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더글러스 애덤스
책세상
2005.12.20.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으려는 분을 위한 안내서
혹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으려는 분이 알아야 할 10가지
혹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으려는 분을 위한 도움말

1. 1권 초반부 외계인의 지구 폭발까지 읽어야 이 책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그 다음부터는 읽는 속도가 빨라질 것이다. 각자 느낌에 따라 속도를 조절하라. 애써 한 글자 한 글자 다 읽을 의무는 없다.

2. 이 책이 웃긴다는 소문을 듣고 읽으려는 사람은 우리나라의 개그 콘서트 웃음을 바라지 말 것. 영국식 유머다. 우리랑 다르다. 바로 웃기는 게 아니라 좀 있다가 웃긴다.

3. 어느 정도의 인문·사회과학·자연과학·철학·예술 상식이 있으면 좋다. 그런 상식이 없어도 읽을 수 있으나 크게 웃을 수는 없을 것이다.

4. 여유가 없는 사람은 이 책을 읽으려 들어서는 안 된다. 점심을 먹은 후 나른한 오후에 딱히 할 일 없는, 그런 한가함이 있어야 한다.

5. 이 책은 코믹 SF다. 하드코어 SF를 바라지 마라.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서 왜냐고 따질 사람은 다른 책을 읽어라.

6. 커트 보네거트라는 작가를 아는가. 알면 제대로 찾아 왔다. 같은 종족이다. 블랙 유머를 즐겨라.

7. 이 책에서 지구가 멸망하고 우주가 사라져도 당신 마음은 평화로울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무해하다. 다시, 이 책은 대체로 무해하다.

8.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 질문'에 대한 해답이 왜 42인지는 5권에 나온다. 거기서 이야기는 끝난다.

9. 이 소설이 진지하지 못하다는 평은 무시하라. 이 소설을 끝까지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10. 마음껏 웃어라. 그러라고 쓴 책이다.

지구가 사라져도 쫄지 마라

코믹 에스에프 소설인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무척 일상적인 얘기를 우주적 차원으로 놓고서 수다를 떤다.

제목부터가 여행 안내서를 따서 만들었다. 자동차 얻어 타는 걸 우주선 얻어 타는 걸로 살짝 바꾸고, 도로 만든다고 자기 집 부수는 국가를 우주 도로 놓겠다고 지구 부수는 외계인으로 슬쩍 함께 놓았다.

주인공이 하는 일이라는 게 한심하게 일상적인 일이다. 점심 먹고 차 마시고 맥주 먹고 샌드위치 만들고. 이런 게 과연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1권 끝부분에서 점심 먹는 걸 우주 철학으로 끌어 올리는 문장을 읽는다면 정말 재미있다는 걸 감 잡을 수 있다.

영국식 유머는 독특한 찌름이 있다. 무척 평범한 걸 끌어다가 묘한 독특함을 끌어낸다. 게다가, 이 소설가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지식을 끌어다가 우스개로 재배열시킨다. 방대한 양의 익살이다. 너무 많이 알고 너무 많은 걸 할 줄 알지만 고작 시시한 일만 해서 우울증에 걸린 로봇 얘기는 유머의 심리학이다.

완성작은 무려 5권이나 되지만, 그 시작은 무척 미미했다. 처음에는 간략한 라디오 드라마였단다. 시시껄렁하게 대충 만든 거였다. 그러다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인기를 끌어서 연작이 되고 마침내 소설로 나온다. 영화는 작가의 사후에 나왔다.

이 소설을 쓴 더글러스 애담스는 부조리하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건강하려고 운동하다가 심장마비로 가셨다. 그렇게 가셨다. 부조리 소설가의 부조리한 죽음이여!

소설은 지루한 편이다. 단, 처음에 읽을 때만. 아마 통독하기 만만치 않으리라. 반면, 영화는 경쾌하다. 원작을 너무 줄여 놓아서 심오함이 없지만.

성질 급한 분은 이 소설도 영화도 피하시는 게 좋다. 시간이 넉넉하고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바로 그때 이 소설과 영화를 거들떠 보길 바란다. 우주적 농담으로 해탈하길 바란다.

