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아로 시리즈'에 해당되는 글 29건

  1. 2025.01.27 애거서 크리스티 [골프장 살인사건] 푸아로 - 단도, 외투, 사랑
  2. 2025.01.25 애거서 크리스티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푸아로 - 추리소설 규칙 깨기
  3. 2025.01.22 애거서 크리스티 [메소포타미아의 살인] 푸아로 - 밀실 살인 트릭
  4. 2025.01.22 애거서 크리스티 [ABC 살인 사건] 푸아로 - 알파벳 예고 살인
  5. 2025.01.03 애거서 크리스티 [다섯 마리 아기 돼지 회상속의 살인] 푸아로 - 과거 재구성
  6. 2021.09.28 애거서 크리스티 [히코리 디코리 독/히코리 디코리 살인] 푸아로 - 도난 물품 정리
  7. 2021.09.28 애거서 크리스티 [맥긴티 부인의 죽음] 푸아로 - 사형 집행 전 사건 재조사
  8. 2021.09.28 애거서 크리스티 [패배한 개] 푸아로 - 심리의 일관성
  9. 2021.09.28 애거서 크리스티 [핼러윈 파티/할로윈 파티] 푸아로 - 살인 목격한 소녀
  10. 2021.09.28 애거서 크리스티 [시계들] 푸아로 - 4개의 시계
  11. 2021.09.28 애거서 크리스티 [비둘기 속의 고양이] 푸아로 - 혼란스러운 사건
  12. 2021.09.28 애거서 크리스티 [죽은 자의 어리석음] 푸아로 - 연기의 신 트릭
  13. 2021.09.28 애거서 크리스티 [코끼리는 기억한다] 푸아로 - 두 사건이 연결
  14. 2021.09.27 애거서 크리스티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푸아로 미스 마플 - 중단편집
  15. 2021.09.27 애거서 크리스티 [쥐덫] 푸아로 미스 마플 할리 퀸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축소판
  16. 2021.09.26 애거서 크리스티 [테이블 위의 카드] 푸아로 배틀 총경 - 올스타 청백전
  17. 2021.09.26 애거서 크리스티 [벙어리 목격자] 푸아로 - 목격자가 개
  18. 2021.09.26 애거서 크리스티 [뮤스가의 살인/죽은 자의 거울] 푸아로 - 가이 포크스 데이
  19. 2021.09.26 애거서 크리스티 [죽음과의 약속] 푸아로 - 폭군 어머니 밑의 자식들
  20. 2021.09.25 애거서 크리스티 [하나, 둘, 내 구두에 버클을 달아라/애국살인] 푸아로 - 동요 힌트
  21. 2021.09.25 애거서 크리스티 [할로 저택의 비극] 푸아로 - 특이한 캐릭터
  22. 2021.09.24 애거서 크리스티 [헤라클레스의 모험] 푸아로 - 열두 사건
  23. 2021.09.24 애거서 크리스티 [밀물을 타고/파도를 타고] 푸아로 - 죽었다고 생각했던 남편이 되돌아온다
  24. 2021.09.23 애거서 크리스티 [블랙 커피] 푸아로 - 희곡을 소설로 다시 쓴 찰스 오스본
  25. 2021.09.22 애거서 크리스티 [죽음의 사냥개] 추리 공포 심령 단편집
  26. 2021.09.22 애거서 크리스티 [에지웨어 경의 죽음] 푸아로 - 같은 사람이 두 장소에?
  27. 2021.09.21 애거서 크리스티 [블루 트레인의 수수께끼] 푸아로 - 셋 중 한 명
  28. 2021.09.21 [빅 포] 애거서 크리스티 - 만화 같은 첩보소설
  29. 2021.09.20 애거서 크리스티 [푸아로 사건집] 푸아로 - 탐정소설의 계보

애거서 크리스티
골프장 살인사건
이가형 해문출판사

제목 '골프장 살인사건'만 보고 골프채나 골프공에 맞아 죽는 장면을 떠올린 것은 나만이 아니었으리라. 표지마저 골프공이 그려져 있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허나, 살인 현장 근처에 골프장이 있을 뿐이었다. 이게 다야? 그게 전부다. 흉기는 짧은 칼이고 시체가 발견된 장소는 별장 정원 근처 웅덩이다. 뭐야? 골프장하고 아무 관련도 없잖아.

골프장을 포와로는 무질서하다며 무척 싫어하는데 다만 한 가지는 좋아한다. "티 박스들 말이오, 공을 얹어 놓는 거. 적어도 그것들은 균형이 잡혀 있지."(73쪽) 해문의 표지는 적어도 이를 표현했다. 포와로에게 "'질서'와 '절차'는 종교와도"(13쪽) 같다.

여전히 황금가지의 표지는 내 상상을 지지한다. 맑은 하늘을 가로지르다가 골프장 근처를 걷던 사람의 머리를 강타하여 아주 그냥 죽여주는 새하얀 골프공을 말이다. 아쉽다. 내가 얼마나 기대했다고!

크리스티 여사는 반전의 여왕답게 세 번째 발표작에서도 여러 번 뒤집는다. 적어도 세 번 이상은 예상을 깨고나서야 결론에 도달했다.

포와로가 등장하는 두 번째 소설이다. 첫 번째보다 미스터리가 발전했다. 시체가 두 번 나타나고 20년 전 사건이 재현되며 한 사람이 두 사람 역할을 한다. 이렇게 복잡한 수수께끼를 초창기에 써내다니, 경이롭다. 전작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에서 커피잔으로 괴롭히더니, 이 소설에서는 단도로 사람 헷갈리게 한다.

로맨스를 강화했다. 사랑을 위해선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커플들. '스타일즈'에서 청혼했다가 퇴자를 맞았던 헤이스팅스는 '골프장'에서 자기 짝을 만나 키스한다. 왕자 신데렐라 쇼 하며 장밋빛으로 끝을 장식한다.

■ 1회독 해문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9
애거서 크리스티
이은선 황금가지
 
한국이 나온다. 지명으로 딱 한 번 나온다. 집사 가브리엘 스토너를 얘기하면서 나온다. "아프리카에서 맹수 사냥을 하고 한국을 여행했는가 하면."(111쪽) 애 여사님이 한국을 알고는 있었던 모양이다. 괜히 반갑다.

사건의 진상을 이미 아는 상태에서 추리소설을 읽으면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처음에 읽었을 때 어리둥절했거나 사소하다고 지나쳤던 것이 새삼 다시 새롭게 보인다. 더구나 크리스티 작품의 특징이 아주 사소하고도 엉뚱하게 보이는 단서를 맨 앞에 놓고 끝에서 회수해서 사건의 진상을 설명하는 식이라서 더욱 인상적으로 읽힌다. 아, 이렇게 힌트를 줬구나. 그래도 진상을 알긴 대단히 어렵다.

작가는 셜록 홈즈를 의식하면서 푸아로의 캐릭터를 만들어 추리소설을 썼다. 이 소설에서 발자국과 담배꽁초를 중시해서 수사하는 지로 형사를 대비시켰다. 푸아로는 그런 증거보다 사람들의 심리에 초점을 맞춰 수수께끼를 푼다. 헤이스팅스가 미인을 보고 '여신' 봤냐고 묻자, 푸아로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 아가씨'가 보일 뿐이라고 답한다. 에르퀼 푸아로는 사람의 심리를 본능적으로 관찰하고 심문을 통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곰곰 생각한다.

트릭의 복잡함과 반전의 연속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다. 여기에 목숨 같은 사랑으로 마무리한다. 수수께끼의 정교함은 세계 최고다.

황금가지 번역본의 오탈자는 여전하다. 띄어쓰기가 멋대로다.

■ 2회독 2014. 07.09 황금가지 2007년 1판

The Murder on the Links (1923)
Agatha Christie

제기랄(Hell! said the Duchess.)로 시작해서 제기랄(Hell! said the Prince-and kissed her!)로 끝난다.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The Styles Case? the old lady who was poisoned? Somewhere down in Essex? the Cavendish Case)을 언급하며 푸아로 시리즈 두 번째를 이어간다.

이 작품에서 푸아로는 자신은 발자국과 담뱃재를 추적하는 '사냥개'(당연히 셜록 홈즈를 가리킨다.)가 아니라 회색 뇌세포(자신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쓴다.)를 쓰며 왜 그런지에 대한 답을 내는 전문가라고 말한다. 육체보다는 머리를 쓰는 안락의자형 탐정이다. 안락의자형이라고 표현했지만 푸아로는 대체로 현장에 가는 편이고 발자국를 비롯한 현장의 여러 단서를 관찰하고 수집한다. 그러니까 푸아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논리적 추리다. 증거 수집, 필적 조회는 그런 전문가한테 맡기면 그만이지만 사건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자신이 전문가라는 얘기다.

푸아로는 현장에는 가지 않고 수사관 재프(Japp)의 말만 듣고서 플리머스 급행열차 사건(The Plymouth Express Mystery)을 해결했다고 말하는데, 이 이야기는 단편집 패배한 개(The Under Dog and Other Stories)에 있다.

전작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에 이어 헤이스팅스의 일인칭 서술이다.

시작부터가 특이하다. 의뢰인의 집에 도착하니, 의뢰인이 살해당했다. 이런 식의 시작은 다른 작품 '벙어리 목격자(Dumb Witness)'에서 또 한 번 반복된다.

푸아로가 프랑스 형사와 '누가 먼저 범인을 잡나'를 두고 내기를 하는데, 만약에 푸아로가 지면 콧수염을 밀어버려야 했다. 대신에 이기면 형사가 아끼는 담뱃대를 트로피로 가진다.

'의심의 여지 없이(without doubt)', 이 표현이 너무 자주 나온다. 눈에 거슬린다.

◆ 3회독 2015.07.16 ~ 20 영어원서

골프장 살인사건 해문 2010년 중판 완독 후기

번역은 괜찮은데, 접속사 뒤에 쉼표는 거슬렸다.

용의자들 모아놓고 사건 추리하는, 푸아로 파이널이 이 작품에는 없다.

뒤집기 반전이 워낙 많아서 짜증 혹은 곤란할 지경이다. 독자가 범인 못 맞추게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집필 목표로 삼은 탓이겠지. 이래서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다. 

푸아로가 지로랑 범인 잡기 내기를 하는데 그냥 돈이다. 각색한 드라마에서 푸아로가 지면 콧수염을 미는 거고 지로가 지면 담배 파이프를 주는 거로 나온다.

미스터리가 워낙 복잡해서 따라잡으려면 생각 좀 해야 한다. 드라마 각색은 더 간결하게 바꾸고 더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로맨스를 제대로 다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는 두 남녀. 

특히, 헤이스팅스의 사랑. 드라마는 더 멋진 장면으로 연출해서 보여준다.

추리물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클리셰가 보인다.

1. 사건 의뢰를 받아서 가 보니, 의뢰인이 살해되었다.

2.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범죄 사건이 재현된다.

2025.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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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The Murder of Roger Ackroyd (1926)

이 장편소설은 1926년 발표했지만, 이야기 속 시간 흐름 순으로 1927년 발표작 '빅 포' 다음이다. '빅 포' 끝장면에서 "나는 은퇴할 걸세. 가능하다면 호박을 심고 가꾸겠네."라고 나온다. 푸아로의 희망과 달리, 푸아로는 은퇴는커녕 죽는 그 순간까지도 사건 해결하는 탐정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게 된다. 이 소설로 애거서 크리스티는 추리소설가로서 확고한 명성을 얻었고 이후 푸아로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은 창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은 '스타일즈 저택의 괴사건'과 비슷한 세팅이다. 애 여사 스타일이다. 시골 작은 마을인 킹스 애버트의 부잣집 저택인 펀리 파크를 배경으로 돈 문제와 애증이 얽혀 있다. 대지주인 로저 애크로이드가 죽자, 때마침 이곳에 은퇴해서 호박을 기르고 있던 푸아로가 사건 수사에 착수한다. 헤이스팅스 대신에 마을 의사인 셰퍼드가 사건의 충실한 기록자로서 푸아로를 돕는다.

모든 사람들에게 동기가 있고 모든 이들이 의심스럽다. 가장 손쉽게 범인으로 지목되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무고한 사람이다. 애 여사 추리소설이 언제나 그렇듯,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람이 살인자로 밝혀진다. 사람들 모아놓고 푸아로가 사건 해설을 친절하게 자신의 추리력을 뽐내면서 들려준다.

이 소설은 살인-자살-살인-자살의 연속 구조가 흥미롭다. 푸아로의 마지막 사건 '커튼'에서 이 구조를 반복한다. 인과의 사슬이며 추리소설의 운명이다. 범인 잡기 놀이로 치부되는 추리소설에서 인간의 운명론이라니.

이 작품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전조로 보인다. 상황을 더욱 극단으로 몰아넣은 점을 뺀다면 기본 구조인 살인-자살 구성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과 같다. 스포일러가 되려나. 이렇게 말해도 범인 잡기는 쉽지 않으리라.

걸작이자 논란이 많은 소설이다. 

독자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때리는 반전을 주려면 철석같이 믿는 규칙을 깨야 한다.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말이다. 계란을 특별한 도구 없이 맨손으로 세워 보라. 이 말에 사람들은 절대로 알을 깨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얽매여 해내지 못한다. 결국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답은 간단했다. 모서리를 조금 깨면 된다. 깬 부분으로 세운다.

추리소설 독자는 책장을 열어 읽기 시작할 때부터 무조건 따르는 믿는 것들이 있다. 탐정은 범인이 아니다. 탐정을 제외한 여러 인물들 중에 한 명이 범인이다. 사건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범인이 아니다. 살인자는 이야기가 끝나 전에는 자살하지 않는다. 그래야 잡히고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있으니까.

