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와의 결혼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김석환 옮김
해문출판사 펴냄
2002년 3월 발행
이미 읽은, 혹은 본 듯한 이야기다. 열차 사고로 뒤바뀐 운명. 부잣집에 들어간 여인은 가짜 행세를 하는 중에 남편의 남동생과 사랑에 빠진다. 산드라 블록 주연 [당신이 잠든 사이에]랑 비슷했다. 내가 좋아하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인데, 뭐지?
영화랑 달리,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안에 시달리며 비극으로 끝난다. 이 원작의 초중반까지 써먹고 나머지를 해피엔딩으로 바꾸는 식이었네. 비교적 원작을 충실하게 따른, 영화 [사랑이라면 이들처럼(Mrs. Winterbourne)]은 마지막을 웃기고 행복하게 바꾸었다. 자기 정체성(본래 이름)을 회복한다. 잘먹고 잘살았다. 끝.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을 바라고 이 책을 읽으려고 한다면 말리고 싶다. 협박에 살인이 일어나지만, 끝내 범인은 밝혀지지 않는다. 일부러 그런 것이다. 결혼하고서 행복해야 할 두 남녀에게 불안만 가득 안겨주는 시어머니의 편지로 끝난다. 누아르의 완성이다.
윌리엄 아이리시는 우리가 아는 전통적 의미의 추리소설, 그러니까 셜록 홈즈나 에르퀼 푸와로 같은 명탐정이 나와서 수수께끼 범죄를 수사해서 교묘한 트릭과 범인을 밝히는 식으로 끝나는 장르 규칙을 전혀 따르지 않았다.
대신에 암울하면서도 감정이 흐르는 분위기를 세련된 문장으로 만들어낸다. 누아르다. 그래서 영어권에서 추리소설이 아니라 누아르 소설로 소개한다. 우리는 그냥 이것저것 다 뭉쳐서 추리소설이라고 부르지만.
가난과 절망에 쩌들어 있다가 갑자기 인생이 부와 행복과 사랑과 가족으로 충만하게 된 주인공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양 사기를 치는 중에 자신의 정체를 아는 남자의 협박을 받고 그 남자를 처리하려고 했더니 이미 누군가 죽였고 그 죽인 사람이 시어머니인 줄 알았더니 아니더라. 정말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요약하면 이렇다.
이야기 자체는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이야기보다 문장과 그 문장이 전하는 분위기를 더 중요시하다 보니, 결말마저 그리 된 것이다. 불안으로 시작해서 불안으로 끝난다. 어둠이 지배하는 분위기다.
참, 중반쯤에는 두 사람의 사랑을 묘사하다 보니 로맨스 소설 같은 분위기다. 자신의 정체가 들통이 날까 봐 조마조마한 상황도 같이 잘 그려져 있다.
누아르를 좋아한다면 적극 추천하고, 범인 잡는 맛으로 읽는 추리소설을 바란다면 추천하지 않는다.
문장은 최고다. 열차 사고 장면 묘사가 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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