이 이야기가 하고자 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지구가 사라져도 쫄지 마라. 괜찮다. 대체로 무해하니. 안심하라."

서글픈 농담

이 책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 도서관이었다. SF를 좋아하는 한 분이 적극 추천했다. 막상 읽기 시작하자 재미없었다. 그렇게 재미있다는 책이 이렇게 재미없고 따분하다니. 그나마 재미있었던 것은 1권 마지막 부분에 있는 점심과 관련된 농담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내게서 잊혀졌다. 몇 년만이었을까. 10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일 것이다. 적어도 12년만일 것이다. 이 책을 다시 만났다. 시립도서관에 5권까지 나란히 꼽혀 있었다! 완결된 모양이네. 책을 펴서 보니, 작가는 불합리하게 저 위로 가셨다. 심장마비로 죽은 대학 동기가 있어서 우습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심각해진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가셨군요. 뭐 그런. 일단 1권을 대여해서 과연 다시 읽을 수 있을지 없을지 보려 했다. 역시나 잘 안 읽혔다. 나랑 안 맞나 보군. 그래도 모르지 싶어 갖고 다녔다.

조카 시험 보는 데 따라갔다가 한참을 기다려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게 뭐람. 다시 이 책을 펴 들어 읽었다.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는 교정 한 구석 의자에 앉아 이 책을 읽었다. 시작부터가 나랑 비슷한 상황이다. 딱히 할 일이 없어 한가함에 둥둥 떠있는 모습. 나는 책에 빠져들었다.

며칠 후 5권까지 다 읽었다. 애써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읽을 필요는 없다 싶었다. 건너 뛰고 싶으면 그냥 건너 뛰었다. 그런다고 누가 뭐랄 사람도 없지 않은가. 재미와 흥분을 거치고서 끝 부분에 이르자 평범하지만 그래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맞다 싶게 끝났다.

글쓴이가 상당히 많은 지식을 쌓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철학, 문학, 경제학, 역사, 과학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한 흔적이 보인다. 그런데 그런 지식을 고작 이런 농담에나 쓸 정도밖에 안 되다니. 서글펐다. 글을 썼던 시대 상황도 무시할 수 없었겠지. 뭐 지금이라고 상황이 더 나아졌다고 볼 순 없지만.

영국식 농담에 대한 이해가 아직 덜 된 탓인지, 더글러스 애덤스 스타일에 익숙치 않아서인지, 이 소설은 여전히 내게 낯설고 썩 잘 읽히는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언젠가 또 한가한 순간이 찾아온다면, 이 소설의 주인공 아서 덴트처럼 훌쩍 지구를 떠나 은하계를 여행하고 싶다.

겁먹지 말고 일단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는 거다. 히치하이커의 기본 자세는 그거다. 책 읽으려는 몽상가가 그러하듯. 지구를 떠나고 싶을 땐 그렇게.

1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아커를 위한 안내서 : 영국식 농담에 SF와 철학의 양념을 뿌린 소설

사는 게 정말 지긋지긋하다고 느낀 적이 언제였더라.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지긋지긋한 것이 아니라 지루했던 것이었겠지. 하지만 내겐 지긋지긋한 것이나 지루한 것이나 똑같다. 지루해지면 지긋지긋해진다. 지긋지긋해지면서 지루해진다. 봐라, 뭐가 다른가. 똑같지. 지금 왜 지루함과 지긋지긋함에 대해 이야기하지. 모르겠다.

번역의 문제인지, 내 독서 방법의 문제인지, 묘사가 지루해서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책은 통독을 거부했다. 대학생 때 이 책을 처음 봤다. 그때 철거 공사 장면까지만 읽고 책 끝에 있는 점심 얘기를 읽었다. 점심 얘기는 마음에 들었다. 마침 배가 고플 때 읽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오늘 2006년 11월 27일 통독했다. 신비스러운 우주의 기운을 받지 않고서야 이럴 수 있을까. 신비로운 기운은 무슨, 개뿔. 내가 철이 든 것일까. 남자가 철드는 거 봤냐. 그저 나이가 든 것이다.

