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플러스 1
Ten Plus One (1963)
에드 맥베인
해문출판사 2004년
ISBN 9788938203649
생생한 인물 묘사
추리소설에 아동용과 성인용이 있다고 한다면, 87분서 시리즈는 성인용이다.
권총, 성교, 폭력, 불륜, 매춘, 마약 등이 나와서 성인용이라는 말이 아니다. 셜록 홈즈 시리즈에는 그런 것이 나오지만 이야기는 아동용이다. 아이들이 어려서 좋아하는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 절대 죽지 않으며 초능력이 있거나 일반인보다 확실히 뛰어난 재능이 있다. 그리고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하다. 주인공이 통쾌하게 사건, 문제, 수수께끼를 해결한다.
사실성의 관점에서 보면, 홈즈도 푸아로도 말로도 죄다 수퍼맨과 다를 바 없는 캐릭터다. 그리고 그 외 주변 인물들은 마치 인형처럼 들러리를 선다. 이야기는 인형 놀이일 뿐이다. 범죄 수사라기보다는 탐정 놀이다. 주인공 이외의 인물들은 사건 종결 후 좀처럼 기억에 남지 않는다. 기이한 트릭에 깜짝 놀라고 기발한 해결에 재미있어 하고 독서는 끝난다. 여운도 감동도 없다. 그래서 추리소설은 쓰레기라고 불러도 딱히 반박할 수 없다. 추리소설 작가 대부분이 탐정소설을 쓰레기라고 생각했다.
87분서 시리즈는 왜 셜록 홈즈를 비롯한 아동용 추리소설과 차별되는가. 이 소설 시리즈 책 맨 앞에 항상 있는 문구부터 이야기의 초점이 범죄 트릭의 재미가 아니라 범죄 수사의 실제에 있음을 선언한다. "이 소설은 가공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등장인물도 장소도 허구다. 그러나 경찰 활동은 실제의 수사방법에 기초했다."
시리즈 이름에서 알 수 있듯, 87분서 이야기는 특정 인물의 나홀로 잘남을 연기하는 쇼가 아니라 경찰서의 경찰들이 협력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다큐멘터리다. 물론 스티브 카렐라 형사가 대체로 이야기를 주도하는 주인공으로 나타나 있으나 독불장군식으로 특정 정보와 추리를 독점하다가 마침내 주변 사람들한테 뻐기며 사건의 진상을 짜잔 설명하는, 유치한 아이들 탐정 놀이는 하지 않는다. 어른답게 형사답게 묵묵하게 조사하고 탐문하고 생각하고 체포한다.
독서 체험으로 87분서 시리즈는 독특하다. 추리소설이라는 그릇에 담겨 있는 사실주의 소설이다. 2차 세계 대전 전후 미국의 역사가 고스란히 생생하게 담겨 있다. 다인종 문화의 다양한 삶을 역동적으로 활발하게 묘사했다. 그래서 책 읽기가 끝나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사건 해결의 통쾌함보다는 여러 인물들의 삶이다. 그리고 87분서 경찰관들이다.
수수께끼 풀이식 전통 추리소설에 익숙한 이한테는 87분서 시리즈가 그다지 재미도 없고 매력도 없을 수 있다. 에드 맥베인의 열혈 독자한테는 말도 안 되고 절대 그럴 수 없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항의하겠지만, 사람마다 취향은 다른 거니까.
애거서 크리스티식 추리소설 관점에서는 인물 묘사를 잘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사건을 위한 장식품이고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휴지다. 심지어 주인공 탐정조차 생생하게 입체적으로 그의 삶을 보여주면 안 된다. 평면적이고 기이하고 특이하게 그려내서 무적의 천재 사나이로 보이게 해야 한다. 탐정은 절대적으로 일반인과 다르며 달라야 한다.
에드 맥베인의 소설에서 형사는 말 그대로 정확히 형사다. 영화나 다른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셜록 홈즈 혹은 필립 말로식 형사가 아니다. 알콜 중독에 불운한 과거를 지니며 총 쏘고 다니고 천재적인 추리력으로 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내지 않는다. 과학수사대의 도움을 받지만 지극히 상식적이고 사실적인 정보를 얻을 뿐이다.
그럼에도 87분서는 소설이다. 이야기다. 잘 만든 서스펜스다. 주목할 만한 사건이 초반에 발생하고 차츰 긴장이 고조되고 마침내 해결에 이른다. '살의의 쐐기'에서 초반에 사건 두 개가 터지며 동시에 진행하다가 끝에서 합쳐지는, 서스펜스 묘기를 선보였다면 '10 플러스 1'은 저격수의 연쇄 살인으로 여러 사건을 한 줄에 나열하며 위기감과 흥미를 고조시킨다.
때마침 이 소설 '10 플러스 1'은 '살의의 쐐기' 다음 편이다. Killer's Wedge, 1959년. Ten Plus One, 1963년. 132쪽("그녀는 스티브를 기다리겠다고 하면서 당신처럼 들어 왔소. 그리고 순식간에 308구경 권총을 빼들고 캐레라를 죽이러 여기 왔다고 떠들어댔지.")에 '살의의 쐐기' 인질극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사건의 대략적인 모습은 11장 끝에서야 드러난다. 왜 제목이 '10 플러스 1'인가. 연극 배역이 11명이다. 그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나간다. 도대체 누가 왜 1940년 라므지 대학에서 공연한 연극 '기나긴 귀항로'의 출연진을 라이플총으로 저격하는 것일까? 범인은 의외였다. 출연진 중 한 명이 살인범일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엉뚱한 사람이었다. 알리바이 트릭과 살인동기가 조금은 억지스럽긴 한데, 그럭저럭 설득력은 있었다.
미국 이민자들의 삶과 유태인의 반 독일 감정이 파스텔 수채화처럼 다양하고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매춘부 최하류층부터 무역회사 부사장 최상류층까지 등장한다. 교수, 과일장수, 배우, 의사, 작가, 영화제작자, 변호사, 대학 행정직원, 대학생, 검사, 형사, 포주, 가석방중인 전과자, 전철 매표소 직원 등 다양한 인물들이 동영상 촬영된 것처럼 글로 써 있다. 유머 작가의 콩트 카드도 나름 웃긴다. 재치있는 우스개다.
유머과 유려한 문장까지 가세하며 소설 읽는 재미를 돋운다. 특히 문장은 미국식 뻣뻣한 하드보일드식 간결체가 아니라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빠르게 이어지는 간결체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술술 읽혀서 문장에 비누칠을 한 것 같다.
경찰서 안의 모습이 워낙 생생하게 묘사해서, 눈앞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 같다. 글 정말 잘 쓰는 작가다.
추리소설이고 스릴러 형식을 취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드라마다. 사람 사는 이야기다. 버트 클링, 신시아 포리스트, 스티브 카렐라. 그들은 그들 각자대로 자기 삶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