한다.

나는 회사에 돌아가서 내 방을 빌린 적이 있는 녀석들을 모두 추궁했으나 모두들 부정한다. 녀석들의 사진이 있는 사원증을 가져다 여자한테 보여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단다. 도대체 이 여자의 정체는 뭐지?

[판정 콜을 다시 한번!]

학창 시절 중요한 야구 시합에서 아웃 판정을 받은 후,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 나.

강도 짓을 하다가 경찰한테 들켜서 도망치던 중 그 아웃 판정을 내린 심판의 집에 숨어 들어간다.

내 판단에는 명백히 세이프인데 아웃 판정을 내린, 이 심판은 칼을 대고 위협을 해도 여전히 그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다. ?

[죽으면 일도 못 해]

엔지니어 지망생이었던 나는 대학 졸업 후 자동차 부품 회사에 취직한다. 그 회사에서 하야시다 계장을 만나 일을 배운다. 성실하고 완벽한 일처리로 유명한 계장.

그런 계장이 휴게실에 죽어 발견되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머리를 맞아 사망했다.

그리고 계장이 평소 즐겨 먹던 센베이 과자 봉지가 휴게실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었다. 성격상 과자를 남기고 버렸다는 것이 이상했다.

로봇 팔에 맞아 죽은 것이라 추측했으나 형사의 조사에 따르면 로봇 팔과 상처가 일치하지 않는데...

[달콤해야 하는데]

호놀룰루로 신혼여행을 온 나. 재혼이다. 아내는 교통 사고로 죽었다. 딸 아이는 얼마 전에 죽었다.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

이번에 결혼한 여자 나오미가 딸 아이를 죽인 것으로 의심한 나는, 네가 죽였냐고 물었는데 그렇다 아니다 대답은 안 하고 신혼여행인데. 행복해야 하는데.” 이런 말만 한다.

나는 나오미의 목을 조여 죽이려다 그만둔다. 그리고 밝혀지는 사건의 진실. 반전.

[등대에서]

나는 대학생 시절 혼자서 여행하던 중 등대지기의 권유로 등대에서 묵기로 한다. 자는 동안 등대지기한테 성추행 당하다가 깨서 도망친다.

동급생 유스케한테 그 등대와 등대지기를 소개해 준다. 자신이 당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평소 즐겨 마시는 버번 병에 수면제를 넣었다. 다음날, 등대지기가 살해된 사건이 보도되는데...

[결혼 보고]

결혼했다고 알리는, 친구의 편지. 이상하게도 같이 동봉된 사진에는 그 친구가 아닌 엉뚱한 여자가 남편이라는 사람과 찍혀 있다.

[코스타리카의 비는 차갑다]

코스타리카 여행 중 강도를 당한다. 다 털려서 가까스로 호텔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갑에 동전과 함께 도난당했던 카메라의 버튼전지 뚜껑이 있었다. 어찌된 일이지?

미스터리는 대체로 반전이다. 독자의 예상 혹은 추측을 반박해서 놀라움을 선사한다.

그리고 도무지 알 수 없고 이상한 일을 논리적으로 명확히 해명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사소한 물건을 이용한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서 독자들이 읽으면서 지나치기 쉽기 때문이다. [등대에서]의 과도, [죽으면 일도 못 해]의 과자 봉지, [자고 있던 여자]의 쓰레기통 내용물, [코스타리카의 비는 차갑다]의 카메라 버튼전지 뚜껑.

202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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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현대문학 펴냄

냉정한 낭만주의자

가가 형사 시리즈를 읽어 보라는 충고에 따라 무작장 5권짜리 전집을 구매하고 남은 2권은 도서관에서 빌려 놓았다. 총 7권이 읽기 대기 중이다. 1권 읽었으니, 이제 6권이 남았군.  