가장 심각한 일이 가장 우스꽝스럽다. 사람 죽는 게 그렇다. 이 책의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는 2001년 건강을 위해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던 중 심장 마비에 걸려 사망했다. 지구가 멸망하는 모습이 이 책에서 가장 우습다.

이 책이 내게 준 교훈은 너무 심각하고 진지하게 살지 말라는 것이었다. 지나친 심각함은 두통을, 지나친 진지함은 냉소를, 지나친 완벽은 절망을 낳는다. 철학적 농담이 주는 여유, 그게 더글러스 애덤스가 주는 선물이다.

이런 철학적 농담 SF가 아니라 진짜 철학 SF를 읽고 싶다면,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를 읽어 볼 것. 영화로 보지 말 것. 꼭 책으로 읽을 것!

‘솔라리스’의 인식 철학에 따라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보면 이렇다. 지구가 멸망하고 우주로 나가 외계인을 만나고 수다를 떨고 로봇 컴퓨터랑 대화를 해도 결국 우리 인류의 얘기이다.

영국을 떠났어도 아서 덴트는 여전히 영국 얘기를 하고 있다. 홍차에 뭐에. 영국식 농담에 SF와 철학의 양념을 뿌렸다.이 지긋지긋한 지구를 떠나는 방법을, 작가는 1권 맨 앞에 적어 놓았다. 물론 농담이다. 진짜 전화하려고?

2권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 : 우주 종말과 시간 여행

왜 사람들은 2권을 읽지 않았을까? 도서관에서 3권을 빌렸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1, 2, 3. 1권은 많은 사람들이 대출해서 읽었는지 책 가운데가 쩍 갈라졌다. 예전에도 1권이 없어서 대출을 못 했으니 1권의 인기는 대단한 것 같다.

2권은 앞부분만 조금 읽었는지 앞표지가 접힌 흔적이 있다. 하지만 3권은 아무도 읽지 않은 듯 표지를 접은 흔적이 없다. 새 것처럼 보인다. 4, 5권은 아마도 3권과 비슷한 운명으로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으리라. 내가 집어 읽어 주기를 기다리면서.

책보다 이 책을 대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반응이 흥미롭다. 아마도 1권은 도대체 무슨 얘기인가 궁금해서 다들 읽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역시 공감하기 어려운 영국식 농담과 이해하기 어려운 박학다식 잡담(예술과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어느 정도 상식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다.)에 대해 회의적이었던지 2권은 조금 거들떠보고 3권은 아예 안 봤다.

2권은 우주의 종말과 시간 여행을 다루었다. 주인공 아서 덴트는 지구의 과거로 간다. 석기 시대인 듯. 1권과 마찬가지로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다. 아마도 3권에서 답이 나올 듯하다. 그다지 궁금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야기는 전개되고 농담은 흐른다.

서양인은 왜 그리 성경 이야기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종말, 구세주, 사과 이야기에 왜 그리 집착하는 걸까. 이 책에도 나온다.

로봇 마빈의 대사가 걸작이다. 1권이었나 2권이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런 말을 한다. 삶을 외면하거나 싫어할 수는 있어도 좋아하기는 어렵다고. 정말이지 정곡을 찌르는 우울한 대사 아닌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등장 인물이 바로 이 로봇이다.

정확히 똑같은 스타일은 아니지만 같은 종류로 묶을 수 있는 작가가 있다. 미국 사람 커트 보네거트다. 이 사람이 더 냉소적이다. 더 종말론적이다. 더 웃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의 소설 '갈라파고스'의 만다락스와 '제5도살장'의 새가 겹쳐 보였다.

이제 읽는 속도가 붙었으니 3권은 후다닥 읽어 치울 듯하다.

3권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 : 무심한 사람의 무의미한 수다

도서관에 갔다. 1, 2권을 반납했다. 4, 5권을 빌렸다. 예상대로 4, 5권은 깨끗했다. 사서의 손과 나의 손을 제외하고 이 책을 만졌던 손은 없었을 것만 같은 그런 모습으로 4, 5권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왜 4권은 두 권이나 있지? 인기가 좋아서 두 권씩 갖춰 놓은 거 아닐까. 그렇다면 내 짐작이 틀린 거잖아.

