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트 특급 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황금가지 2013년

Murder on the Orient Express (1934) 영국판
Murder in the Calais Coach 미국판
미국판이 '오리엔트 익스프레스'라는 제목을 피한 이유는 같은 제목의 소설이 출간 전에 나와 있어서 혼동을 피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책으로 읽은 적은 없었으나 영화로 본 기억이 있었다. 결말이 워낙 희안해서 아직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이미 범인을 알고 있었고 그 수법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미 범인과 범행 수법을 알고 있는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 역시 걸작은 다르다. 이 경악스러운 미스터리는 이미 결론을 알고 있어도 감동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 중에서 유명한 축에 속한다. 이런 독창적인 미스터리가 다시 나오기도 힘들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다음으로 손꼽는 작품이다.
설정이 흥미롭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열차는 폭설에 갇혔다. 따라서 이 객차 안에 있는 승객들 중에 범인이 있다. 살해된 곳의 문은 잠기고 안쪽에서 체인이 걸렸다. 피해자의 몸에는 10~15번 찔렸다. 밀실이다!
힌트는 초반에 반복해서 줬다. 하지만 그것에 주목할 독자는 거의, 아니 절대 없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읽은 독자라면 어느 정도 의심은 해 볼 수 있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추리해낼 수 없는 사건이다.
찔린 상처로 봐서는 혼자가 아닌 남자와 여자가 최소 둘 이상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이고,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주홍색 잠옷을 입은 여자와 제복을 입은 남자가 수상한데 도대체가 열차 안 용의자들 중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게다가 그 옷들은 엉뚱한 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용이 그려진 잠옷은 2부 마지막에서 푸아로의 방에서 나온다. "이건 도전이야. 좋아, 받아들여 주지." 푸아로의 회색 뇌세포가 지금까지 모은 증거와 증언을 토대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 소설이 지금도 반전의 재미를 주는 이유는, 추리소설에서 흔하게 나오는 전개와 결말을 배신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독자의 일반적으로 흔한 추리로는 이 사건의 진상을 알 수가 없다. 범죄 살인자 미스터리에서 범인은 대체로 한 명이다. 공범이 있다면 한두 명 정도이다. 이를, 탐정도 독자도 추리를 시작할 때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니 검시를 해도 단서를 발견해도 탐문을 해도 어리둥절해질 뿐이다. 그렇게 되라고 썼으니까 그렇게 읽힐 수밖에 없다.
소설 본문 안에서 대놓고 이 소설이 굉장하다고 자찬한다. "이건 정말이지 지금까지 읽은 어떤 추리 소설보다 더 기묘하군요." 맞다. 그리고 아직도 애 여사의 이 작품을 능가하는 추리소설은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유사한 추리소설을 읽은 기억이 없다. 독보적이며 독창적이다. 범죄 미스터리 공학의 최상품이다.
애 여사가 특정 나라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 읽기 불편할 수 있으나 이 작품에서 미국 사법 제도의 헛점을 비난하는 것은 선견지명이다. 오늘날 그 어느 나라의 사법 제도라 해도 제대로 정의를 실현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니까 이 소설의 통쾌한 결말은 여전히 감동이다. 정의를 실현했다.
황금가지 번역본에서 오류를 발견했다. 68쪽. "열네댓 군데나 찌릅니까?" 열네댓이면 14~15를 뜻하는데 영어 원문에는 ten-twelve -fifteen으로 나온다. 10-12-15. 열, 열둘, 열다섯 군데라고 번역해야 한다. 이 소설을 안 읽은 사람은 그깟 숫자가 그리 중요하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후반부에서 이 숫자는 결정적 힌트이자 중요한 의미다. 추리소설은 논리의 일관성이 생명이다.
예전에 읽은 추리소설을 다시 읽으면 또 다른 재미가 있다. 가는 길에서 내내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것처럼 작가가 흘린 힌트 조각을 읽는 재미가 솔솔하다.
추리소설을 쓰는 입장에 서면 초중반부가 다르게 읽혀진다. 재미나 기쁨보다는 절망감 혹은 막막함이 더 크다.
잘 쓴 추리소설은 정교한 기술력을 보여준다. 계속 힌트와 증거와 단서를 주면서도 독자가 사건의 진실에는 도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서 탐정만은 알고 있는 것으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쓸 수 있냐고 자문해 봤다.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드는 노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또한 어느 수준 이상까지는 재능의 영역이라서 노력해서 될 게 아니다.
이 작품은 추리소설 쓰려는 이들한테는 에베레스트 산 같은 것이다. 이 작품을 능가할 야망을 품을 수 있겠으나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2025.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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