크리스티의 걸작으로 불리는 작품들을 살펴보면, 대개 추리소설의 암묵적 약속을 사다리 걷어차듯 과감하게 어긴다. 절대로 사다리를 치우지 않으리라 믿었던 사람들은 난리가 난다. 이 서술 트릭이 아직도 지금도 통한다. 읽은 사람들 여전히 난리를 친다.

대개들 절대로 범인이 될 수 없는 사람은 빼고 답을 찾는다. 이러니 작가의 폭군적인 횡포에 당하고 만다. 나는 언제나 범인이 제일 아닐 것 같은 사람부터 찾는다. 절대 아니라고 여기는 것부터 의심한다. 이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러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생각한다. 범인은 맞추지만 과연 어떻게 그가 범인이 되었는지는 모르긴 마찬가지지만.

크리스티의 전기문에 보면, 작가는 언제나 소설을 완성한 후에 주변 지인들한테 읽힌 후 범인을 쉽게 찾아내면 범인을 바꿔서 다시 썼다고 한다. 그러니 범인을 못 맞춘다고 자책하진 마라. 못 찾겠게 썼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맞추려고 하는가.

크리스티가 만든 미스터리는 복잡하고 정교하다. 결과를 보니까 쉬워보일 뿐이다.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말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문장에는 문학적 수식이라는 거품이 거의 없다. 단순한 문장으로 계속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재치 있는 우스개를 넉넉히 종종 넣어서 읽는 재미를 더한다. 문장에 뿌린 양념은 웃음이다. 쉼표처럼 살인 사건의 범인 잡기라는 긴장감을 풀어준다.

크리스티의 미스터리는 내용상 그다지 큰 사건이나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한정된 장소에서 복잡다단한 인간관계의 사슬이 추적하며 누가 누구를 어떻게 죽였는지 짐작해 보는 재미는 독자의 취향에 호불호가 있다. 범인이 될 수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알아보고 기억하고 관찰한다. 어느 정도 끈기가 있어야 한다. 물론 책 읽기 자체가 어느 정도의 인내심이 필요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확신하고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누군가 다른 사람이 먼저 말하면, 이상하게도 화를 내며 부인하고 싶어진다." 아무리 진실이더라도 상대가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 예상되면 침묵하라.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을 누구한테 말할지 말지 안다.


영어원서로 완독한 후기

이 작품이 워낙에 서술 트릭으로 유명하다 보니, 누가 범인인지는 다들 기억한다. 반면에 전반적으로 보여준 용의자들의 비밀은 잊어 버린다.

남는 기억은 결과지만 읽는 재미는 과정이다. 자잘한 비밀들이 하나씩 밝혀지는 재미가 쏠쏠했다.

용의자 모두 모아놓고 진실을 밝히는, 푸아로 파이널 작렬은 언제나 최고의 즐거움이다. 계속 안 알려줌. 아직 때가 아님. 이러다가 끝에서 다 풀어준다.

끝까지 궁금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최강이다. 우리들 중에 살인자가 있다는 긴장감은 거의 대부분 기본값으로 만들어 놓는다.

서술 트릭과 과학기술 트릭이 있다. 우연인지,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도 그렇다. 다만, 이 소설에 나오는 기술은 아직도 쓰고 있다. 사라지지 않을, 과학기술 트릭을 써야 함을 명심해 본다.

2025.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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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의 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김남주 황금가지

메소포타미아의 죽음
유명우 해문출판사

Murder in Mesopotamia (1936)

메소포타미아 유적 발굴 현장에서 일어난 밀실 살인이다. 수수께끼 풀이식 추리소설이다. '연기의 신' 같은 말도 안 되는 설정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지낼 수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어떻게 못 알아 보지?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고 하지만. 이 때문에 좀 억지였다.

레더런 간호사가 수기 형식으로 사건을 기록한다. 헤이스팅스 대위와 재프 경감은 등장하지 않는다. 코믹 삼인방의 치고받기 개그를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쉽다. 푸아로는 사건이 일어난 후에 등장한다. 사건 현장에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살인 사건을 해결해달라는 의뢰를 받고서 가기 때문에 100쪽 넘게 읽어서야 푸아로를 만날 수 있다.
   
간호사의 눈에 비친 푸아로의 모습은 이렇다. "키는 165센티미터쯤 되고, 인상이 기묘하고 몸집이 통통했으며 몹시 눈에 띄는 콧수염에 달걀 같은 두상을 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희극에 나오는 이발사 같았다!"(127쪽)  

애 여사는 일부러 푸아로를 셜록 홈즈와는 정반대의 캐릭터로 만들었다. 푸아로는 증거 수집과 관찰을 통한 물적 추리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애 여사는 이런 방식의 추리를 쓰면 독자가 함정에 빠지도록 이야기를 구성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진술과 외모에서 드러나는 심적 추리에 집중한다. 

모두 살인할 동기가 있다. 모두 의심해야 한다. 푸아로는 소거법을 이용한다. 일어난 사건과 남겨진 증거에 제대로 맞는지를 하나씩 따지면서 범인을 찾아낸다. 그렇게 해서 멋진 마무리를 해내는 '푸아로 피날레'는 실제 현실에서는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가상 소설에서는 극적 효과가 뛰어나니까 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모인 사람들 중에 살인자가 있는데, 자기가 머리 좋다고 뽐내기 위해 목숨을 걸면서까지 범인을 그 자리에서 밝히겠는가. 한 번 죽이고 두 번 죽이고 세 번 죽인 살인자가 가만있겠는가. 

이 작품의 밀실 트릭은 알고 나면 화가 나서 근처에 있는 창문을 부셔버리고 싶을 것이다. 밀실 트릭 대부분이 단순하지만 그걸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콜럼버스의 달걀 같다. 알고 나면 쉽지. 그전에는 불가능해 보인다. 나는 이 책을 예전에 읽었었고 해당 트릭을 기억하고 읽었다. 우리 집 창문은 멀쩡하다. 햇살이 따사롭다.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밑도 끝도 없는 심연의 심리 묘사인 '도스토옙스키'식이 아니라 '실용 심리학'이다. 폐쇄적인 집단인 유적 발굴단에 매력적인 미인이 들어온다. 어떻게 될까? 발굴단장의 아내는 주변 남자들을 유혹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이내 차버리는 '치명적인 여인'이다. 주변 여자들의 질투가 하늘 높이 치솟는다. 

정교하게 만든 수수께끼 정통 추리물이다. 비스말라히 아르 라흐만 아르 라힘.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알라신의 이름으로. 사건 재구성으로 과거를 복원하는, 범죄 추리의 고고학을 즐겨라.


메소포타미아의 살인 영어원서 완독 후기

밀실 살인 트릭을 알고 읽었다. 이것이 소설의 핵심이자 충격이었다. 중학생 때 읽은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니. 나만 그런 게 아니더라.

범인이 자백하지 않았다면 이 범죄는 법의 심판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푸아로 탐정은 심리적 추리만 했을 뿐이고 물질적 증거로 범인을 확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심리 성격 분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는 지루한 편이라서 기억하는 독자가 드물다.

살인이 일어나고 푸아로가 초빙되는 식이라서 다행히 시작부터 그 짜증나는 초급 불어를 안 만날 수 있었다. 나중에 결국 보게 되는데 무시하고 읽었다.

이야기 끝 후일담에서 오리엔트 특급 살인(1934년)을 언급하고 있다. 출판이 메소포타미아의 살인(1936년)가 늦지만 시간순으로는 더 빠른 듯.

푸아로 파이널은 역시 재미있었다.

2025.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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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 살인 사건
The A.B.C. Murders (1936)
애거서 크리스티
김남주 황금가지
유명우 해문출판사
박순녀 동서문화사

예고 연쇄 살인 사건. 푸아로에게 도전장 편지가 날아든다. "이달 21일 앤도버를 주목하십시오. - ABC" 알파벳 순서대로 살인이 일어난다. A로 시작하는 장소에서 A로 시작하는 사람이 죽는다. B가 터지고 C가 실현된다. D에서는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ABC 씨가 잡히는데 푸아로는 그가 범인이 아니라고 한다. 도대체 범인은 누구인가?

박진감 넘치게 전개된다. 헤이스팅스의 1인칭 서술과 ABC 씨의 모습을 보여주는 3인칭 시점이 교차된다. 읽기 시작하면 애 여사 스타일에서 벗어난 사이코패스 범죄려니 싶다. 절대 아니지. 이런 식은 영국적이지 않다. 모든 것은 논리적 설명으로 해명되어야 한다. 다 읽고나면, 전형적인 애 여사님의 영국 추리소설이다. 서술 방식이 독자를 속이기 위한 장치임을 알아채는 것은 소설을 다 읽어서야 가능하다.

예고살인이 착착 진행되면서 범죄자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며 긴장감과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구성력이 훌륭하다. 푸아로가 이미 일어난 살인사건 관계자들을 수사팀으로 꾸려가면서 범인을 잡아낸다. 역시나 다들 모여라 하고서는 "범인은 너야!" 하고 꼭 찍어내는, 그 유명한 '푸아로 피날레'가 마지막을 장식한다.

중학생 때 이 소설을 처음 읽었다. 다시 읽으니, 중간쯤 읽었을 때 범인이 기억났다. 당시에는 범인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라서 뒤쪽을 읽었고 그래도 왜 범인인지 이해가 안 되서 다시 앞으로 가서 읽고 역시 또 궁금해서 다시 뒤쪽을 읽는, 이상한 독서였다.

이제 크리스티 반전 스타일을 워낙 잘 알아서 순진하게 속지 않는다. 독자가 범인을 도저히 예상하지 못하게 하려면 범인을 눈앞이 아니라 아예 코밑에 배치해야 한다. 그러면서 독자의 눈길을 명백하게 잘 보이는 쪽으로 몰아야 한다. 이러면 독자는 범인과 직접 관련된 것에 집중해서 읽게 되고 결정적 힌트는 대충 빨리 읽거나 건너뛴다.

다음에 읽을 '메소포타미아의 살인'도 중학생 때 읽은 기억이 있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범인을 알고 읽어도 재미있는 것은 뭘까. 정답을 못 맞히게 문제를 만들어내는, 글쓰기의 재미를 엿보는 재미다. 재미의 재미다.

오탈자
게신 → 계신
182쪽 ABC 살인 사건 황금가지 1판 6쇄 2017년

수법을 아는 상태에서 읽었다. 범인이 누군지는 모르고 읽었다. 그래서 푸아로 파이널을 재미있게 즐겼다. 그래 이 맛이지. 이 재미에 추리소설을 거듭 찾아 읽는 것이다.

타자기 지문은 좀 아니지 않나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추리소설 읽기 경력자라서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딱 감이 온다.

영어원서에는 푸아로가 하는 프랑스 어가 나오는데, 이게 은근 귀찮고 짜증난다. 모나미는 안 찾아 봐도 되지만 나머지는 해당 뜻을 불어 사전 검색해서 찾아야했다. 초반 읽다가 번역본으로 갈아탔다.

꿈의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2025.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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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2
다섯 마리 아기 돼지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
황금가지 펴냄
종이책 2007년 발행 2013년 개정판
전자책 2014년 발행 2022년 업데이트

회상속의 살인
이가형 옮김
해문출판사 펴냄
종이책 1998년 10월 발행

Murder in Retrospect (1942) 미국판
Five Little Pigs (1943) 영국판

'다섯 마리 아기 돼지'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 중 예외적인 작법을 썼다. 애증의 거미줄 속에 살인 수수께끼가 있고 푸아로가 짜잔 놀라운 반전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여전하지만, 과거의 사건을 용의자들의 진술만으로 재구성하여 진실을 밝혀낸다는 점에서 이색적이다.

이 책 제목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동요를 이야기의 뼈대로 차용해서 그렇게 붙인 모양인데, 이야기 전개와 별 상관은 없다. 애써 관련이 있다고 한다면 고작해야 유력한 용의자가 다섯 명이라는 점 정도다. 미국판/해문 제목이 소설 내용과 잘 어울린다. '회상 속의 살인(Murder in Retrospect)'이다.

별다른 트릭이 없고 독살한 것이 뻔히 드러난 판국에서 단서는 오로지 그때 그곳에 함께 있었던 용의자들의 진술뿐이다. 그것도 16년이 지난 일을 기억해내며 자기 입장에서 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진술에서 과연 살인범을 잡아낼 수 있을까.

같은 살인 사건이지만 사람마다 다르게 진술된다. 이 설정을 천재적으로 써내려간 작가가 있었으니, 아쿠다카와 류노스케다. 단편 ‘덤불 속’이다. 영화 ‘라쇼몽’으로 더 잘 알려졌다. 애 여사의 이 작품도 같은 설정이라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읽어 보니 기대만큼은 아니었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문학의 천재는 아니었다. 인물의 심리를 깊게 파고들지 않고, 묘사력이 훌륭해서 읽으면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은 문장력도 없다. 정교한 추리게임 오락구조물을 만드는 데 천재였을 뿐이다. 

이 소설의 후반부 반전에 반전은 놀라웠다. 기교의 반전이 아니라 심리의 반전이었다. 결과적으로, 살인자는 살인으로 심리적으로는 자신을 죽이는 비극에 처한다.


황금가지 전자책으로 구입해서 다시 읽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이야기 공학이 멋지다. 세세하게 가공한 솜씨는 역시 미스터리 소설의 장인임을 증명한다. 케롤라인 크레일의 모습을 그려내는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인물의 깊은 감정까지는 나아가지 않으며 중점적으로 묘사하지도 않는다. 추리소설 범죄 수수께끼 장르 틀 안에서 자제한다.