크리켓 얘기가 나온다. 영국 사람이 아닌 이상 이 스포츠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가끔 이 경기 장면을 본 적은 있다. 야구랑 비슷하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전을 찾아봤다. 영국의 국기(國技)란다. 한 팀에 11명. 이 경기의 트로피가 이 이야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어떻게? 그냥. 주인공 아서 덴트는 우주의 파괴를 막는다. 진지하게 의도적으로 막은 것은 물론 아니다. 그냥 어쩌다가 그냥 그렇게.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 질문에 대한 해답이 왜 42인지'에 대한 설명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내가 정말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던 거로 보이네. 천만에 말씀이다.

다음 편에서 얘기해 줄라고 그러는지 이제 한 술 더 떠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는 곳을 알려준다. 역시나 아서 덴트는 그런 거에 관심이 없다. 나도 관심이 없다.

핵무기와 냉전으로 요약할 수 있었던 지난 1980년대 이 책이 나왔다는 것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실의 그런 부조리에 지긋지긋해진 작가의 끝없는 불만과 불평이 이런 수다로 나온 것은 아닐까. 지금이라고 핵무기의 위험과 전쟁의 도발과 인류의 멸망에서 자유로운 시대는 아니다.

4권 안녕히,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 : 잠을 주는 수다

4권은 주인공 아서 덴트의 연애 이야기다. 피터팬처럼 남자와 여자가 날아다닌다. 왜냐고 묻지 마라. 여기 4권까지 읽은 당신이 내게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돌고래가 인간에게 남기고 간 어항 이야기도 나온다.

3권에서 예고했던 그 “하나님의 메시지”를 읽는다.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직접 읽어 보라. 다들 그 메시지에 별 관심이 없으리라 믿는다. 여기 4권까지 읽었다면 말이다. 그나마 4권에서 읽을 만한 농담은 그게 다다. 1권의 점심 농담처럼.

참고로, 다들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 질문에 대한 해답이 왜 42인지'에 대한 설명은 4권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5권에서 나오나? 이렇게 말하고 나니 내가 정말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던 거로 보이네. 천만에 말씀이다.

주변 사람들 중에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다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4권”을 읽어 보라고 권하라. 수면제보다 이 책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게다가 부작용도 없다. 대체로 무해하다. 1980년대 냄새가 물씬 풍긴다. 핵무기와 빨갱이. 정말 옛날 책이다.

5권 대체로 무해함 :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 해답은 42

지구를 떠나 외계에 정착해도 주인공 아서 덴트는 여전히 지구인의 그저 그런 일상을 산다. 샌드위치를 만들고 자식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나와 상관없다며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무시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결국 그 일들은 무관심했던 나에게 영향을 미쳤고 오늘의 결과를 낳았다. 수많은 우연과 부조리와 불합리가 어처구니없이 많이 발생하는 세상이다.

목숨을 걸만큼 대단하고 소중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소중한 것을 버리고 하찮은 것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무모하고도 어리석고도 이상한 일을 했던가.

그 많은 전쟁과 그 많은 죽음이 과연 그 하찮은 것을 위해 희생되었어야 하는가. 우리의 슬픔은 거기서 시작되었기에, 우리는 그저 울거나 웃을 수밖에 없다.

오직 종말이 있을 뿐이다

오랜만에 다시 읽었는데 예전에 잘못 읽었다. 이 소설의 끝은 종말이지 사랑이 아니었다. 예전에 대충 빨리 읽고 내 맘대로 나 좋을 대로 결말을 짓고 그렇게 기억했던 것이었다.

이 소설은 그 어떤 희망도 심지 않는다. 오직 종말이 있을 뿐이다. 세상은 끝장나고 그걸로 끝이다.

산만하고 엉뚱하고 복잡해 보여도, 이 잡다한 것들을 모두 연결시켜 이야기라는 인과논리의 그물을 만들어낸다. 게다가 구사하는 농담의 차원이 상당히 지적이고 무척 철학적이다.

작가의 비관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세계관/인생관이 다소 불편할 수 있고 이를 표현하는 블랙유머도 불편할 수 있겠다.