트위터로 내게 이 시리즈를 권한 분의 평가는 "읽을 만하다."였다. '탐정 갈릴레오'의 첫 단편을 읽고는 사람들이 왜 그리 이 소설가에게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추리는 밍밍하고 문체는 깔끔하며 반전도 있어 그럭저럭 괜찮은 정도였다. 대단하다는 아니었다. 가가 교이치로의 대학 시절(물론 아직 형사가 아니라 대학 졸업반이다.)을 다룬 '설월화 살인 게임'을 읽고나니, 과연 이 작가의 매력은 거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왜 번역 출판한 곳에서 추리소설과는 어울리지 않는 '졸업'이라는 다소 감상적인 제목을 달았을까 싶었는데, 다 읽어 본 분들이 결말의 낭만주의에 감동했다면 바로 그 '졸업'을 제목으로 동의하리라. 안 읽어 본 사람은 실감하긴 곤란할 것이다. 

취직하는 데 학생운동 전력 어쩌고 나오는 거 보니, 참 옛날이다 싶다. 발표 연대를 보니, 1986년이다. 그땐 그랬지. 80년대 대학 4학년들의 모습을 묘사한다. 다도와 검도가 나온다. 밀실과 독약이 나온다. 중학교 기술 시간에 냉장고와 밥솥의 작동원리로 배운 '그것'과 초등학생도 아는 카드 트릭이 결정적 힌트다. 추리는 그저그랬다. 단순할 걸 참 난해하게 보이려고 애썼다. 

추리소설인데도 읽는 내내 수수께끼 풀이는 별 관심이 없었다. 대신에 작가가 묘파해내는 각 인물들의 심리와 그에 따른 행동에 빨려들어갔다. 살인을 빼면 청춘소설이다.

차가운 현실을 그리면서도 낭만적 감상으로 마무리한다. 냉정한 낭만주의자랄까. 

언제쯤 나는 낭만주의를 졸업할까. 소설 따위 읽지 않는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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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현대문학 펴냄

동일 패턴의 지겨움과 반전의 과용을 용납하는 이유

추리소설에서 반전의 사용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1번은 좀 약하고 2번은 괜찬지만 3번은 과하다. 제목에서 적어도 1번 이상 뒤집기를 예상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정말 추리 초보자다. 게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많이 안 읽어 봤으리라. 반전에 반전 패턴이 거의 모든 소설에서 반복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제목을 보고 3번을 예상했고 읽어가면서 4번을 기대했다. 

내가 작가라면? 추리 게임에서는 작가를 이기는 방법이다. 탐정이 범인을 잡는 방법이기도 하다. 내가 범인이라면? 미스터리 소설의 초반과 중반은 가장 상식적인 추리로 독자를 되도록 자신이 제시할 정답과 거리가 최대한 멀게 해 놓는다. 이런 멍청하고도 단순한 추리는 대개 경찰이 맡는다. 그게 아니지롱, 사실인 이렇지롱, 놀랐지롱. 이는 언제나 주인공 탐정이 한다. 

작가는 절대 선인도 절대 악인도 없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럼에도 탐정은 절대 선인이어야 한다. 안 그러면 얘기가 안 되니까. 어쨌거나 탐정은 인생의 씁쓸함을 달게 삼키고 "그래도 착하게 살자"는 출소 후 전과자가 어깨 문신으로 새길 법한 그 싸구려 대사를 암시한 채 이야기를 끝낸 후, 다시 다음 시리즈에 등장해서 똑같은 말을 암시한다. "착하게 살자." 

자살이게 타살이게? 아이고, '졸업'에서 써먹은 거 또 써먹는다.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는 경우의 수가 그다지 몇 안 되는 사건이었다. 객관식이랄까. 사지선다형. 네 가지 중에 가장 극적인 것은 무엇일까? 결국 그거겠군. 역시나 맞았다. 

달콤씁쓸한 인생. 흔한 삼각관계에 심파극 같아서 낡은 사진을 보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편지라니. 

범인 잡기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서 별 의미가 없다. 동일 패턴을 반복하며 반전을 남용해도 용납할 수 있는 것은 담배 한 대 피우고 싶게 하는 결말 때문이다. 