이야기 기술력은 '예술 문학'이 아니다. '기술'이다. 반전에 반전을 만들면서 세세한 것들이 다 들어맞아서 결론을 제시하는 기교다. 바로 이것이 애 여사의 매력이다.

추리소설은 글의 목적이 범죄 수수께끼다. 따라서 인물의 감정을 깊게 파고들거나 세세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그것이 목표 지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차적이다. 범죄 관련 심리적 상태까지가 묘사의 한계다. 더는 나아가지 않는다. 벗어나기 시작하면 예술이고 문학이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아무도 '추리소설'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범죄는 있으나 수수께끼 제시와 그 해결이 글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역이 있어서 출판사에 제보했다. '배다른 여동생'이라고 나오는데, 아버지가 다른 여동생이다. 본문에도 나온다. "두 사람은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가 달라서요."

2021.11.01

전자책 관련 수정이 있었다.
1. 제보한 오역이 수정된 것을 확인했다. '이부 여동생'으로 올바르게 나온다.
2. 표지가 바뀌었다. 본래는 한글 번역 제목이 크게 나오고 영어 원서 제목이 없었었다. 이제는 영어 제목이 크게 나오고 그 밑에 한글 번역 제목이 작게 보인다. 종이책 표지와 동일하게 한 것이다.

수정 전
수정 후

2024.06.18

말의 오해로 반전을 만들었다.
심리적 일치/불일치를 추리의 방법으로 이용했다.
짧고 강렬한 마무리가 인상적이었다.

전자책에 오탈자
바램 → 바람
바래요 → 바라요

2025.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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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코리 디코리 독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홍현숙 옮김/황금가지

히코리 디코리 살인
정성희 옮김/해문출판사

Hickory Dickory Dock (1955년) 영국판
Hickory Dickory Death (1955년) 미국판

제목을 번역할 때 해문 번역판은 미국판 제목을 따르고 황금가지는 영국판 제목을 따랐다. ‘히코리 디코리 독’은 동요 제목이다. 히코리 거리에 있는 하숙집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다. 제목이 하숙집의 비밀을 알려주는 힌트였다. 독(dock)은 창고, 물품 하역소를 뜻한다.

푸아로의 비서인 미스 레몬의 언니가 일하는 하숙집에서 자꾸만 물건이 도난당한다는 것이다. 푸아로는, 신경이 쓰여서 자꾸만 오타(?)를 내는 비서를 위해 사건 해결에 나선다.

만나서 도난당한 물건 목록을 보니, 별스럽다. 일관성도 없고 잡동사니로 보이는데, 푸아로는 흥미를 느낀다. “파티용 구두(새 구두의 한 짝), 팔찌(모조 보석), 다이아몬드 반지(수프 접시 안에서 발견), 화장용 분, 립스틱, 청진기, 귀걸이, 라이터, 바지, 전구, 초콜릿 상자, 배낭, 붕소 가루, 목욕용 소금, 요리책.” 도난 사건은 싱겁게 빨리 끝난다. 범인이 자수한 것이다.

자수했고 약혼까지 발표한 범인이 죽는다. 자살인 듯 보이나 독살이 의심스럽다. 용의자는 하숙집에 사는 유학생들 중에 한 명인 듯한데, 도대체 누가 왜 죽였을까?

엉뚱하고 난잡해 보이는 도난 물품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 범행의 진상이 밝혀진다. 푸아로의 추리가 기막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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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긴티 부인의 죽음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정회성 옮김/황금가지
심윤옥 옮김/해문출판사
Mrs McGinty's Dead (1952)

살인자를 잡았지만 뭔가 석연치 않다. 판결은 이미 사형으로 났고 집행일만 기다리고 있다. 6개월 뒤에 퇴직하는 스펜스 총경은 이 사건을 재조사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한다. 6년 전 사건에서 멋진 솜씨를 보여준 ‘에르퀼 푸아로’를 찾아서 사건을 의뢰한다.

죽은 사람이나 죽였다고 판결이 난 사람이나 평범하고 별다른 동기가 없어 보인다. 파출부 일을 하며 하숙을 치는 작은 시골 마을의 예순네 살 과부인 맥긴티 부인을 도대체 왜 죽인단 말인가. 하숙비가 두 달 밀린 청년 벤틀리는 꼼짝없이 범인으로 지목된다.

작은 시골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사립 탐정이 수사하면서 각자들 뭔가 숨기는 것이 있었다. 수사 중에 푸아로는 누군가에 의해 철로에 밀쳐져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옛날 살인 사건 신문 기사와 그와 관련된 사진이 발견되면서 ‘맥긴티 부인 살인 사건’이 이와 관련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던 중 그 사진 속 인물을 안다고 진술한 업워드 부인이 여자로 추정되는 사람한테 살해당한다.

반전에 반전이 기다리고 있으나 예전 걸작만큼은 아니다.

푸아로는 먹는 즐거움에 빠져 있고 헤이스팅스가 곁에 없어서 아쉬워한다. “사람이 하루에 세끼밖에 먹을 수 없다는 게 정말 한스럽군.” “헤이스팅스는 내가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지.” 그리고 여전히 본인의 잘남을 알아줄 사람을 그리워한다. “온종일 혼자 의자에 앉아 나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지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 누군가 곁에서 맞장구쳐 줄 사람이 있어야 해.”

푸아로만 나오면 이야기 분위기가 너무 삭막하다. 이 소설에는 친근하고 털털한 ‘올리버 부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이자 사과 마니아다. 항상 사과 봉지가 터질 지경으로 많은 사과를 가지고 다닌다. 머리카락은 도대체가 정돈이 안 되고 모자는 깔고 앉고서는 내 모자 어디나 찾는다. 별 다른 근거도 대지 않고 직감으로 저 사람이 범인이라고 말한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올리버 부인을 통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소설 속에서 풀어놓는다. “저는 책을 써서 돈을 엄청나게 벌었어요. 하지만 그 돈을 대부분 흡혈귀들한테 빼앗겼답니다. 제가 책을 쓰면 쓸수록 그들이 더 많은 돈을 챙길 테니까 굳이 무리해서 일하지 않기로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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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한 개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강호걸 옮김
해문출판사

The Under Dog and Other Stories (1952)

원서는 9편이나 해문 번역판은 ‘클레이펌 요리사의 모험(The Adventure of the Clapham Cook)’이 다른 단편집 '리가타 미스터리'(76권)에 있는 관계로 빠져서 총 8편이다.

이 책에는 없는, 단편 The Adventure of the Clapham Cook : 갑자기 사라진 요리사를 찾는 임무다. 첫인상은 간단하고 시시했으나 사건의 진상은 더 크고 중대한 일로 밝혀진다. 초중반 펼쳐지는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반전보다 재미있다.

중편 패배한 개 (The Under dog) : 심리의 일관성으로 범인을 잡는다. “이번 사건을 통하여 제가 계속 찾고 있었던 사람은 성격이 급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중간 생략) 인내심과 자제력이 강한 사람, (중간 생략) 싸움에 진 개의 역할을 맡아온 사람”(83쪽) 범인의 성격과 범행의 성격과 맞는 자를 찾는다. 푸아로의 범죄심리학 원리다.

단편 플리머스 급행열차 (The Plymouth Express) : 장편 The Mystery of the Blue Train[푸른 열차의 죽음(해문); 블루 트레인의 수수께끼(황금가지)]의 단편 버전이다. 핵심 트릭과 이야기 구조는 같다.

단편 승전무도회 사건 (The Affair at the Victory Ball) : 가장 재미있었다. 이탈리아 희극의 인물로 분장한 이들 중에서 범인을 잡는데, 녹색 술장식이 힌트로 주어진다. 힌트를 더 주자면 용의자들 중에 배우가 나오면 ‘연기의 신’ 트릭을 의심해 봐야 한다.

단편 마켓 베이징의 수수께끼 (The Market Basing Mystery) : 소설집 Murder in the Mews and Other Stories [뮤스가의 살인(황금가지); 죽은 자의 거울(해문)]에 있는 중편 ‘뮤스가의 살인’과 거의 똑같은 트릭이다. 인물과 배경만 다르다.

단편 르미서리어 가문의 상속 (The Lemesurier Inheritance) : 르미서리어 가문에는 저주가 있다. 장남에게는 절대로 상속이 안 되는 것이다. 장남이 사고로 죽어 나갔던 것이다. 고의로 사고를 위장한 살인하려는 단서를 잡은 푸아로가 이 저주를 깬다.

단편 콘월의 수수께끼 (Cornish Mystery) : 자신이 독살당하는 것 같다며 도와달라는 의뢰인, 펜젤리 부인. 주치의한테 물어보니, 급성위염이라고 할 뿐이다.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제초제가 반이나 비어 있어 의심스럽다. 제초제는 남편이 1년 전에 구입한 것이다. 남편은 치과의사인데 간호사 아가씨와 불순한 관계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헤이스팅스가 보기에는 부인의 히스테리 증상으로 꾸며낸 이야기인데, 푸아로는 남편을 믿으려는 부인의 성격상 그렇지 않다며 수사에 들어간다.

단편 클럽의 킹 (The King of Clubs) : 브리지 카드 게임이 나온다.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 러버를 5~6회했다는데 뭔 소린지 원. 연기의 신이 등장한다. 장편 ‘나일 강의 죽음’에서 그 여자가 했던 트릭을 이 단편에서 하고 있다. 같은 트릭에 또 속는 경우는 드물지.

단편 잠수함의 설계도 (The Submarine Plans) : 소설집 Murder in the Mews and Other Stories [뮤스가의 살인(황금가지)]에 있는 중편 ‘미궁에 빠진 절도(The Incredible Theft)’와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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핼러윈 파티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왕수민 옮김/황금가지

할로윈 파티
임경자 옮김/해문출판사

Hallowe'en Party (1969)

추리소설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이는 반드시 죽게 된다. "그때는 그게 살인인 줄 몰랐으니까. 나중에야 그게 살인이었다는 걸 알았어. 한두 달 전에 누가 한 말이 갑자기 생각났거든. 내가 본 건 살인이 분명해." 날 죽여 달라고 요청하는 꼴이다.

살인을 목격했다고 말한 소녀 조이스는 사과 건지기 놀이를 서재에서 했던 모양인데 누군가에 의해 물속에 처박혀 숨이 막혀 죽는다. 사과 좋아하는 올리버 부인, 사과를 끊는다. "사과는 두 번 다시 쳐다보고 싶지도 않아요."

결정적 단서를 코앞에 두는 기법이다. 아, 그래도 범인이 왜 그러는지 추리하기 어렵다. 얘들 과거를 무슨 수로 알아낼 수 있냐고. 작가님이 실은 옛날에 어쩌고저쩌고 하면 네네 하고 받아들여야지. 별수 없다.

지난 발표작 '세 번째 여인'처럼 이번에도 자기 아버지를 못 알아보는 딸이라니. 나이가 어리니까 그럴 수 있겠다만. 어떻게 모를 수 있죠, 여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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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
황금가지 펴냄
The Clocks (1963)

시작부터 당혹스럽다. 시체를 발견했다며 어느 집에서 뛰쳐나오는 여자. 가서 보니 남자가 죽어 있었다. 남자의 옷에서 명함을 발견해서 보니 보험회사 직원이다. 집주인한테 혹시 보험을 들려고 만나려고 했냐고 물으니까 아니란다. 모르는 사람이란다. 게다가 시체를 발견한 여자 속기사도 부른 적이 없단다. 도대체가 맞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발견된 시계들이다. 역시나 집 주인은 자기 시계가 아니란다. 4개의 시계 모두 4시 13분을 가리키고 멈춰 있다. 시계에는 지문이 발견되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인가? 이어서 살인 사건이 또 발생한다.

크리스티 소설에서 '연기의 신' 트릭에 워낙 많이 당해서 시체를 처음 발견한 여자를 의심했다. 하지만 글이 그쪽을 의심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어 여자는 용의자에서 제외했다. 생각해 볼 구석이라고는 책 제목처럼 시계밖에 없었다. 뭐지? 뭘까? 뭐야? 궁금하네.

시계는 맥거핀이었다. 소설 원고를 타이핑해주는 곳이라고 얘기할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다. 속으라고 만든 장치니 안 빠질 수도 없다. 열심히 시계에 주목한다. 제목에 있지, 표지에 있지, 뭔가 있어 보이지.

유명 추리소설에 대한 평이 푸아로의 입을 통해 실려 있다. "셜록 홈즈 이야기는 현실성도 떨어지는 데다 오류도 많고 인위적이야. 하지만 글 쓰는 기술은, 아, 그건 전혀 다른 거지. 언어의 즐거움을 한껏 느낄 수 있고, 게다가 무엇보다도 왓슨 박사라는 훌륭한 캐릭터를 창조해 냈어. 아, 그건 정말 대단한 성공이야."(187쪽) 독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셜록 홈즈지만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왓슨이 중요하다. 기상천외한 인물이야 만들면 그만이지만, 이 인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쓰는 일은 어렵다. 왓슨의 1인칭 서술로 실감나게 쓴 아서 코난 도일의 언어 기술력은 놀라운 것이다.

...

해문 번역본으로 다시 읽었다. 새로 읽는 기분이었다. 범인과 범행 수법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야기의 윤곽만 어렴풋이 안 상태로 읽었다.

첩보소설과 추리소설이 섞였다. 스파이 잡기와 살인범 체포를 동시에 해낸다. 첩보 관련 간단한 암호문이 있는데 풀기 쉽다. 너무 쉬워서 우스꽝스럽다.