참고로, 5권 합본 끝에는 부록으로 등장인물 설명이 있다. 이야기 흐름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책을 읽으려면 몸과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한다. 하루하루 바쁘다는 말과 시간없다는 말을 거의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을 읽어내긴 불가능할 것이다.

2015.5.13

Posted by lovegood
,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1 - 10점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책세상

 

 

영국식 농담 소설, 무척 한가할 때 읽을 것을 권함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영국 코미디 소설이다. 영국식 농담으로 가득한 책이라서, 선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어떤 사람은 너무 재미있어서 계속 여러 번 읽지만, 어떤 이는 도저히 끝까지 읽기 힘들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책이 자기 취향에 맞는지는 직접 읽어 보기 전에는 모른다고 할 수 있다. 

 

내 경험으로는 이랬다. 무척 한가하고 따분하고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읽었더니 그동안 이해도 안 되고 정도 안 가고 엉터리 같았던 이 책을 너무나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는 게 우울할 때면 가장 먼지 집어 들어 읽는 책이 바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다.

 

 

 

 



영화는 소설과 조금 다르면서 농담과 아이템이 추가됨

 

때마침 넷플릭스에 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가 있길래, 그걸 먼저 본 후에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1'을 읽었다. 예전에 한 번 본 영화이긴 하지만 또 봤다.

 

영화는 아무래도 이 거대한 농담 소설을 담기에는 시간이 짧았던 듯 싶다. 영화만 본 사람은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고 별 재미도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원작 소설을 읽어 보길 바란다.

 

 

더글러스 애덤스의 이 우주적 농담 에스에프 소설 시리즈는 총 5권까지 있다. 시리즈가 완결되지는 못했다. 작가가 갑작스럽게 사망했기 때문이다. 건강을 위해 갔던 헬스클럽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자신의 실제 인생 결말마저 지독한 블랙코미디로 쓰게 되었다. 

 

영화는 이 시리즈의 1권을 큰 줄거리로 삼고 다소 다른 전개와 결말을 보여준다. 그리고 소설에는 없는, 새로운 농담 하나(손수건 종교)와 신기한 총 이야기 하나(총 맞은 사람이 총을 쏜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다.)가 덧붙어 있다. 할리우드 영화에 맞게 끝은 사랑과 해피엔딩이다.

 

 

 

 

 

종말과 우스개의 행진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전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종말과 농담이다. 결말은 언제나 세상이 끝장났다로 맺는다. 감동을 추구하지 않는다. 주구장창 농담을 해댈 뿐이다. 뭔가 조금이라도 진지하려고 하면 우스개로 칠해서 끝내 버린다.

 

뭔가 그럴 듯한 이야기, 그러니까 엄청나게 감동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등장인물이 뭔가를 극복하거나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이야기를 바라는 독자한테는 이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당혹스럽고 황당하고 짜증날 뿐이다.

 

애초부터 이 소설은 농담으로 시작해서 농담을 끝나며, 종말로 시작해서 종말로 끝난다. 우스개는 지나친 진지함에 여유를 준다. 억지로 지나치게 힘을 준 걸 빼는 거다. 지나치게 팽팽하게 부품 풍선을 터트리듯, 그렇게 당신 스스로 억압했던 뭔가를 풀어주게 한다.

 

우스개는 무덤 위에서 추는 춤이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는 게 우리의 의지대로 노력대로 희망대로 반드시 된다면, 우리는 불행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행복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해, 아마도 죽음이 대표적일 듯, 감정적으로 두 가지 반응을 한다. 하나는 우는 거고, 다른 하나는 웃는 거다. 웃음과 울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이면서 둘이다. 빛과 그림자가 그렇듯,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적으로 인지한다.

 

 

 

 

 

 

삶과 우주와 모든 것에 대한 질문의 답은 왜 42인가?

 

1권을 다 읽는 사람이라면 계속 읽을 가능성이 높다. 단지 시리즈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도대체 왜 42인지 알고 싶어서 읽으려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삶과 우주와 모든 것에 대한 질문의 답이 42다.