부록으로 '추리 안내서'라고 해서 봉인된 해설이 있다. 처음에는 종이가 붙어 있어서 파본인 줄 알고 교환하려고 했다. 에고고. 게이고의 소설에서 추리는 별 의미가 없다는 신념에 따라 안 뜯고 안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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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를 죽였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현대문학 펴냄

이 소설은 서로 자기가 죽였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진행한다. 도대체 누가 죽였는지 끝에서 힌트만 줄 뿐 명확히 말은 안 해줘서 대개들 처음부터 다시 또 읽게 된다. 범인이 누군지 알기 어려웠다. 검색에 가면 나오는데, 애써 여기서 언급할 필요는 없을 듯 싶다. 다만, 나처럼 범인이 미와코라고 생각한 분도 있어서 내심 반가웠다는 점은 말해 둬야겠다.
 
꾸며낸 이야기이지만 고작 지문 하나와 머릿속 추리로 과연 범인으로 지목해서 체포하고 재판에 넘겨 유죄를 받아낼 수 있을지 생각해 봤다. 가능성이 낮다. 증거가 충분하지 못해 유죄로 확증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런지 추리소설에서는 되도록 범인이 자백하게 한다. 그래서 깔끔하게 해결된다. 안 그러면 그저 탐정의 생각일 뿐이지 않은가.
 
애증으로 얽힌 인간관계 거미줄 속에서 독을 품은 사람들. 살인미수죄를 적용한다면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약혼자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그 약혼자가 범인이었다는 반전을 기대했다. 결혼하려는 남자의 과거를 알아버려서 말이다. 그런데 가가 형사의 추리로는 그런 결말이 안 나온다.
 
독자의 주의를 캡슐의 숫자에 몰게 해 놓고 끝에서 메롱이다. 크리스티의 수법을 그대로 따다 썼다. 약 이름도 똑같다.
 
1인칭 시점으로 각 용의자들이 벗갈아 이야기한다.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니까 이들의 말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각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 중에 겹치는 것이 있다면 진실로 여길 수 있지 않을까. 허나 공모자가 있다면 이도 의심스럽다. 서로 말을 맞춰 거짓말을 하면 되니까. 이같은 안개 속에서 탐정 가가 교이치로의 말을 신뢰할 수밖에 없다.
 
범인이 누구냐는 진실은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의 매력은 범인잡기도 트릭도 아니다. 물론 추리소설은 그 재미로 독자를 유혹한다. 하지만 작가가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은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다. 당신도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못된 작가다. 미와코는 명백히 범인이 아니다. 하지만 내 양심의 심장을 찌르는 등장인물은 미와코였다.
 
다카히로를 통해 서술되는 미와코의 모습에서, 나는 이 작가의 능숙한 솜씨에 또 한 번 항복하고 말았다. "미와코에게 중요한 건 범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약혼자를 죽인 범인을 자신이 밝혀냈다, 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을 성취함으로써 평범하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여자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371쪽

묘한 공감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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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방정식
히가시노 게이고
재인

작가가 주제와 스타일을 반복하면 매너리즘이라고 해야 할까. '한여름의 방정식'을 읽는 내내 '용의자 X의 헌신'이 떠올랐다. 헌신 2. 눈물 펑펑? 이번엔 난 아니더라. 신파도 이런 신파는 없다.

트릭이 간단해서 갈릴레오 시리즈의 복잡한 과학 설명이 필요없다. 트릭만 보자면 단편소설로 쓰기에도 약하다. 사연 많은, 눈물 짜는 멜로 드라마를 기대하고 읽는 것이 나을 것이다. 소설 분량이 벽돌 하나의 두께로 550여 쪽으로 늘어난 이유는 트릭의 복잡성이 아니라 사연의 기구함 때문이다. 반나절을 소비하며 읽을 가치가 있을까? 차라리 옛날 드라마를 보는 게 낫지. 아니 아예 안 보는 게 낫지. 그래도 읽겠다면 손수건 한 장을 준비하라.

추리소설은 거꾸로 쓴다. 결론에 도달하려다 보니 무리해서 구성하게 될 때도 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도 별수 없었던 모양이다. 첫째 살인의 동기가 설득력이 없다. 결론을 위해 억지로 두드려서 만든 모양새다.

사건의 진상은 밝혀지나 정의는 실현되지 않는다. 물증이 없다. 그리고 탐정 본인이 애써 경찰에 밝히지 않는다. 사연 때문이다.