초반부에 환상적인 상황을 만들어내서 독자의 호기심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푸아로가 등장하는 소설이지만 전면적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콜린 램이라는 배틀 총경의 아들과 램의 친구인 리처드 하드캐슬이 열심히 수사한다. 램이 사건 해결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자 관련 서류와 사건 이야기를 가지고 푸아로한테 간다. 언제나 그랬듯 푸아로는 들은 얘기와 관련자 진술만으로 사건을 단번에 해결한 듯 보이지만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약을 올린다.

14장에서 푸아로가 온갖 추리소설을 비평한다. 물론 애거서 크리스티 본인의 평가다. '노란 방의 비밀'과 '셜록 홈즈의 모험'을 극찬한다. 미국 탐정소설에서 알콜 중독이 지나치게 많이 나오는 것을 비아냥거린다. "미국 스릴러 물에 나오는 탐정이 매 페이지에서 마셔대는 위스키의 양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은 나에게 별로 흥미가 없다네. 그가 장식용 서랍에서 꺼낸 술을 1파인트 마시든, 반 파인트 마시든 그것이 이야기를 전행시키는 데에는 사실 영향을 주는 것 같지가 않으니까."(143쪽)

푸아로 피날레는 사건을 의뢰한 렘마저 살인 용의자로 올려 놓으면서 극에 달한다. 사건이 복잡해보일수록 그 해결은 단순한 법.

설명을 다 들었어도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하다. 시계 4개 중에 1개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페브마시 양 것인데 아니라고 거짓말을 한 것일까. 이렇게 복잡한 수수께끼를 만들어서 기여코 반전을 만들어내야 할까. 머리 아프다.

푸아로 출연작이 그렇듯, 이번 소설에서도 한 커플 탄생했다. 본인 연애는 젬병이면서 남들 로맨스 성사를 왜 그렇게 잘하는지. 미스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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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속의 고양이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수경 엮음/황금가지
최운권 옮김/해문출판사
Cat Among the Pigeons (1959)

푸아로가 책의 중후반에서야 나온다. 독자로서는 추리소설에 사건 해결자인 탐정이 너무 늦게 등장하면 갑갑하다. 나름 이유가 있긴 하다. 다른 이가 사건 수사와 경과를 어느 정도 한 후에 푸아로가 개입하도록 한다.

메도우뱅크라는 고급 사립학교에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게다가 이 학교를 다니던 공주가 실종된다. 유괴된 것으로 짐작된다. 용기와 지략이 있는 학생 줄리아가 보석을 발견하고 푸아로에게 가서 사건을 의뢰한다.

스파이, 보석, 권총, 살인, 유괴 혹은 실종, 다시 살인, 또 살인. 살인범은 교사들 중에 한 명이다.

실종하면 생각나는 트릭은? 아, 그 고전적 수법인 '연기의 신'이다. 이 사람들아, 무릎을 보라니까. 무릎! 여기에 학교에 잠복한 비밀요원까지 등장한다. 범인을 맞출 생각은 접는 것이 현명하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을 의심하는 것은 기본이다.

여러 사건과 여러 사람이 겹쳐 있어서, 혼란스러운 사건이다. 당신이 범인을 최대한 못 맞추게 쓴 소설이니까 일반적인 상식으로 접근해서는 절대 진상을 알 수 없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에서 간결하고 단순한 트릭을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읽고 나서도 믿기지 않을 만큼 기묘하고 복잡한 트릭을 쓴다.

제발, 당신이 보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니라는 식의 '연기의 신' 트릭과 살인범이 포함된 용의자들을 다 불러 모와서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는 '푸아로 피날레'는 그만했으면 싶다. 전자는 추리소설의 공정한 게임 규칙에 어긋나고 후자는 살인범을 흥분시키는 것은 탐정에게는 물론 같이 모인 무고한 사람들에게 좋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이 소설에서도 살인자가 총을 쏜다. 지난 작품들 중에서는 푸아로가 살인범한테 멱살이 잡혀 죽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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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어리석음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송경아 옮김/황금가지
나승덕 옮김/해문출판사
Dead Man's Folly (1956)

폴리는 소설에서 두 가지 의미다. 하나는 어리석음을, 다른 하나는 황금가지 번역본 표지에 보이는 건물을 뜻한다. 그리고 이 건물은 사건의 중요한 단서다. 건축가가 생뚱맞은 곳에 그런 콘크리트 건물을 지었다고 불평한다. 눈치 빠른 독자는 콘크리트 하면 떠오른 것이 있으리라. 아무리 둔감해도 그렇지, 제목에 '죽은 자'라고 쓰여 있지 않은가.

올리버 부인이 등장해서 소설 분위기가 밝다. 인간 사과나무(?)로서 사과 알이 떨어뜨리며, 실용적인 전원 스타일 머리 모양을 선보이며, 여성적 직관으로 근거도 증거도 없이 살인자를 팍팍 찍는다.

올리버 부인은 추리소설 작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해서 탐정 놀이를 마련하는데, 시체 역할을 맡은 아이가 진짜로 살해당한다. 이 무고한 소녀를 누가 왜 죽인 것일까? 여기에 여인의 실종에 겹친다. 이어서 일어나는 살인.

추리소설이 정당한 게임이 아니다. 작가의 횡포에 독자는 당하는 것이 추리소설이다. 주어진 단서로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특히, '연기의 신' 트릭을 쓰는 작품에서는 마음 편하게 포기하고 작가가 뭐라고 말하나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이야기 시작 부분에 결정적 힌트를 아무런 강조점 없이 놓았는데, 이를 알아차렸다고 해도 범행 수법과 범인을 잡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람들을 완벽하게 속이는 연기력이 발휘한다고 전제하는 순간부터 작가는 신처럼 천하무적이다. 공정한 게임이 아니라 일방적 속임수다.

푸아로가 살인범을 지목하지만 블랜드 경위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사실들이라고 푸아로가 나열하는 것들이 무슨 소용인가. '연기의 신'이라는데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는가. 치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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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기억한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황금가지 펴냄
해문출판사 펴냄
Elephants Can Remember (1972)

옛날 부모님 때 일을 조사해 달라는 요청이다. 이전 발표작 '다섯 마리 아기 돼지'처럼 딸이 자기 부모님이 동반 자살을 했다는 것에 의심을 품고 진실을 알려 달라는 것이다. 과거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다. 그렇다면 그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해야 한다. 코끼리처럼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한테서 과거를 들어야 한다.

별개라고 여겼던 두 사건이 연결되는 이야기다. 추리는 그다지 어렵지 않고 힌트는 솔직하고 뻔히 보이게 배열되어 있으며 맥거핀은 없으니 쓸데없이 헤매지 않는다. 트릭이 워낙 고전적이라서 예스럽다. 가발에, 개에, 쌍둥이다.

소심하고 낯가림이 심했던 애거서 크리스티의 모습이 올리버 부인을 통해 볼 수 있다. "남들 앞에서 나가면 잔뜩 걱정이 되고 신경이 곤두서서 말을 더듬거나 했던 얘길 또 하게 돼."

이 소설은 반드시 '다섯 마리 아기 돼지'와 '핼러윈 파티'를 읽은 후에 읽어야 한다. 스포일러가 소설 본문에서 작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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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애거서 크리스티
해문

The Adventure of the Christmas Pudding

중단편집이다. 
원서에는 에르퀼 푸아로 5편과 미스 마플 1편이 있으나 
해문 번역판에는 푸아로 3편과 미스 마플 1편을 실었다.

해문판으로 읽었다.

푸아로 출연작 3편

중편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The Adventure of the Christmas Pudding, or The Theft of the Royal Ruby) : 원서 제목에서 볼 수 있듯, 크리스마스 푸딩에서 도난당한 보석 루비가 발견되는 사건이다. 경쾌한 마무리가 재미있다.

중편 스페인 궤짝의 비밀 (The Mystery of the Spanish Chest) : 기계적 트릭은 대할 때마다 당혹스럽다. 대개 워낙 단순해서 알고나면 허탈하다. 알기 전까지는 참 궁금한데 말이다.

단편 꿈 (The Dream) : 자신이 권총으로 자살한다는 꿈을 꾼다며 푸아로를 불러다가 사건을 의뢰하고서 실제로 꿈대로 자살하는, 희안한 사건이 일어난다. 초반에 힌트는 주는데, 범인을 짐작할 순 없다. '연기의 신' 트릭이다.


마플 출연작 1편

단편 그린쇼의 아방궁 (Greenshaw's Folly) : 크리스티 여사의 전형적 미스터리다. 가족 유사성에 유서에 대저택에 목격자를 끌어들이는 수법에 알리바이 조작까지. 복잡한 트릭이다. '일인이역'에 '연기의 신'에 별별 쇼를 다해서 좀처럼 범인을 알 수 없는, 황당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미스 마플은 단지 들은 이야기만으로 살인범과 살인 방법을 밝혀내는 솜씨는 귀신 같다.

추리소설은 수수께끼 오락이다. 마술사는 트릭을 공개하지 않지만 추리소설가는 공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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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덫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황금가지 펴냄
Three Blind Mice and Other Stories (1950)

황금가지 번역본은 '쥐덫'을 포함해서 9편을 수록한 단편집이다.
미스 마플 출연작 4편, 푸아로 3편, 할리 퀸 1편이다.

쥐덫 Three Blind Mice

중편소설 '쥐덫'은 장편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만큼이나 유명하다. 두 소설이 닮았다. 사람들이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고 동요를 부르면서 한 사람씩 살해당한다. 도대체 범인이 누군이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반전으로 끝난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축소판이다. 동요에서 살인된다고 예고하는 사람 수가 10명이 아니라 3명이고, 섬이 아니라 폭설로 고립된 하숙집이다. 서로를 살인범으로 의심하며 궁지에 몰린다.

반전은 추리소설의 규칙을 위반해서 만들었다. 규칙을 위반하는 게 규칙이 되어 버리는 이상한, 미스터리 소설의 세계다. 아주 흔한 반칙이다. 내가 그 반칙을 얘기하면 추리소설 서평의 반칙이겠지.

'Three Blind Mice'는 라디오 드라마 극본을 소설로 바꾼 것이다. 왕비 생일 축하용 드라마 제작을 의뢰받고서 1주일만에 써냈다고.

이 소설은 장기 공연으로 유명한 연극 'The Mousetrap'의 희곡으로 제목을 바꿔 개작된다. 이 이야기는 연극으로 안성맞춤이다. 장소와 인물이 극단적으로 제한된 상황이다. 작은 하숙집 안에서만 사건이 벌어지고 등장인물은 여덟 명이다. 그 작은 공간 속에서 인물들끼리 서로를 살인범으로 의심하며 죽음의 공포에 떤다.

괴상한 장난 Strange Jest - 미스 마플 출연작

보물 찾기 이야기다. 장난꾸러기 할아버지는 집 안 어딘가에 유산을 남긴 것이 분명한데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어, 곧 결혼할 커플이 유명한 탐정인 미스 마플에게 의뢰한다. 숨겨진 보물은 보이지 않는 잉크로 쓴 유서이거나 상자 속 보석 따위는 아니었다. 너무 눈에 빤히 보여서 보이지 않는 보물이었다.

미스 마플은 작은 마을에서 오래 산 경험을 통해 인간 본성과 범죄 사건을 많이 알고 있다. 푸아로처럼 대단한 추리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비슷한 옛 일이나 옛 사람을 기억의 샘에서 퍼올려 사건을 해결한다.


줄자 살인 사건 The Tape-Measure Murder - 미스 마플 출연작  

제목에 범인과 범행 수법이 보이는 이야기다. 이제 남은 수수께끼는 범행 동기와 범행 입증이다.

돈 많은 아내가 목이 줄려 죽었는데 슬퍼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남편. 입소문이 빛보다 빠른 속도로 퍼지는 작은 시골 마을 세인트 메리 미드 마을 사람들은 남편이 죽였을 거라고 수근거린다. 심지어 수사하는 경찰마저 그렇게 확신한다. 죽은 부인은 최근 마을에 들어온 잘생긴 청년과 만났다는 소문이 돈다.

미스 마플은 사소한 단서를 모아 사건을 간파한다. 줄자, 핀, 실내복, 도난 사건 등이 맞물려 진상이 보여지는, 추리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완벽한 하녀 사건 The Case of the Perfect Maid - 미스 마플 출연작  

브로치를 훔쳤다는 누명과 접시 하나를 깼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한 하녀 글래디스. 그녀를 해고한 스키너 자매의 집에는 완벽한 하녀가 들어온다. 메리 미드 마을 사람들은 그런 하녀를 구한 자매를 질투한다. 그러던 어느날 하녀는 사라지고 동네 집집마다 물건을 도둑맞는다.

미스 마플은 현명한 의심을 한다. 완벽한 하녀는 있을 수 없다. "완벽한 전범이란 걸 믿지 않아요. 우리들 중 대부분은 나름대로의 결점을 갖고 있지요. 그리고 집안일은 그 결점들을 이내 드러나게 하는 법이고요!"(180쪽) 마플 할머니는 일부러 가방을 떨어뜨려 하녀의 지문을 채취해 두는 '기발한 함정'을 마련한다.

반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주 쓰는 트릭인 '1인 2역 연기의 신'이 나와서 실망이었으나, 요즘 들어서는 추리소설에서는 당연히 반복되는 장르 규칙처럼 느껴진다, 미스 마플의 솔로몬 같은 지혜로운 추리력은 대만족이었다. 푸아로보다 미스 마플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를 이 단편소설에서 확실히 알았다. 크리스티 여사가 푸아로는 죽이지만 마플은 살려둔 이유도 알겠더라.