 

시리즈를 다 읽어 봤지만, 왜 42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인생의 목적은 결국 알 수 없는 것이리라. 뭐라 해도 만족할 만한 답은 없다.

 

2018-09-1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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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3 - 10점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책세상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3 4 5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 / 안녕히,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 / 대체로 무해함

 

3권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은 우주 파괴를 막는 것이고, 4권 '안녕히,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는 다시 멀쩡한 지구로 돌아가서 아서가 연애하고, 신이 남긴 메시지 확인하는 것이다.

 

뭔가를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것은 개인 취향이다. 하지만 1권과 2권에 비해 3권과 4권이 별로라고 느끼는 것은 나만이 아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유독 3권과 4권의 하늘 날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특히, 4권의 유머는 다른 책에 비하면 수준이 떨어진다. 과자 봉지 얘긴 정말이지 썰렁하다. 일부러 그런 것일까. 매번 4권을 대충 빨리 읽는다. 작가가 독자한테 짜증내는 부분마저 나온다. 아무래도 애덤스는 소설가라기보다는 코미디언이다.

 

하는 일마다 딱히 잘 되는 일이 없었던 더글러스 애덤스. 그래도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이 있었고 그걸 썼고 별 기대도 안 했는데 대박이 나버렸다. 인생이 잘 풀리는 사람은 유머가 필요하지 않다. 자꾸만 망하고 계속 안 되고 그래서 우울하고 그래도 살아는 해야겠고 그런 사람에게 우스개는 안식처다. 삶을, 우주를 희극의 무대로 보는 순간부터 긴장은 풀리고 화는 누그러진다.

 

 

 

 

 

우울증 걸린 로봇 마빈이 그나마 덜 우울해 하는 장면이 4권 마지막에 있다.

 

"기분이 훨씬 나아졌어요."

 

그래도 작가의 성질머리는 그대로다.

 

이번에는 마빈의 두 눈에서 빛이 진짜로 확실히 영영 꺼졌다.

 

애덤스는 애초부터 이 시리즈 이야기를 희망이나 교훈, 우리가 소설 하면 흔히 여기는 멋지고 제대로된 결말로 나아가는 식으로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결론은 언제나 끝장나는 거다, 암울하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4 - 10점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책세상

 

 

 

 

 

5권 '대체로 무해함'은 다시 이 이야기의 본령인 책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새로운 판 이야기다. 아서와 그 딸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역시나 확실히 모두가 끝장난다.

 

히치하이커 시리즈는 매번 권 말미에 다음 권에 이어질 미끼를 뿌리고 끝낸다. 그런데 5권은 이게 없다.

 

작가가 건강을 위해 갑자기 운동을 하다가 갑자기 죽어 버렸다. 그래서 미완결이다. 6권 '그리고 한 가지 더'라는 책이 보이는데, 다른 사람이 쓴 것이다. 

 

다음은 5권에서 밑줄 그은 부분이다. 대개가 뭐랄까 온건적 허무주의 분위기다. 그럼에도 뭔가 일이 안 풀리는 사람한테는 무척이나 위안이 되는 문장이다. 이유는 모르겠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5 - 10점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책세상

 

생명의 놀라운 점 중 하나는 그것이 온갖 종류의 장소에서 삶을 견디며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아서 덴트는 체념하며 깨달았다. 자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스스로에게 삶을 마련해주는 것임을.

 

그는 바틀던식 우주관에 대해 그가 알게 된 점들을 인정하고 존경할 수 있었다. 그 우주관이란, 우주는 있는 그대로의 우주니까 그걸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떠나라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 언제까지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희망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딱 맞는 사건이 일어나게 하려는 노력의 문제점은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건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아니다. 마침내 일어난 사건은 그가 계획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예전에는 이 소설의 결말을 사랑으로 해석했다. '42에서 확인한 사랑' 뭔가 그럴 듯하지만 아니다. 작가의 결말은 세상 종말이다. 다르게 해석하지 못하게 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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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2 - 10점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책세상

우주멸망, 다시 지구로 - 더글러스 애덤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2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

 