시리즈의 논리적 일관성을 잃었다. 이번 편에서 유가와 교수가 어린이랑 말을 한다. 실험도 같이 한다. 같이 잘 지낸다. 전편에는 아이랑 있으면 두드러기가 날 정도였다. 그래서 아이한테 뭘 묻고 싶을 때는 다른 사람을 시켜서 말했다. 몇 년만에 시리즈를 잇다보니 잊었나?

이 소설의 포인트는 유가와 교수와 교헤이 소년의 우정이다. 주인공의 자기계발서 같은 대사는 닭살이지만 괜찮다.

"해답을 바로 찾아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 인생도 그래. 금세 답을 찾지 못하는 문제가 앞으로도 많이 생겨날 거야. 그때마다 고민한다는 건 의미 있고 가치도 있는 일이지. 하지만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어. 해답을 찾아내려면 너 자신이 성숙해져야 해. 그래서 인간은 배우고 노력하고 자신을 연마해야 하는 거지." 5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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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5
갈릴레오의 고뇌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재인 펴냄
2010년 11월 발행

더 정교해진 트릭

탐정(스스로는 탐정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과학자라고 여긴다.) 갈릴레오(이건 별명이고 본명은 유가와)는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발전된 모습을 보인다. 유가와는 더는 익명 속에서 숨어 있기 어려워졌다. 주변 지인들을 통해 입소문이 난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언론에 대대적으로 얼굴을 들러내고 말았다.

범인이 누군이지 관심은 없고 오로지 수수께끼 현상을 실험으로 추리로 일반 자연현상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는 데 몰입만 할 수 없게 되었다. 살인범을 찾으려면 인간이라는 수수께끼를 풀어내야 한다. 유가와 스스로 이를 인정한다. "인간이 만들어 낸 수수께끼를 풀려면 역시 인간에 대해 알 필요가 있는 거야." 206쪽

시리즈가 5권까지 왔지만 글 쓰는 스타일은 그대로다. 단편집에 수록하는 단편 수는 어김없이 이번에도 5편이고, 각 단편소설의 제목도 참 멋없고 간단하게 지었다. 떨어지다. 조준하다. 잠그다. 가리키다. 교란하다.

주인공 유가와가 인간적인 면을 조금 보이기 시작했다는 게 변화라면 변화겠다. '가리키다' 편에서 다우징 소녀의 환상을 깨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개는 실험을 통해 산산조각내는 편이다. 왜 그랬을까? "과학은 신비로운 것을 무작정 부정하는지 않아. 그 아이는 진자를 가지고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거야. (중간 생략) 자신의 양심이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도구가 있다니 얼마나 행복하겠어. 그건 우리가 참견할 일이 아니야." 290쪽

미스터리가 예전에 비해 더 복잡하고 더 정교하다. 악마의 손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교란하다' 편은 그동안 다소 심심했던 이야기에서 한층 나아졌다. 그래도 다른 미스터리 소설에 비하면 정말이지 간결하다. 수수께끼는 단순하고 명쾌하다.

주인공은 여전히 범인의 범행 동기엔 별 관심이 없다. "늘 하는 말이지만 난 범인의 동기에는 관심이 없어." 386쪽

과학자란 어때야 하는가에 대해 여러 말을 하는데, 과학자의 순결함에 대한 얘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일 년 이상 걸려 만들어 낸 이론이었지만 근본적인 부분에서 큰 잘못이 발견됐죠. (중간 생략) 그 순결함에 나는 감탄했어. 대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막다른 골목길에 멈춰 서서 어쩔 줄 몰라들 하지. (중간 생략) 자네는 달랐네. 모노폴 연구의 꿈을 산뜻하게 버리고 거기서 얻은 경험을 다른 분야에서 살리려 했지." 112쪽.

2014.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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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4
성녀의 구제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재인 펴냄
2009년 12월 발행

정헌 년

이 소설의 트릭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말 그대로 소설 같은 일이다. 황당하고 기가 막힌다.

표지와 제목은 성스러운 종교서적으로 보이나 내용은 범죄극이다. '악녀의 복수'라고 제목을 붙여야 하지 않을까. 소설을 다 읽어야 제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역발상의 놀라움과 함께 말이다.