관리인 사건 The Case of the Caretaker - 미스 마플 출연작  

이 단편은 장편 '끝없는 밤 Endless Night'으로 개작되었다. 캐릭터 이름만 바뀌고 이야기 틀거리는 거의 그대로다.

오래된 건물을 부시고 새로 지은 집에 살기 시작한 신혼 부부. 그 오래된 집에 살았던 관리인 노파는 그들에게 불행이 닥칠 거라며 저주를 퍼붓는다. 아내는 자꾸만 걱정이 되고 남편은 그 노파를 다른 곳으로 보내려고 한다. 그러던 중 아내는 승마 중 낙마로 죽는다. 사람들이 별 근거도 없이 무턱대고 믿는 저주를 이용한 범죄다. 

나이 들어서 우울증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당신에게 필요한 건 스스로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그 무엇이요."(183쪽) 안 그러면 "나를 원하거나 내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183쪽)라고 말하는 마플 할머니처럼 된다.

꾸며낸 이야기, 그것도 살인을 주로 다루는 추리소설에 빠지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다. 수많은 범죄 살인 이야기를 써낸 크리스티 본인은 정작 따분한 삶을 살았다. 주변에 살인은커녕 범죄 비슷한 일도 없었다고. 게다가 소설 쓰는 일을 취미로 여겨서 직업에는 '전업 주부'라고 썼다.


공동주택 4층 The Third Floor Flat - 에르퀼 푸아로 출연작  

아파트 열쇠가 없어서 화물용 승강기를 이용해서 문을 열려다가 엉뚱한 층에 들렸는데, 나중에 보니 거기 살던 부인이 살해당했다. 마침 이 건물 5층에 살던 푸아로가 수사에 나선다. 살인범을 잡는 단서는 테이블, 우편물, 전등 스위치 등 사소한 것이다.

푸아로는 자신의 추리를 확신할 수 있는 증거를 얻기 위해서 용의자 한 명을 잠깐 기절시킨다.

사랑의 수호자답게 푸아로는 상처 받을 아가씨를 위로해 주라고 청년한테 말한다.



조니 웨이버리 사건 The Adventure of Johnny Waverly - 에르퀼 푸아로 출연작  

푸아로와 헤이스팅스가 함께 나오는 경우, 대체로 황당한 일이 일어난다. 조니 웨이버리라는 소년의 유괴 사건인데 일어나는 일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하지만 차근차근 자연스럽지 못하고 이상한 부분을 짚어나가자 당혹스러운 진실이 밝혀진다.

조니를 유괴하겠다며 돈을 내 놓으라는 협박편지가 사건 발생 열흘 전부터 배달된다. 두 번째 편지에 날짜가, 세 번째 편지에는 시각까지 정해서 알린다. 사건 발생 당일에는 조니의 엄마가 독극물에 중독되고 조니의 아버지의 베개에는 '오늘 낮 정각'라고 쓴 메모지가 핀에 꽂혀 있었다.

드디어 괘종시계가 12시를 알린다. 마지막 종소리가 울리는 순간, 밖에서 흉포한 인상의 사내를 체포한다. 하지만 그에게서 발견한 것은 아이가 아니라 지난 번에 수차례 받았던 편지와 같은 내용을 담은 메모였다. 조니의 아빠가 안도의 웃음을 지을 때 자동차 한 대가 조니를 태우고 남쪽 수위실로 도망쳤다. 이윽고 들리는 교회 종소리! 누군가 고의로 집 안 괘종시계를 10분 빠르게 해 놓았던 것이다.

사건 자체만 보면 황당하지만 질서와 방법으로 하나씩 논리적으로 맞춰 나아가보면 범인과 범행이 드러난다.


검은 딸기로 만든 '스물네 마리 검은 새' Four-and-Twenty Blackbirds - 에르퀼 푸아로 출연작  

푸아로는 자주 가는 식당에서 항상 주문을 받는 종업원한테서 다소 이상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 식당의 10년 단골 신사가 갑자기 식습관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시계 영감으로 불리며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항상 똑같은 것을 먹기 때문에 안녕이라는 인사말 외에는 아무말도 안 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월요일에 나타나 주문을 했다. 더구나 평소 가장 싫어했던 음식을 먹었단다. 검은 딸기 파이, 진한 토마토 주스, 콩팥 푸딩.

푸아로는 살인을 예감한다. 조사를 해 보니, 죽은 자는 평소 치아 관리를 잘하고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치아가 하얗고 건강했다고 한다. 이에 결정적 단서를 얻어 유산 관계를 알아 보니, 그의 조카가 의심스럽다. 

알리바이 조작을 위한 1인2역 연기의 신 트릭은 반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 듯하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이 작위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반전의 힘이 큰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요즘 추리소설가들조차 이 낡은 수법을 여전히 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의 특징은 결정적 단서가 흔하고 단순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 소설 등장인물 이름 보닝턴이 맨 끝 277쪽에서 버닝턴으로 나온다. 오타겠지.


사랑의 탐정 The Love Detectives - 할리 퀸 출연작  

할리 퀸은 크리스티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만날 때마다 반가운 캐릭터다. 정체를 알 수 없고 갑자기 나타나 사건을 해결하고 조용히 사라지는 신비스러운 존재다.

퀸과 짝을 이루는 새터스웨이트는 그에 대한 칭찬을 수없이 한다. 푸아로나 홈즈처럼 저 잘난 맛에 사는 탐정이 아니다. 퀸은 보조 탐정(새터스웨이트)에 대한 칭찬을 아까지 않으며 겸손한 사람이다.

새터스웨이트 : "내가 기억하는 한, 그런 사건들은 모두 당신이 해결한 것 같은데요. 내가 아니라 말이에요."

할리 퀸 : "당신이 거기 있었기 때문에 해결된 거랍니다." (285~6쪽)

할리 퀸은 새터스웨이트가 사건 개요를 얘기해 주면 "당신은 예술가입니다."라는 칭찬을 해 준다.

퀸은 애증의 관계를 정확히 알아내서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이다. 제목처럼 사랑의 탐정이다. "퀸 씨의 관심 분야는 연인들인 것 같네."(286쪽)

이 단편소설은 장편소설 '4개의 시계(해문)/ 시계들(황금가지)'과 닮은 사건이다. 소설의 내용을 빌려다 범행에 악용한다. 사건 현장과 목격자 진술이 지나치게 소설 같았기에 의심을 산다. 청동조각상에 머리가 깨져 살해된 남편. 6시 30분에 멈춘 시계. 죽은 남자의 아내는 자기가 총으로 쏴서 죽였다고 자백하고, 이 여자를 사랑했던 폴 데랑가는 여자의 남편을 칼로 찔러 죽였다고 말한다. "그들은 소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 겁니다." "책에서 읽은 건 정말이지 기묘한 방식으로 떠오르는 법이니까요."(307쪽)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에는 영국인이 아닌 외국인에 대해서 무조건 나쁘게 말하고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는 작가 본인의 생각이라기보다는 당시 시대 사람들의 대다수 생각이다. "범세계적인 시각의 소유자라고 자부하는 새터스웨이트는 삶에 대한 섬나라(영국, 그 잘난 대영제국) 사람의 태도를 한탄할 자격이 있었다."(282쪽)라고 쓰는 걸 보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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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의 카드
애거서 크리스티
황금가지
해문출판사
Card on the Table (1936)

가장 범인이 아닐 것 같은 사람을 트릭과 교란으로 숨겨서 반전을 만드는 일에 지쳤는지, 애 여사는 '테이블 위의 카드'에서 추리소설 독자를 위해 이와는 정반대로 승부수를 던졌다. 전작에서 보여준 '연기의 신' 같은 속임수는 없다. 세월이 지나서 사람들이 못 알아본다는 억지도 없다. 말하는 사람이 범인도 아니다. 공범자가 없음도 명백하다. 눈앞에 보이는 네 명 중에 한 명이며 범인이다. 모두 살인의 전과가 있다. 그 네 명을 조사하는 탐정들도 마련해 준다. 사립탐정 푸아로, 런던 경시청 배틀 총경, 추리소설가 올리버 부인(아리아드네 올리버), 비밀요원 레이스 대령. 4대 4의 대결! 올스타 청백전?

심리 추리의 예술을 보여준다. 전작 '메소포타미아의 살인'에서 그 사람이 읽는 책에서 그 사람의 성격과 성향과 기질을 추리해냈는데, 이번 '테이블 위의 카드'에서는 카드놀이를 하는 방식과 관찰 방식에서 그 사람의 행동 방식을 알아낸다.

네 사람이 브리지 카드 게임을 하던 중에 살인이 일어난다. 그랜드 슬램, 비딩, 러버? 해당 카드 게임의 규칙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이지 알 수가 없었으나 추리에는 별 무리가 없다.

푸아로가 이번에도 엉뚱해 보이는 데 수사의 초점을 맞춘다. 브리지 점수표에 무한 관심을 둔다. 용의자들한테 사건 당시 방 안에 있던 것들을 기억나는 대로 말해 보라고 묻는다. 용의자들의 심리를 이해한 후 범행에 맞는지 여부를 따져서 범인을 잡아낸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본인의 모습을 투영하면서 우스꽝스럽게 만든 캐릭터 '올리버 부인'을 통해 추리소설 쓰기의 어려움을 말하는 장면이 재미있었다. 

"이야기를 쓰려면 머리를 굴려야 하거든. 그리고 머리 굴리는 건 항상 골치 아픈 일이지. 그리고 구성도 짜야 한다고. 그러다가 종종 막히게 마련이고, 막히면 거기서 영영 못 빠져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지. 그러다 결국엔 빠져나오지만. 글 쓰는 건 그렇게 즐겁고 신나는 일이 아니에요. 다른 것들처럼 힘든 일이지."(188쪽).

"이야기야 얼마든지 생각해 낼 수 있어요. 그걸 종이에 옮기는 게 힘들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6천 자가 아니라 3천 자밖에 못 써서, 살인 사건을 또 하나 집어넣고 여주인공을 또 한 번 납치해야 한다니까. 아주 골치 아파요."(189쪽)

미스 마플이 나오는 소설을 올리버 여사가 쓴 것으로 나온다. "'서재의 시체'를 쓰신 그분이요?"(25쪽) '테이블 위의 카드'를 발표한 1936년 당시에 크리스티는 '서재의 시체'를 쓰지 않았다. '서재의 시체'는 1942년에 출판했다.

N메틸 사이클로 헥세닐 메틸 말로닐 요소를 정맥에 다량 투여하면 즉시 의식을 잃게 된단다. 수면제 복용 후 투여하면 치명적이고. 소설에서 그렇게 말하는데, 실제로 그런지 확인은 못했다. 무슨 의약품 이름이 이렇게 길고 복잡한지.

주의사항. 이 책은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읽은 후에 읽어라. 작가가 대놓고 스포일러를 써 놓았다! 전작의 살인범과 살해 방법을 푸아로의 입을 통해 말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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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 목격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황금가지
임경자 옮김/해문출판사

Dumb Witness 영국판 (1937)
Poirot Loses a Client 미국판 (1937)

이 소설은 제목이 논란이다. 대개들 ‘벙어리 목격자’니까 말 그대로 ‘말을 못하는 사람이 범행을 목격한 사건’이려니 짐작한다. 막상 책을 펴서 읽기 시작하면 그런 사람은 없고 “다른 어떤 개와도 바꿀 수 없는 나의 피터에게”라는 헌사와 함께 ‘밥’이라는 이름의 영리한 테리어가 등장한다. 개가 독자한테 말을 한다. 정확히는 헤이스팅스의 상상 1인칭 서술이다.

제목을 그냥 ‘개’라고 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표현한 것 같은데 불평하는 독자가 왜 그리 많은지. 제목 짓기가 소설 쓰는 것보다 어렵다는 얘기가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미국판 제목이 좋다. '푸아로, 고객을 잃다'

아룬델 양은 늙어서 죽은 것이고 그 이전에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것은 사고라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푸아로는 살인이라며 살인범 추적을 시작한다.

모처럼 푸아로와 헤이스팅스가 콤비로 등장한다. 홈즈와 왓슨처럼 푸아로와 헤이스팅스는 같이 나와야 독자가 대하기 편하다. 한 사람이 빠지면 불편하다. 잘난 척하는 ‘인간’을 감싸줄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이 소설은 그나마 크리스티의 장편소설 중에서는 트릭이 적은 편이다. 후반부에 가서야 트릭이 두 개 나온다. 비교적 간단한 편이다. 소설 대부분은 용의자들의 심리적 성향을 파악하는 데 집중한다. 결과인 살인 사건과 원인인 살인범의 성향(지적 수준, 성격, 범행을 통해 얻는 이익 등)을 대조해 본다.

전형적인 크리스티 추리소설이다. 돈 많은 노인. 유서. 돈에 쪼들린 사람들. 애증의 거미줄. 어김없이 “다 모여. 내가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지.”식의 ‘푸아로 피날레’가 마지막을 장식하며 끝난다.

유산을 둘러싼 친인척의 갈등은 실제가 소설이나 드라마보다 더 비열하고 더 더럽고 더 쌍스럽다. 죽은 자에 대한 슬픔 따위는 없다. 먼저 차지하는 자가 임자다. 전쟁 전리품 챙기는 것과 똑같다. 벙어리 목격자 ‘밥’은 푸아로가 차지해서 헤이스팅스에게 전달한다. 푸아로 성격에 개를 키울 순 없지.