리디셀렉트 덕분에 다시 책 읽기에 재미가 불붙었다. 그동안 내내 미국 드라마 미드 시청과 배틀로얄 게임 배틀그라운드 배그에 빠져 지냈었다. 드라마 시청과 게임 플레이는 예상과 달리 한번 시들해지더니 현재는 다시 예전처럼 하기는 불가능한 지경이 됐다. 특히, 모바일 배그를 위해서 마련했던 태블릿은 이제 전자책을 읽기 위해 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책을 아주 안 읽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책이 해리포터 영어원서, 그 하나만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 지금도 읽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는 미드시청으로 익힌 영어를 영어 원서 읽기로 계속 써먹기 위한 집착이었다. 번역서에 의존하지 않고 영어원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좋긴 하다. 하지만 여전히 영어를 술술 읽는지 못하고 있다. 먼저번에 읽을 때 만든 단어장을 보지 않는다면 사전 찾느라 힘들고 시간이 더 많이 걸렸을 것이다. 영어 단어 하나가 진정으로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도대체 얼마나 반복해서 접해야 하는 것일까?

 

영어원서 합본 페이퍼백을 샀다. 오늘 도착할 예정이다. 해리포터 원서만큼이나 열심히 많이 읽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일단 시작해 볼 작정이다. 예전에 시작부터 너무 어려워서 포기했던 적이 있다. 하드커버 그 책은 팔아버렸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전5권) 읽기는 이번이 네 번째다. 예전에 쓴 독서 기록에 보니 그렇다. 2015년 7월이 세 번째 완독이었으니, 무려 삼 년만이다. 기억하고 있는 것이 80 퍼센트고,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 20 퍼센트였다. 아무래도 이미 아는 농담에 다시 크게 웃기는 힘들었지만 여전히 웃긴다. 백만년 후에도 이 책은 웃길 것이다.

 

1권은 지구멸망이고 2권은 우주멸망 및 시간여행을 통한 지구(과거, 좀 상당히 꽤 아주 옛날로 가 버렸다.)로의 귀환이다. 제목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은 물리적 위치로서의 '끝'이 아니라 시간적 위치로서의 '끝'이다. 즉, 종말이다. 우주 종말을 구경하면서 식사를 하는 곳이다. 레스토랑 이름은 밀리웨이스다. 재림 장면이 제일 웃겼다.

 

2권 유머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자발적으로 먹히려는 소 이야기다. 정확히는 레스토랑에서 고기요리로 제공되는 소 같은 생물이다. 자기를 먹어달라고 조르는 짐승. 이건 뭐 초필살기 유머다. 안 웃을래야 안 웃을 수가 없다.

 

"안녕하세요? 제가 바로 오늘의 특별 요리예요. 제 몸에서 마음에 드는 부위가 있으신가요?" (중간생략) '평화로운 눈길'로 그들을 응시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자 비판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지구에서는, 새로운 초공간 우회로를 내느라 파괴되기 이전, 지구라는 것이 있었을 때, 자동차들이 골칫거리였다. 아무런 해도 안 입히고 땅속 깊숙이 안전하게 잘 감춰져 있던 검고 끈끈한 물질을 끄집어내서 땅을 뒤덮을 타르와 대기를 채울 매연으로 바꾸고 나머지는 바다에 버리는 과정에 따르는 그 모든 불이익을 생각하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좀더 빨리 갈 수 있다는 이익 정도는 도대체 상대가 안 돼 보였다. 게다가 그 결과, 그렇게 해서 도착한 장소라는 게 자기가 떠나온 장소와 별다를 바 없는 장소가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결국 거기도 타르로 덮여 있고, 매연으로 가득 차 있고, 물고기 따위는 없는 것이다.

 

 

 

 

아직도 그 자동차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니. 도대체 과학 기술 발달은 매연 뿜는 자동차를 대체할 탈 것을 왜 아직도 못 만들고 있는 것일까? 전기자동차는 대중으로 상용화되기는 영 어려워 보인다. 미세먼지 어쩌고 저쩌고 고민은 하지만 계속 매연 뿜는 자동차 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그게 해결될 리 없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고 해도 뭐 달라지는가. 여전히 그 매연 뿜는 자동차는 계속 돌아다니다. 그 수가 줄어도 말이다.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단순히 시시껄렁한 우스개 소설로만 여기고 있다가 이런 문장을 만나면 가끔 이보다 더 좋은 철학서적이 없을 듯 싶을 때가 있다. 무척 단순하고 간단하고 간결한 한마디에 꽤나 감동하고 있는 나에 놀란다.