애 못 낳는다고 헤어지고 이혼하는 남자라니. 그 남자보다는 그런 남자랑 사랑에 빠지는 여자들이 문제 아닌가. 그런 남자와 결혼하거나 사귀려는 여자가 스스로 무덤 판 거 아닌가. 돈과 겉멋에 휩쓸린 본인 탓은 안 하나. 그러고 싶고 그렇게 믿고 그렇게 하겠다는데, 뭐라 논리적으로 반박해야 소용없다.

책장을 덮고서 떠오르는 건 '쇼생크 탈출'이었다. 징헌 년놈들이 불가능할 일을 해내는 법이지.

'악의'와 더불어 징헌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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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2 
예지몽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재인 펴냄
2009년 4월 발행

과학으로 추리한다


시리즈 1편 '탐정 갈릴레오'는 과학 트릭이 중심이었고 시리즈 2편 '예지몽'은 신비스러운 현상을 다룬다. 일명 괴짜 갈릴레오라 불리는 유가와 마나부 물리학과 교수의 추리로 기이한 현상들이 평범한 일상으로 밝혀진다.

단편집 '예지몽'은 전 단편집 '탐정 갈릴레오'에 비해 과학적 트릭이 줄어들었다. 첫 단편 '꿈에서 본 소녀'에는 아예 과학 지식이 등장하지 않고 두 번째 단편 '영을 보다'는 고작 하나가 등장하는데 그것도 가전 제품 관련 과학 상식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수수께끼를 풀려면 물리학 지식이 상당 수준이어야 한다. 일반인은 설명을 들어도 잘 모를 수 있다.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믿기에 그렇다고 여긴다. 심령 현상을 별다른 근거도 없이 믿는다. 살인범은 이를 이용해서 자신의 범죄 사실을 숨긴다. 하지만 이는 스스로 함정을 파는 꼴이다. 신비로운 현상을 악용하면, 그 점을 역추적하면 진상이 밝혀진다.

자신의 사랑이라고 예언한 여자가 나타나고, 귀신이 보이고, 방 안이 영혼의 떠드는 소리에 흔들리고, 불덩이가 날아오르고, 예지몽을 꾼다. 허나, 결국 그런 현상은 거짓임이 밝혀진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보여주는 범죄는 잔인하고 교활하기보다는 다분히 인간적인 결함 때문에 나온다. 주인공 유가와는 '그녀의 알라바이'에서 범죄 사연이 안타까우면 애써 범죄를 응징하여 정의를 실현할 마음이 없다. '떠드는 영혼' 편에서는 유령 따위는 믿지 않지만 사람들이 권선징악의 귀신 이야기를 믿고 싶어하는 것에 반대하진 않는다. 작가는 마지막 편 '예지몽'에 슬며시 만족스러운 웃음이 나오는 마무리까지 해 놓았다.

살인 동기는 크게 셋이다. 1. 애증(격렬한 감정이어야 한다.) 2. 돈(극심할 지경이어야 한다.) 3. 지난 죄 은닉(불륜, 뺑소니, 자살, 살인, 협박, 기타 등등. 죄를 감추기 위해 살인한다. 연쇄살인은 그래서 필연이다.) 이번 단편집은 주로 3번이 나온다.

이야기로서의 살인과 실제 살인은 다르다. 현실에서 죽음은 부조리와 우연이 대부분이다. 살인 자체가 드물다. 대개의 죽음이 사고사나 병사다. 그래서 치밀한 계획과 완벽한 트릭으로 무장한 살인/자살/죽음은 픽션의 느낌을 준다.

덧붙임 1
2009년 4월 27일 3쇄로 읽었다. 1쇄 찍은 것이 4월 1일이다. 27일만에 3쇄가 나올 정도니 히가시노 게이고의 인기란 참 대단하다.