※ ‘벙어리 목격자’는 반드시 ‘구름 속의 죽음’,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 ‘푸른 열차의 죽음’ 등을 읽은 후에 읽을 것! 이 책에서 푸아로가 지난 사건의 범인 이름을 말한다. 살인보다 무서운 스포일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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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스가의 살인
Murder in the Mews and Other Stories (193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왕수민 옮김/황금가지

죽은 자의 거울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광용 옮김/해문출판사

중편 3편과 단편 1편을 모은 중단편 소설집이다.

@ 중편 뮤스가의 살인(Murder in the Mews)

11월 5일 가이 포크스 데이(Guy Fawkes Day)의 불꽃놀이 소란 속에 재프 경감과 푸아로는 이런 날에는 총소리가 나도 아무도 못 들으니 이를 이용해서 살인하면 딱이지 않겠느냐고 서로 농담을 하던 중 바슬리 가든스 뮤스가 14번지에서 젊은 여자가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담당 검시관은 권총 자살로 보이나 뭔가 석연치 않다고 한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창문은 닫힌 채 빗장이 걸려 있고 문도 잠겨 있었다. 시체는 오른손에 총을 쥔 채 쓰러져 있다. 그런데 총상은 왼쪽 귀에 있다? 유서는 없다! 살인 맞구먼. 밀실 살인이다. 오예! 열광하라.

푸아로는 엉뚱하게도 쓰레기통을 뒤지기 바쁘다. 책상 위 깃펜에 왜 그리 관심을 많은지. 피해자랑 같이 사는 제인 플렌더리스한테 석탄 난로냐 가스 난로냐 이런 걸 묻는다.

플렌더리스 양은 자기 친구가 절대 자살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현장에 떨어진 정체불명의 조각을 보여주니까, 대뜸 바로 "그런 건 딱 보면 알 수 있어요. 남자들이 쓰는 커프스 단추 한쪽이니까요."라고 말한다. 이 여자, 수상하다.

밝혀진 진상은 살인 아닌 살인이었다. 너무 착해서 스스로를 망친 여인이라니.


@ 중편 미궁에 빠진 절도(The Incredible Theft)

폭탄 실측 설계도가 사라졌다. 메이필드 경의 비서 칼라일은 그 서류를 책상 위에 갖다 놓은 지 3분도 안 되었으며 이 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으며 본인은 이 방을 나간 적이 없다고 진술한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다만, 여자 비명 소리가 나서 자신도 모르게 홀로 뛰어나갔단다. 비명을 지른 이는 밴덜린 부인의 하녀. 하녀에게 물어 보니, 유령을 봤단다. 온통 흰 옷을 입은 키 큰 여자가 아무 소리 없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메이필드 경의 친구 조지 경은 벨기에 사립탐정 에르퀼 푸아로를 적극 추천하며 사건을 의뢰한다.

조지 경은 원시고 메이필드 경은 근시다. 이런 게 힌트였다. 반전을 크게 하려면 어쩔 수 없는 트릭이었다. 허무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런 게 추리소설이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이 소설에서 보수적이지만 현명한 영국인의 모범을 한껏 드날리며 보여준다.



@ 중편 죽은 자의 거울(Dead Man's Mirror)

자의식이 넘치는 저베이스 체비닉스고어라는 사람한테서 편지 한 통이 자부심 강한 탐정에게 도착한다. 일방적으로 사건을 의뢰하고는 자기 저택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유명인사를 잘 아는 새터스웨이트(전작 '3막의 비극'에 나왔던 사람이다.)한테 물어보니 아주 오랜 가문 사람이란다. 작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다고 한다. 푸아로는 왜 자기를 부르는지 궁금해서 가기로 한다.

푸아로를 저녁 식사 시간에 맞게 저택에 도착하게 하고는 정작 본인 저베이스는 서재에서 죽고만다. 오라고 불러놓고 죽어 버리다니. 현장을 보니 자살을 위장한 살인이다. 문은 닫혀 있고 열쇠는 주머니에 있고 창문은 빗장이 채워진 채 모두 닫혔다. 밀실 살인이다!

단서들. 저베이스 경의 심경 변화, 연필, 저베이스 경의 의자 위치, 오렌지가 들어 있던 종이봉투, 깨진 거울. 

'세월이 많이 지나서 사람들이 못 알아본다'가 또 등장한다. 이 클리세는 반전을 노리는 추리소설에서는 어쩔 수 없이 쓸 수밖에 없나 보다. 복수 살인을 하려면 필수다. 요즘 작품에도 종종 본다. 가문 어쩌고 이야기가 시작되면 이 트릭을 안 쓸 수가 없다. 


@ 단편 로도스 섬의 삼각형 (Triangle at Rhodes)

예쁜 여자 하나를 두고 두 남자가 으르렁거리는 삼각관계인 줄 알았더니, 후반부 반전에 놀랐다. 우리의 선입견을 이용하는 범죄였다.

푸아로는 범행이 실행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고작 떠나라고 경고하는 것이 전부였다. 사람 욕망이라는 게 말로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단편은 장편 '백주의 악마'로 다시 쓴다.

※ 참고 : 황금가지 번역본은 4편 모두 실었고 해문출판사 판은 '미궁에 빠진 절도(The Incredible Theft)'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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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의 약속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정연희 옮김/황금가지
유명우 옮김/해문출판사
Appointment with Death (1938)

총 2부다. 1부는 살인이 일어나기 직전까지고 2부는 푸아로의 수사다. 

1부만 보면 심리소설로 읽힌다. 자식들을 완전히 휘어잡은 폭군 노부인. 폭군 어머니 밑에서 괴로워하는 자식들과 갈등하는 며느리의 모습과 행동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크리스티 여사는 진지한 문학 소설로 승부했어도 승산은 있었을 법한데, 철학적이거나 심리학적으로 깊게 주제를 파고들어갈 마음은 없었던 듯하다. 특히 로맨스를 워낙 중시하고 반전과 트릭에 천재적 재능을 타고나서 추리소설의 틀 안에서 단순한 문장으로 글을 썼다. 추리소설은 오락이다. 아무리 진지해 봐야 게임이다.

첫 문장부터 떡밥이다. “너도 알잖아? 그 여자는 죽어야 해.” 여러 번 반복해서 중요하다고 각인시킨다. 안 낚이면 그게 더 이상하다. 이전 발표작을 읽은 독자한테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언급해서 또 한 번 낚는다.

반전을 위해서는 명백한 것으로 유혹한 후에 무심코 흘리는 것에 비수를 숨겨야 한다. 범인은 당신이 짐작도 못했던 사람으로 밝혀진다. 반전의 여왕답다.

‘죽음과의 약속’이라는 거창한 이름과 달리, 반전이 다른 작품에 비해 떨어진다. 살인도 고작 한 번 일어난다. BBC 드라마는 이 원작 소설을 비틀었다. 이 썰렁한 반전 대신에 감정을 더 고조시킬 수 있는 사연을 넣었고 연쇄 살인으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추리소설에는 연애 금지라고 애 여사한테 해 봐야 소용없다. 폭군에서 해방된 자식들의 결혼과 행복한 후일담을 애써 굳이 덧붙여 들려준다.

1회독 완료.

페북 이벤트 당첨으로 새 표지 새 책 '애거서 크리스티 푸아로 셀렉션'을 받은 김에, 다시 한 번 읽었다.

이 소설의 초반 분위기가 어둡고 답답하다. 처음 읽었을 때는 읽기 힘들었으나 두 번째 읽을 때는 아주 간단히 쉽게 읽었다.

추리소설을 다시 읽으면 범인과 그 수법이 기억날 때가 있다. 이 소설은 범인이 누군지는 기억나는데 수법은 생각이 안 났다. 범인이 잘 생각나는 건 너무나 엉뚱해서 그럴 것이다.

처음 읽는 사람은 절대 범인을 맞출 수 없게 썼다. 힌트를 두세 가지 주는데 그것만으로 범인을 잡아내기는 만만치 않다. 워낙 많은 떡밥을 뿌려 놓아서 그거 먹느라 진범에 대한 힌트는 그냥 넘어가거나 주의깊게 보더라도 알아차리기는 대단히 어렵다.

2회독 2015.7.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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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내 구두에 버클을 달아라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혜경 옮김/황금가지

애국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가형 옮김/해문출판사

One, Two, Buckle My Shoe (1940) 영국판
The Patriotic Murders (1941) 미국판
An Overdose of Death (1953) 미국판

동요를 사건의 힌트와 이야기의 구성에 이용했다. 제목 ‘하나, 둘, 내 구두에 버클을 달아라’는 결정적 힌트다. 공정한 게임이 아니다. 범인잡기 힘들다. ‘연기의 신’ 트릭으로 독자가 추리를 못하게 막아 놓았다. 그리고서 준다는 힌트가 구두에 달린 버클과 스타킹 따위니.

반전을 만드는 방법은 독자의 상식을 이용하는 것이다. 추리소설가는 문제 출제자와 동일한 입장이다. 문제 풀려는 자가 정답을 못 보고 오답에 빠지게 한다. 치과 의사가 의료 과실 때문에 자살했고, 정치적 중요 인물이 암살 음모에 처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한다.

살인 사건 초반부는 흥미롭다. 치과 의사가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자살할 이유가 거의 없다. 게다가 그를 살해할 사람도 거의 없다. 도대체 그는 왜 스스로 자살했거나 혹은 살해당한 것일까.

가장 유력한 용의자들은 그날 치과 치료를 받으러 온 환자들이다. 환자 명단에는 푸아로도 있다. 그들 중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자는 평소 단골 환자가 아니었던 자다. 그를 조사하려고 갔으나 그는 죽었다! 검시관의 보고에 따르면, 치과용 국부 마취제 과다 복용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누가 범인인가?

환자들 중 여자 한 명은 실종된다. 여자는 시체로 발견된다. 시체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망가져 있었다. 여자의 집에서 치과의사가 죽었던 날 푸아로가 보았던 ‘버클이 달린 가죽 구두 한 짝’이 발견하나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이야기 거의 끝까지 독자를 엉뚱한 데로 주목하게 하다가 마지막에야 결정적 증거를 밝히며 사건을 종결한다.

푸아로는 치과를 싫어하고 나는 추리소설에 배우가 나오면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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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 저택의 비극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황금가지
김교향 옮김/해문출판사

The Hollow (1946)

그토록 복잡하고 기묘하고 놀라운 트릭을 선보였던 애거서 크리스티가 이번 소설에서는 의외로 평범하고 산만하고 흐지부지한 모습을 보여줬다. 특이한 캐릭터를 보여줬다는 점에서는 흥미롭게 읽긴 했다.

한 남자가 죽고 용의자는 세 여자다. 부인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다. 살인 현장에서 총을 쥐고 있었으니까. 바보 아니야? 스스로 나 범인이라고 밝히는 꼴이다. 그런데 옆에 있는 여자가 그걸 빼앗아 물속에 버린다. 게다가 총 맞아 죽어가는 남자가 그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 ‘헨리에타!’ 범인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현장에는 없었으나 전날 다툰 옛 애인이 있다.

헨리에타. 오, 이런 여자가 정말 있을까. 머리 좋고 연애 잘하고 동정심도 있다. 푸아로를 이기려고 했던 것은 무모했지만. 정신없이 수다스러운 4차원 아줌마 레이디 앵커텔은 또 어떤가. 후반부에 결정적 힌트를 알아챈다.

권총 트릭인데, 누가 범인이더라도 관심이 없었다. 이토록 범인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았던 추리소설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동정이 가는 인물이 없어서 그런 듯하다. 당당하게 바람을 피우는 남녀들이라니. 그걸 방관하는 여자는 또 뭔가.

사랑의 화살표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세 명의 여자(배우, 조각가, 주부)가 잘난 남자를 거의 숭배하듯 사랑한다. 딱히 잘난 건 없는 남자 에드워드는 어려서부터 헨리에타를 사랑한다. 아무리 결혼하자 사랑한다고 헨리에타한테 말해도 소용없다. 여자의 대답은 언제나 노다. 미지는 그런 에드워드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에드워드는 마지못해 미지한테 청혼하고 그마저 거부당하자 가스 틀어 놓고 자살을 시도한다. "헨리에타는 날 원하지 않았어. 아무도 날 원하지 않았지." 아이고, 이 양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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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의 모험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황금가지
황해선 옮김/해문출판사
The Labours of Hercules (1947)


이 책은 에르퀼 푸아로의 열두 사건 해결을 모은 단편집이다. 구성상 헤라클레스의 모험 신화를 차용했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끌어다 쓰진 않았다. 각 모험의 소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신화와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헤라클레스의 신화를 구체적으로 알고자 책을 따로 살 필요는 없다. 이 책 머리말에 친절하게 요약 정리해 놓은 게 있으니까. 게다가 그 글조차 안 읽고 곧장 각 단편으로 뛰어들어도 괜찮다. 이야기 중에 다시 그 신화에 대해 짧게 언급하니까.

첫째 모험, 네메아의 사자는 사자가 나오지 않는다. 사자처럼 짖어대는 개 발바리 실종 사건이다. 둘째 모험도 그렇다. 히드라가 나오지 않는다. 히드라처럼 계속 두 배 세 배로 늘어만 가는 소문을 다룬다. 셋째 모험은 사슴처럼 예쁜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이처럼 신화의 소재를 비유로 쓴다.

열두 단편을 모은 형식이다. 머리말과 마지막 편의 종결을 통해 통일감을 부여했다.

두 가지만 덧붙인다.

크리스티 여사는 인생의 슬프고 어두운 면을 콕콕 지른다. 애정과 돈의 교차로에 방황하는 여자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듯하다. 이 책의 첫째 모험에서 포와로가 보이는 연민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동정으로 보인다.