 

제목이 길어서 줄임말을 쓸 줄 알았더니, 사람들이 안 그런다. 인터넷 검색어를 보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고 다 쓰고 있다. 네이버 카페 커뮤니티에서 그냥 '히치하이커'라고 쓰는 이를 보긴 했다.

 

 

이 책의 줄거리는 이렇다. 우주 멸망, 지구 귀환.

 

3권 읽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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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1 - 10점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책세상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처음 읽었을 때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고 통독하기도 만만치 않게 힘들었다. 그러다가 아주 나중에 너무 심심하고 딱히 할 일도 없던 때 다시 읽었더니, 웬걸, 이건 정말 대단히 재미있었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이 책은 망각의 늪에서 나올 기미가 전혀 없었는데, 리디셀렉트에 이 책이 보였고, 책표지가 예뻐서 눈에 잘 띈다, 무심코 다시 읽어 볼까 싶었고 그래서 읽었더니, 캬아 걸작이다. 최고야, 최고!

 

 

 

 

단지 웃기거나 재미있게만 읽히진 않았다. 우주적 농담으로 그냥 웃고 지나갈 법 하면서도 은근히 날카롭고 철학적인 말이 나올 때면, 이게 그냥 웃기려고 한 말은 아닌 것 같다.

 

"시간은 환영(幻影)이야. 점심시간은 두 배로 더 그렇지." 

 

지구에서 갇혀 오래 지낼 수밖에 없었던, 우주여행작가 포드가 한 말이다. 철학과 농담을 병치시킨 이 한마디는, 아직도 여전히 아마도 계속 나를 웃기며 사색에 잠기게 한다.

 

"인생이란, 싫어하거나 무시할 수는 있어도 좋아하기는 어려운 거죠." 

 

자신의 지능에 비해 하는 일이 너무 하찮아서, 우울증에 걸린 로봇 마빈이 한 말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한테는 무척 공감을 많이 받는다. 되는 일 없고 하는 일 없는 요즘의 나한테 이 한마디는 내 몸을 따스하게 감싸 토닥토닥 위로해준다.

 

"나도 내가 찾는 게 뭔지 모른다고." "왜 몰라?" "왜냐하면......왜냐하면......내가 그걸 알면 찾을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몰라." 

 

자신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모르는, 자포드가 하는 말이다. 인생, 혹은 우주의 본질은 명확성보다는 불확정성에 있다. 삶이 명확한 것이라면 고민하고 방황하고 헤매는, 수고로운 인생을 살 이유가 뭐 있겠는가. 죽음만이 확실하다.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는 이들한테는 여전히 죽음 이후도 불확실하겠지만.

 

"과학이 멋진 일들을 해내긴 했지. 하지만 난 옳은 것보다는 행복한 게 훨씬 좋소." 

 

기술 발전이 편리함을 주지만 그게 곧 행복은 아니다. 인생은 계속 골치아프다. 행복은 과학으로 정복할 수 없으니.

 

은하계의 모든 주요 문명은 다음과 같이 뚜렷하고 확연한 세 단계를 거친다. 즉 생존, 의문, 그리고 세련의 단계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왜, 그리고 어디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단계를 특징 짓는 질문은 '어떻게 먹을까'이고, 두 번째 단계는 '우리는 왜 먹는가', 마지막 단계는 '어디서 점심을 먹을까'이다.

 

문명이니 철학이니 뭐니 해도 결국 먹고사는 문제로 귀결된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문제는 사람이면 피할 수 없는 문제다. 생계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하고 먹을 것을 사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돈 문제에서 자유로울 사람도 없다. 내가 생존할 수 있는 힘은 돈이다. 미래의 문예창작을 위해 꾸준히 모아둔 돈은, 현재의 나를 먹고 살게 해 주고 있다. 소설은 단 한 줄도 안 쓰고 있는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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