덧붙임 2
191쪽 오른쪽 구석에 5장 제목을 '미래를 아는 아이'로 적어 놓았다. 다른 쪽에는 모두 '예지몽'으로 해놓았다. 처음 편집본은 제목을 '예지몽'이 아니라 '미래를 아는 아이'로 했으리라 추리할 수 있다. 편집자의 최종 결정은 '예지몽'이었다. 잘한 결정이다. '미래를 아는 아이'라는 제목은 추리소설보다는 동화나 과학소설에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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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1
탐정 갈릴레오
探偵ガリレオ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재인 펴냄
2008년 6월 발행

과학자 탐정

추리가 깔끔하다. 나름 반전이 있어 나쁘진 않다. 다만, 추리가 단순해서 밍밍하다.

물리학과 조교수 '유가와'는 셜록 홈즈를 차용했다. 1장 타오르다'를 읽는 내내 '주홍색 연구'가 떠올랐다. 결정적 힌트가 붉은 실이다. 아서 코난 도일 선배님에 대한 존경의 표시인 듯하다. 셜록 홈즈의 현대 물리학 연구자 버전이다. 물리학자 유가와는 독단적인 홈즈와 달리, 독자 우호적인 분위기로 사건 수사를 진행한다.

2011.11.18

이번에 두 번째로 읽었다. 처음 읽은 것은 2011년이었다. 당시에는 추리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이 없이 그냥 재미로 읽었다. 올해는 추리소설을 어떻게 쓸지 고민하면서 읽었다.

도서관에 가면 너덜너덜해진 책들이 보인다. 그만큼 대여를 많이 했다는 증거다. 추리소설 중에는 딱 세 저자가 그렇게 많은 국내 독자를 거느리고 있다.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들.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들. 어느 도서관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히기시노 게이고는 아서 코난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을 읽은 게 분명하다. 이 소설집 첫 단편에서 붉은 실이 언급되고 있는 것과 탐정이 감정보다 이성을 중시하는 것은 셜록 홈즈의 영향이다. 나름 유머 감각을 지니면서 당장에 답을 주지 않고 그때그때마다 뭔가 알아낸 표정을 짓고는 나중에서 진상을 밝히는 식은 푸아로처럼 보인다.

게이고는 대학 전공이 전기공학이고 졸업 후 엔지니어로 일했었다. 이 소설집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잘 활용해서 쓴 '과학 미스터리'다.

총 다섯 편이 있는데, 제목은 죄다 물리 현상을 대변한다. 타오르다. 옮겨 붙다. 썩다. 폭발하다. 이탈하다. 마지막 편 '이탈하다'는 유체 이탈이라는 신비한 현상을 다루는데 알고 보니 과학으로 해명될 수 있는 일이었다는 식이다. 초반의 초자연적인 현상이 천재 물리학자 탐정 '유가와'의 검증을 거쳐 흔한 자연현상으로 밝혀진다.

과학자 탐정은 범인을 잡는 데는 관심이 없다. 유가와 탐정은 정통 추리소설에 중시하는 세 가지를 무시한다. 범죄의 동기, 수단, 기회. 용의자에 대한 감정도 별로 없다. 그의 관심은 불가사리한 현상을 과학의 힘으로 이해가 가능한 현상으로 증명하는 데에 있다. '이탈하다'편을 보면 범인이 잡혔어도 여전히 이상한 현상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실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정통 추리소설에 익숙한 독자한테는 이런 식은 시시하고 뭔가 빠진 듯한 인상을 준다. 누가 어떻게 살인을 했는지 조마조마하게 바라보고 추리해 보는 재미가 적다.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의 후속작들 중에는 아예 범인이 누군지 알려준 후에 과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증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도 있다.

그럼에도 셜록 홈즈와 푸아로의 전통을 모두 잇고 있다! 관찰을 통해 사실을 추리해서 깜짝 놀래키거나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아이를 멀리하는 걸 보면 홈즈가 떠오르고, 결정적 증거나 단서를 발견하고서도 아직 가설 단계니까 말해줄 수 없다고 하면서 이야기 끝에 가서야 실험으로 증명해 보이고 사람의 심리적 감정적 일치도 중시하는 걸 보면 푸아로처럼 보인다.

오랜만에 다시 읽고 가장 놀란 것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문체다. 간결하다 못해 뼈만 있다. 문장이 워낙 짧고도 간결해서 기가 찰 정도다. 장광설 제로다.

201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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