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말로 시리즈 6
기나긴 이별
The Long Good Bye (1953)
레이먼드 챈들러 | 박현주 | 북하우스 
종이책 2005 | 전자책 2012 

북하우스 전자책 표지


전작 '리틀 시스터'에서 워낙 냉소가 심했다 보니, 후작 '기나긴 이별'은 상대적으로 따스하게 느껴진다. 다행스럽게도 이제야 사람다운, 그 정다운, 그토록 그리웠던 필립 말로의 온기가 나온다.

'기나긴 이별'에서는 필립 말로는 젊지 않은,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중년이다. 세상과 세상 사람들에 대한 냉소의 정도가 딱 좋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필립 말로의 애수가 적당해서 좋다.

캐릭터의 완성도에서 이 '기나긴 이별'이 정점이다. 자아 정체성에 대한 인지가 확고하다. 소설 속 하드보일드 사립탐정의 원형이 이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필립 말로가 다음과 같이 하는 말은, 탐정의 강령 같은 것이다. 

"한 남자가 이 일을 그만두지 않고 버티는 이유를 아무도 알 수 없다. 부자가 될 수도 없고, 대부분 재미도 별로 없다. 때로는 얻어터지거나 총을 맞거나 감옥에 던져지기도 한다. 아주 가끔은 죽을 수도 있다. 두 달마다 한 번씩, 이 일을 그만두고 아직 머리가 흔들리지 않고 걸어다닐 수 있을 때 번듯한 다른 직업을 찾아보기로 결심한다. 그러면 문에서 버저가 울리고 대기실로 향하는 안쪽 문을 열면 새로운 얼굴이 등장하여 새로운 문제와 새로운 슬픔, 약간의 돈을 안고 들어온다."

베스트셀러 작가와 그 아내 모습이 나오는데, 작가 자신과 자신의 부인을 투영한 듯 보인다. 물론 그대로가 아니라 소설적 상황에 맞게 변형했다. 술 뒤로 숨긴, 절망감이라니. 구원은 오직 글쓰기밖에 없었다.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연상시켰다. 많이 씁쓸했다. 결론은 마음에 안 들었다.

살인범은 누가 봐도 유력해 보이는 용의자로 몰았다가 전혀 혐의를 두지 않았던 사람이 밝혀지는 미스디렉션 기법을 썼다. '리틀 시스터'처럼 전혀 관련이 없을 거라 믿을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 대단히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반전을 만든다. 마지막 반전은, 이미 영화로 봐서 알고는 있었다, 이제는 흔해 빠진 것이지만 당시에는 멋지고 신기한 것이었으리라.

탐정이 사건에 휩쓸리는 식이라서, 본인 의지로 수사를 하는 식이 아니라서, 억지스럽고 우연이 많다. 돈 많고 예쁜 여자가 갑자기 주인공 탐정을 사랑하는 식은 쥐뿔도 설득력이 없었다. 왜 그렇게 썼나 모르겠다. 후속작에는 아예 둘이 결혼까지 한다는데, 어이가 없을 뿐이다.

밀린 방학숙제하듯 읽었다. 어떤 시리즈든 끝나는 게 아쉬운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계속 끝나지 않게 둘 수는 없는 일이지.

참고로, 열린책들 김진준 번역은 의역이었다. 읽기에는 의역이 편한데, 나는 영어 원문 느낌을 더 중시하는지라 직역한 박현주 번역으로 갈아탔다.

2025.12.2

Posted by love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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