다섯째 모험을 보면, 영국적 정서와 가치를 작가가 얼마나 중시하는지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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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을 타고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왕수민 옮김/황금가지

파도를 타고
이광용 옮김/해문출판사

There is a Tide (1948) 미국판
Taken at the Flood (1948) 영국판

제목을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 제3장 브루투스의 대사에서 따왔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십니다.” 소설 후반부쯤에는 나오는 문장인데 푸하하 웃음이 터졌다. 소설이니까 가능한 설정이다. 그래야 이야기가 진행되니까. 현실은 허구보다 운명적이지 못하고 로맨틱하지 못하며 논리적이지도 않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남편이 되돌아온다는 이야기를 가져다가 미스터리로 다시 썼다. 전쟁 당시에 이런 얘기는 흔했다. 적군 공습으로 대저택 하나가 파괴된다. 저택 안에 있던 사람들이 죽었다. 다만, 희한하게도 고든의 젊은 아내와 처남만 살아남았다. 어마어마한 유산이 미망인에게 돌아간다. 그러던 중 죽었다고 알려진, 여자의 첫째 남편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나타난다.

롤리와 린 커플은 내가 봐서는 다소 억지로 맺게 한다. 해피엔딩을 꼭 만들어내고야 만다. 내가 린의 입장이라면 롤리 같은 남자랑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후반부 반전은 초반부에 힌트가 있었다. 그러게 그렇게 운이 좋을 리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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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블랙 커피
원작 희곡을 소설로 다시 쓴 찰스 오스본

1928년 발표작 '블루 트레인의 수수께끼'와 1932년 발표작 '엔드하우스의 비극' 사이에 애 여사님은 푸아로가 등장하는 희곡 '블랙 커피(Black Coffee)'을 써서 1929년 말쯤 완성했다. 해당 극은 1930년 초연되었다. 이 희곡이 1931년 영화로 제작되었다. 더욱 놀랍게도, 아직도 이 희곡이 연극으로 공연되고 있다.

이 희곡을 찰스 오스본이 크리스티 재단의 동의를 얻어 소설로 다시 써서 1998년 출간했다. 국내에는 희곡으로도 소설로도 번역이 안 되었다. 국내 번역된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아무리 뒤져 봐야 이 작품은 찾을 수 없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소설만 쓴 게 아니라 각종 대본 작업을 했다. 연극은 물론이고 라디오 텔레비전용 드라마를 위한 글을 쓰셨다. 그러지 않아도 애 여사님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때때로 연극처럼 보인다. 무대 위 인형처럼 움직이는 인물들, 제한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죽음과 불확실성 때문에 공포에 떠는 상황, 살인범은 밝혀지지 않은 채 자꾸만 사람들이 죽어간다.

소설이 연극적이다. 묘사와 서사의 비중이 적고 대화와 상황 전개가 대부분이다. 가장 전형적인 예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쥐덫'이다. 특히 '쥐덫'은 본래 라디오 드라마 극본이었고 이를 소설로 바꾸고 또 다시 연극 대본으로 각색해서 큰 성공을 거둔다. 들리는 소문에는 아직도 이 연극은 영국에서 멈추지 않고 있단다. 2012년에 2만5천 번째 공연을 넘어 버렸다.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좋지 못하다. 하지만 애거스 크리스티를 처음 대하는 독자나 기존 소설의 플롯보다 단순한 것을 선호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평가와 좋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애 여사의 작품 중에는 반전과 트릭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어 탐정의 설명을 다 듣고도 이해가 안 될 때도 종종 있으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장소는 런던에서 멀리 떨어진 집이다. 고립되고 외딴 곳에서 살인이 발생되고 용의자는 한정되어 있다. 혼자 틀어박혀서 과학에만 열중하는 물리학자. 그의 주변 인물들은 불만으로 가득하다. 과학자는 살해되고 원자 폭탄 공식은 사라진다. 범인은 누구인가?

상세하게 얘기하자면, 이 과학자는 자기 주변 인물들 중에 한 명이 자신의 소중한 공식을 훔쳤다고 여기고 이들을 가둔 후에 탐정 푸아로를 오게 해서 범인을 잡도록 하려 한다. 과학자가 살짝 미친 사람이다. "여기는 쥐덫이야.(This place is a rat-trap.)" "쥐잡이가 도착할 거야.(the rat-catcher will arrive.)" 그 직전에 커피잔이 오가고, 그 전에 독약이 오간다.

방 안에 갇힌 사람들. 니들 중에 한 놈이 도둑이라고 말하는 과학자. 불을 끌 테니까 그 사이에 훔쳐간 내 공식 도로 갖다 놔. 정확히 9시에 푸아로가 올 거야. 2분 전이군. 그러니 그 전에 나한테 줘. 여기 테이블 위에 올려 놔. 정확히 1분을 주겠다. 돌려주면 푸아로한테 내가 잘못 알았고 당신은 할 일이 없다고 말할게. 불이 꺼지고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다시 불이 켜지고 공식이 담겼다고 얘기한 봉투가 테이블 위에 올려 있다. 이때 활짝 문이 열리고 푸아로와 헤이스팅스 등장.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과학자는 죽었다! 봉투를 열어 보니 비었다. 누가 훔쳤고 누가 죽였나?

한 사람씩 심문하면서 새롭게 나타나는 사람들의 과거와 정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마침내 밝혀진 범인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의외의 인물이다.

소설로 읽기보다는 연극으로 보고 싶다.

그럭저럭 읽을 만했다. 나쁘지 않다. 괜찮다.

예전 발표작의 트릭이 반복되어 보여서 식상했다.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이랑 비슷하다. 커피잔이며 벽난로 위 선반이며. 더 자세히 말하면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삼간다.

애거서 크리스티 본인이 직접 쓴 소설이 아니라서 그런지 문장이 어색하게 읽혔다. 찰스 오스본이 애거서 크리스티의 목소리를 흉내내서 쓴 글이니 어쩔 수 없겠다 싶다. 그래도 이야기의 지문은 확실히 애 여사님의 것이다. 푸아로 피날레와 행복 결말. 러브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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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사냥개
애거서 크리스티
해문출판사 1989년

이 단편집은 두 가지 점에서 예외적이다.

첫째, 내용이 추리보다는 공포나 심령에 치중했다.
둘째, 영국에서만 발행했었다.

원서 수록 작품 목록
The Hound of Death and Other Stories (1933)
The Hound of Death
The Red Signal
The Fourth Man
The Gypsy
The Lamp
Wireless
The Witness for the Prosecution
The Mystery of the Blue Jar
The Strange Case of Sir Arthur Carmichael
The Call of Wings
The Last Seance
SOS

해문에서 펴낸 번역본은 원서와 다르게 작품이 실렸다. The Call of Wings와 The Last Seance은 이 책이 아니라 리가타 미스터리에 있다. 그래서 해문 번역본에는 아래와 같이 단편을 담았다.

1. 죽음의 사냥개
2. 집시
3. 등불
4. 아서 카마이클 경의 기묘한 사건
5. 목련꽃
6. 개 다음에
7. 이중 범죄
8. 말벌 둥지
9. 의상 디자이너의 인형
10. 이중 단서
11. 성역

다른 단편집에 있는 작품을 함께 실어 뒤죽박죽이다.

푸아로 출연작만 살펴본다.

이중 범죄 Double Sin : 제목대로 두 가지 범죄를 동시에 저지른 자를 잡는 이야기다. 트릭에 '연기의 신'이 섞여 있어서 범인과 수법을 미리 알긴 쉽지 않다. 푸아로가 헤이스팅스한테 힌트를 찔끔씩 주고 나중에 진실을 알려주겠다고 말하는데, 읽고 있으면 답이 궁금해서 헤이스팅스처럼 미쳐 버린다.

푸아로는 세세한 관찰력으로 이상한 점들을 발견한다. 요상하게 기른 턱수염을 한 사나이. 값비싼 미니어처를 팔러 간다고 처음 만난 두 사람(푸아로와 헤이스팅스)한테 말하는 '적갈색 머리에 젊은 여자'는 그 귀중품이 도난당했다며 그 턱수염 사나이를 의심한다. 하지만 귀중품이 담긴 케이스는 강제로 연 흔적이 없다. 분명히 열쇠를 연 것이다. 게다가 왜 힘들여 애써 케이스를 열어 훔치는가. 그냥 케이스를 통째로 훔쳐 가져 가는 게 더 편하고 더 간단한데?

단순한 두 가지를 결합해서 이상해 보이는 수수께끼를 만들었다. 관련이 없어 보이는 듯한 두 가지를 하나로 연결해서 미스터리로 만든다. 추리소설은 혼동될 수밖에 없거나 사소한 것을 교묘하게 짜맞추는 기술이다.

이중 단서 The Double Clue : 보석 절도 의뢰를 해결하는 이야기다. 제목처럼 단서가 두 가지가 나온다. 하나는 이니셜이 새겨진 담배케이스, 또 하나는 장갑 한 개다. 단순한 추리라서 쉽게 맞출 수 있다. 딱히 복잡한 기교 같은 것도 없다. 오히려 너무 명백하게 보이고 매우 평범해서 놓치기 쉬운 단서라는 것이 이 소설의 함정이다. 단서가 꼬여 있다는 것이 힌트다.

셜록 홈즈에게 아이린 애들러가 있듯, 푸아로에게는 '로사코프 백작부인'이 있다. 이 단편은 바로 이 여인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푸아로가 로사코프 부인의 재치를 심하게 격찬한다. 아름답고도 머리 좋은 여자는 드문 법이다.

말벌 둥지 Wasps' Nest : '골프장 살인 사건'처럼 제목 때문에 혼동스러웠다. 범행 도구가 말벌이 아니다. 말벌 둥지를 없앤다고 산 약으로 독살하려는 것이었다. 말벌이 사람을 죽이려는 줄로만 알았다.

간단하지만 독특한 이야기다. 사후에 살인범을 잡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살인을 막으려는 푸아로. 끝에 반짝이는 반전이 있다. 크리스티는 역시 반전의 여왕이다.

이 이야기에는 헤이스팅스가 나오지 않아 어색하다. 푸아로 혼자서 떠들고 있잖아. 사람이 아니라 수다쟁이 유령처럼 보인다. 이래서 반드시 탐정의 말을 경청하는 인물이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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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인의 만찬
애거서 크리스티
해문출판사

에지웨어 경의 죽음
애거서 크리스티
황금가지

Lord Edgware Dies (1933) 영국판
Thirteen at Dinner 미국판

이 소설은 국내 번역본으로 제목이 전혀 다르게 나와서 두 번 읽게 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황금가지는 영국판 오리지널 제목에 따라 '에지웨어 경의 죽음'이라고 했으나 해문은 미국판 제목인 '13인의 만찬'을 택했다. 제목은 다르지만 같은 책이다.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을지 말지는 과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대로 흉내내서 주변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는지를 받아들일지 말지로 결정된다. 추리소설의 세계에 진입하면 일단 작가의 설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이 가상세계가 당신에게 재미를 선사한다.

제인 윌킨슨은 주변 사람들에게, 심지어 이 위대한 탐정인 푸아로에게도 대놓고 남편 에지웨어 경을 죽일 거라고 떠들어놓고 알리바이를 앞서 말한 방법으로 설정해놓는다. 범행이 일어난 시간에 같은 사람이 두 장소에 동시에 나타난다. 한 사람은 만찬 장소에 여러 사람들과 식사를 하고, 한 사람은 집으로 가서 남편을 만난다.

연쇄 살인이 일어난다. 윌킨슨의 대역을 했던 칼로타 애덤스는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자살로 위장되어 죽는다. 결정적 제보를 푸아로에게 하려던 로스는 에지웨어 경처럼 두개골 하단이 찔려 죽는다. "서양에서는 열세 명이 모인 자리에서 먼저 자리에 뜨는 사람이 죽는다는 미신이 있다."(191쪽) 바로 그 사람이 로스다. 그래서 미국판 제목이 '13인의 만찬'이다.

애 여사는 독자를 재미있게 약올리는, 혹은 독자를 기분 좋게(?) 바보로 만드는 장치로 두 가지를 설정해 놓았다.

첫째, 증거품들. 코안경, 편지, 이니셜 D와 11월 파리가 적힌 금색 상자 등은 사건의 힌트이면서 사건 해결을 방해하기도 한다.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에서 커피와 찢긴 종이 조각으로 독자를 혼란에 빠트리더니, 이번에도 또 그런다. 268쪽에 실린 편지의 일부는 영어를 알아야 그 트릭을 풀 수 있다. 한글로는 전혀 알 수 없다.

둘째, 범인인 거 같지, 범인 아니네. 거의 범인으로 추정되는 상황에서 해당 용의자가 범인이 아니라고 푸아로가 말해 버린다. 소설 중후반(247쪽)에서 로널드가 증거와 정황, 자백으로 봐서 범인으로 보이고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 거라며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순간, 푸아로는 용의자의 결백을 믿는다고 말한다. 로널드는 에지웨어 경이 죽으면 재산을 상속 받기 때문에 유력한 용의자였다. 그럼 범인은 누구냐고! 애끓는 약올림을 애 여사는 후반부(324쪽)에 한번 더 한다. 푸아로가 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는 자리에서 브라이언 마틴을 범인으로 설명하더니 갑자기 자기가 틀렸다고 말한다. 그러면 도대체 범인은 누구냐니까!

인물이 평면적(윌킨슨은 자기 중심적인 소시오패스에다가 미인이나 교양이 없다. 애덤스는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이고 트릭이 인위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정교하게 짜맞춘 수수께끼 구조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왜 애 여사가 미스터리의 여왕으로 불리겠는가.

소설 서술은 헤이스팅스의 회고 형식으로 1인칭이다. 나는 이 서술 방식이 편하게 읽힌다. 3인칭으로 쓰여진 푸아로 소설은 정감이 없다. 반면, 우리의 순둥이 캐릭터 헤이스팅스가 전하는 어투에는 따사로운 감정이 있다. 

이 작품에서 푸아로, 헤이스팅스, 재프가 서로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재미있다. 대화를 읽고 있으면 세 명의 코미디언이다. 푸아로가 회색 뇌세포 얘기만 꺼내기 시작하면 머리가 아픈, 헤이스팅스 대위. 독자 수준의 표면적 추리를 해내고는 나름 자부심을 갖는, 재프 경감. 겸손한 척하지만 자기 추리력을 뽐내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푸아로. 푸아로가 추리 하느라 정신이 나갔을 때는 헤이스팅스와 재프가 합세해서 푸아로를 미쳤다고 말하고, 재프가 멍청한 추리를 늘어놓으면 푸아로와 헤이스팅스가 재프를 비웃으며, 헤이스팅스가 순진한 말을 할 때면 푸아로와 재프가 헤이스팅스를 바보 취급한다. 그럼에도 서로를 위하는 정감이 물씬 풍긴다.

언제나 그렇듯 소설 끝에서 또 한 커플 탄생했다. "푸아로는 성공적인 로맨스를 약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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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트레인의 수수께끼
The Mystery of the Blue Train (1928)
애거서 크리스티
황금가지 2007년 9월

언제부터 푸아로라는 표기를 쓰기 시작했는지 모르나, 짐작하기로는 외국어 표기법이 되도록 해당 발음에 가깝게 쓰도록 하기 때문인 것 같다. 포와로가 푸아로다. 푸아그라가 생각난다.

본래 해문에서 나온 80권짜리 빨간책들을 발표순으로 모두 읽을 계획이었으나 진도가 가다가 멈췄다. 세월이 흘러흘러 황금가지판 전집도 완결이 되었다. 도서관에 가니 해문 전집은 아니 보이고 황금가지 전집만 보여서 황금가지 거로 푸아로 시리즈를 발표순으로 모두 읽을 계획이다.

황금가지판은 멋진 외양과 달리 오탈자가 독서를 방해한다. 많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도 다른 책에서 지적하는 걸 보면 권마다 한두 개 정도가 아니다. 그냥저냥 읽을만은 하지만, 자꾸 보이니까 거슬린다.

이 책 읽기 시작했을 때, 이거 푸아로 시리즈 맞나 의심이 들었다. 아무리 읽어도 푸아로가 등장하지 않는 거다. 114쪽, 책 4분의 1 지점에 가서야 푸아로가 등장한다.

전 발표작과는 다른 서술 방식을 쓰고 있다. 일단, 헤이스팅스가 안 나온다.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고 등장인물별로 자주 장으로 나눠 전개한다. 조금 읽었다 싶으면 장이 바뀐다. 물론 서술하는 인물, 장면, 장소도 바뀐다. 그렇다고 사건이 긴박하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은 단순한데 등장인물은 복잡다단하게들 나온다. 끝까지 읽고서야 왜 앞부분에서 그렇게 많은 뜸을 들이고 많이 서술했는지 알 수 있다.

백만장자의 딸 루스 케터링은 아버지한테서 '불의 심장'이라 불리는 유명한 보석을 선물 받는다. 선물 받은 루비를 갖고 기차를 타고 가던 중 누군가한테 심하게 얼굴을 가격당한 채 살해당한다. 물론 보석도 사라진다.

가장 먼저 의심스러운 사람은 그렇게 보석을 갖고 기차를 타게 한, 옛 애인 로슈 백작이다. 그 다음으로 용의자는 루스가 죽으면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되는, 남편 데릭 케터링이다.

추리 게임은 친절하고 표준적이며 공정하다. 푸아로가 차근차근 범인이 아닌 사람들을 제거해 나아가고 캐서린의 사랑 찾기에 대한 조언을 통해 대놓고 힌트를 준다. 셋 중에 한 명 고르기? 어렵지 않아요. 그래도 추리소설에서는 작가가 갑이다. 범인이 변장에 말맞추기에 난리를 치는데 독자가 어떻게 알아내겠는가. 그저 얘가 이렇게 범행을 했다면 그런 거지.

사람이 죽었고 살인범이 돌아다니는데 등장인물들은 구혼하기 바쁘다. 어이가 없다. 이 사람들 제정신이야! 추리소설에서 로맨스 풍으로 나간다. 애거서 크리스티 스타일이다. 운명적 만남을 네 번 이상 거듭하고 눈동자 어쩌고 하는데 손이 오그라들더라.

열차 미스터리라서 무척 기대를 했는데 평범한 편에 속했다.

※ 참고 : 황금가지판 구판은 제목을 The Mystery on the Blue Train로 잘못 표기했다. on이 아니라 of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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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포
The Big Four (1927)
애거서 크리스티
해문 1991년

만화 같은 첩보소설

해문에서 나온 80권짜리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시리즈를 출간 순서대로 읽으려 했으나 6번째 '침니스의 비밀'을 중간까지 읽다가 포기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타협을 해서 포와로가 나오는 소설만 순서대로 읽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초반까지만 읽고 더는 진도가 안 나가는 것이었다.

다시 기를 모아서 앞서 두 권과 '빅 포'를 도서관에서 빌렸다. '빅 포'는 읽히더라. 너무 빨리 읽혀서 곤란했다. 일부러 속도를 줄여서 읽었다.

사람들 평가로는 이 장편소설이 가장 안 좋다. 읽어 보면 왜들 그러는지 알 수 있다. 사건 전개만 다닥다닥 빨리 붙여서 앞으로 나아가는 식이다. 스파이 영화 줄거리를 어설프게 가져다가 쓴 습작처럼 보인다. 포와로 캐릭터를 가져다가 두 번째 발표작 '비밀 결사'의 국제 첩보전 형식에 끼워 맞췄다.

첫 발표작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이 워낙 뛰어났고, '골프장 살인사건'도 좋았으며, 단편집 '포와로 수사집'은 경의로운 반전과 추리로 가득했다. 허나, '빅 포'는 망했다.

소설을 쓰고자 습작 중인 분이라면 필독서다. 자신감과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졸작을 탐독해야 한다.

포와로/헤이스팅스 콤비의 번외편으로 가볍게 만화처럼 읽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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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로 사건집
애거서 크리스티

Poirot Investigates (1924)
영국판 1924년 발표 11편 수록
미국판 1925년 발표 14편 수록

벨기에 출신 사립탐정 푸아로의 활약을 그린 단편집이다.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과 '골프장 살인사건'에 이어 푸아로 시리즈 세 번째 발표작이다. 첫 단편 '서방 별의 모험'에서 스타일즈 저택의 카벤디시 부부를 언급한다. 앞서 두 작품과 동일하게, 헤이스팅스가 질투하는 조력자이자 성실한 기록자다.

왜 자꾸만 추리소설에서 로맨스의 환상으로 빠져들까. 작가는 자립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상을 긍정적으로 그려내면서도 한편으로 이를 몽상으로 취급한다. 자신의 감정과는 별 상관도 없이 신분 상승과 재산 획득을 위한 결혼이라는 한계, 어쩌면 오늘날이라고 크게 다를 것 없는 현실에서 참된 사랑을 애타게 바라는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푸아로와 헤이스팅스는 코난 도일의 홈즈와 왓슨을 이어받아 충실히 구현한다. 다만, 자신이 창조한 탐정이 의식적으로 홈즈를 밟고 올라서게 한다. '납치된 수상'에 나오는 대사를 보라. "명탐정이라면 원기 왕성하고,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거라고 말들 하시겠지. 모래 투성이의 길에 납작 엎드려서 조그만 확대경으로 타이어 자국을 찾으면서, 담배꽁초나 떨어져 있는 성냥개비를 모으거나."(188쪽) '데이븐하임 씨의 실종'에서는 비아냥거린다. "발자국이나 담뱃재나 빵 부스러기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고 조사를 한다." "런던의 참새도 마찬가지란 말인가?"(200쪽)

회색 뇌세포는 머릿속 진실을 쫓는다. 정보를 모아서 특정 인물의 욕구에 따라 논리적으로 배열하는 일에 몰두한다. 사건 해결의 궁극적 열쇠는 겉으로 드러난 사실이 아닌 그 뒤에 숨겨진 욕망이다.

'베일에 싸인 여인'은 뒤팽-홈즈-푸아로의 계보를 완성한 단편소설이다. 선배 작가의 작품을 가져다가 자기 식으로 바꾼다. 연애 편지라는 소재와 이를 되찾는다는 이야기 틀거리는 같지만 전개 방식과 최종 결론은 다르다. 포의 '도둑맞은 편지'는 도일의 '보헤미아의 스캔들'로 다시 태어났고, 크리스티는 앞서 두 작품의 추리 구조를 뛰어넘는다.

푸아로는 사건이 없어 심심해서 사망 직전 상태다. 커다란 푸른 눈에 금발 미인이 사건을 의뢰한다. 여인은 공작과 결혼할 예정인데 어린 시절 철없이 썼던 연애 편지 때문에 협박을 받고 있다. 포와로와 헤이스팅스는 편지가 있는 집으로 들어가서 편지를 숨겨놓은 곳을 가까스로 찾아낸다. 편지를 돌려주고 끝? 

반전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홈즈가 '보헤미아의 스캔들'에서 '아아린의 사진'을 갖고 싶다고 조르는 것처럼 푸아로는 편지가 담겨 있었던 '상자'를 갖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상자 안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의 본래 모습이 숨겨 있었다.

마지막 수록작 '초콜릿 상자'은 흥미로운 소설이다. 푸아로가 나오는 다음 발표작, 그 유명한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전조가 보인다. 이야기는 도일의 '보헤미아의 스캔들'처럼 실패한 사건이라며 시작한다. 웃음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여 독자를 안심시키지만, 대범하게도 그동안 절대로 범인이라 생각할 수 없는 인물을 살인자로 보여준다.

이 단편집을 읽고 있으면, 작가 자신이 자신의 추리소설 창작력이 어느 정도인가 시험해 보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렇다면 그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어떤 소재로도 훌륭한 추리소설을 써낼 수 있었다. 보석 절도, 스파이, 보험금을 노린 살인, 증권 도난, 저주를 빙자한 살인, 납치, 실종, 숨겨진 보물(유언장) 찾기, 연애 편지 되찾기, 법으로 처벌이 안 되는 살인범에게 정의의 심판하기 등. 추리소설에 나올 수 있는 거의 모든 소재로 이 단편집을 꾸렸다.

단언컨대, '푸아로 수사집'은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의 북극성 같은 작품이다.

포와로 수사집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설영환 옮김/해문출판사
 
해문 번역본은 미국판을 기준으로 14편 모두 실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5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윤정 옮김/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8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유미 옮김/황금가지

황금가지 번역본은 제목이 '푸아로 사건집'이다. 단편 3편이 빠졌다. 베일에 싸인 여인, 잃어버린 광산, 초콜릿 상자 등. 1924년 영국판은 황금가지 번역본처럼 11편을 수록했다. 1년 후 발행된 미국판은 이 3편을 포함했다. 이 빠진 세 편은 영국판이 경우 1974년 발행한 단편집 Poirot's Early Cases에 와서야 나온다.

빠진 3편은 황금가지 전집 78권에 넣었다.

에르큘 포아로의 모험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천두병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동서문화사판도 제대로 다 싣지 않았다. 10편만 실었고 여기에 장편 '구름 속 살인'을 더불어 넣었다. 제목은 엉뚱하게도 '에르큘 포와로의 모험'이다.

Poirot Investigates (Paperback) - 10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HarperCollins

푸아로 수사집 원서 구입 기념 첫 쪽 번역
1 "서방 별"의 모험

나는 푸아로 방의 창가에 서서 아래 거리를 한가롭게 내다봤다.

"이상하네."

나는 목소리를 죽인 채 갑자기 말했다.

"무엇이요? 모나미.(옮긴이 주석: 내 친구란 뜻의 불어다. 푸아로는 종종 프랑스를 말해서 스스로 왕따를 자초한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불어를 말하면 잘난 척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푸아로의 성격을 잘 보여주기 위한 언어적 장치다. 푸아로는 벨기에 사람이니까 영어보다는 불어에 더 친숙하다. 작가는 영국인 아닌 사람을 탐정으로 창작하려고 했는데, 입헌군주제로 영국과 비슷한 나라이면서 좀 이국적인 국가를 택하다보니 벨기에가 당첨된 모양이다.)

푸아로는 안락의자에 깊숙이 앉아 조용히 물었다.

"추리해 보십시오, 푸아로. 다음 사실로부터요. 여기 멋드러진 모자와 근사한 모피옷으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젊은 숙녀가 있습니다. 걸으면서 집들을 올려다 보며 천천히 갑니다. 그녀와 아는 사람이 아닌데, 남자 셋과 중년 여성 한 명이 따라붙네요. 방금 심부름꾼 소년이 그 여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같은 무리가 되었습니다. 이 무슨 연극하는 건가요? 여자는 사기꾼이고 뒤따라는 무리들은 여자를 체포하려는 탐정들인가? 아니면, 깡패들? 순진한 사람을 공격하려는 걸까요? 위대한 탐정님께서는 뭐라 말씀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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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 여사의 영어 문장은 쉽다.

가끔씩 나오는 불어가 은근히 짜증난다. 푸아로, 예전부터 미웠지만 원서로 읽으니까 더 밉다. 첫 얘기부터 헤이스팅스/독자를 완전 바보로 만든다.

2014.02.23

Posted by love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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