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아로 사건집
애거서 크리스티
Poirot Investigates (1924)
영국판 1924년 발표 11편 수록
미국판 1925년 발표 14편 수록
벨기에 출신 사립탐정 푸아로의 활약을 그린 단편집이다.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과 '골프장 살인사건'에 이어 푸아로 시리즈 세 번째 발표작이다. 첫 단편 '서방 별의 모험'에서 스타일즈 저택의 카벤디시 부부를 언급한다. 앞서 두 작품과 동일하게, 헤이스팅스가 질투하는 조력자이자 성실한 기록자다.
왜 자꾸만 추리소설에서 로맨스의 환상으로 빠져들까. 작가는 자립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상을 긍정적으로 그려내면서도 한편으로 이를 몽상으로 취급한다. 자신의 감정과는 별 상관도 없이 신분 상승과 재산 획득을 위한 결혼이라는 한계, 어쩌면 오늘날이라고 크게 다를 것 없는 현실에서 참된 사랑을 애타게 바라는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푸아로와 헤이스팅스는 코난 도일의 홈즈와 왓슨을 이어받아 충실히 구현한다. 다만, 자신이 창조한 탐정이 의식적으로 홈즈를 밟고 올라서게 한다. '납치된 수상'에 나오는 대사를 보라. "명탐정이라면 원기 왕성하고,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거라고 말들 하시겠지. 모래 투성이의 길에 납작 엎드려서 조그만 확대경으로 타이어 자국을 찾으면서, 담배꽁초나 떨어져 있는 성냥개비를 모으거나."(188쪽) '데이븐하임 씨의 실종'에서는 비아냥거린다. "발자국이나 담뱃재나 빵 부스러기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고 조사를 한다." "런던의 참새도 마찬가지란 말인가?"(200쪽)
회색 뇌세포는 머릿속 진실을 쫓는다. 정보를 모아서 특정 인물의 욕구에 따라 논리적으로 배열하는 일에 몰두한다. 사건 해결의 궁극적 열쇠는 겉으로 드러난 사실이 아닌 그 뒤에 숨겨진 욕망이다.
'베일에 싸인 여인'은 뒤팽-홈즈-푸아로의 계보를 완성한 단편소설이다. 선배 작가의 작품을 가져다가 자기 식으로 바꾼다. 연애 편지라는 소재와 이를 되찾는다는 이야기 틀거리는 같지만 전개 방식과 최종 결론은 다르다. 포의 '도둑맞은 편지'는 도일의 '보헤미아의 스캔들'로 다시 태어났고, 크리스티는 앞서 두 작품의 추리 구조를 뛰어넘는다.
푸아로는 사건이 없어 심심해서 사망 직전 상태다. 커다란 푸른 눈에 금발 미인이 사건을 의뢰한다. 여인은 공작과 결혼할 예정인데 어린 시절 철없이 썼던 연애 편지 때문에 협박을 받고 있다. 포와로와 헤이스팅스는 편지가 있는 집으로 들어가서 편지를 숨겨놓은 곳을 가까스로 찾아낸다. 편지를 돌려주고 끝?
반전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홈즈가 '보헤미아의 스캔들'에서 '아아린의 사진'을 갖고 싶다고 조르는 것처럼 푸아로는 편지가 담겨 있었던 '상자'를 갖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상자 안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의 본래 모습이 숨겨 있었다.
마지막 수록작 '초콜릿 상자'은 흥미로운 소설이다. 푸아로가 나오는 다음 발표작, 그 유명한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전조가 보인다. 이야기는 도일의 '보헤미아의 스캔들'처럼 실패한 사건이라며 시작한다. 웃음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여 독자를 안심시키지만, 대범하게도 그동안 절대로 범인이라 생각할 수 없는 인물을 살인자로 보여준다.
이 단편집을 읽고 있으면, 작가 자신이 자신의 추리소설 창작력이 어느 정도인가 시험해 보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렇다면 그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어떤 소재로도 훌륭한 추리소설을 써낼 수 있었다. 보석 절도, 스파이, 보험금을 노린 살인, 증권 도난, 저주를 빙자한 살인, 납치, 실종, 숨겨진 보물(유언장) 찾기, 연애 편지 되찾기, 법으로 처벌이 안 되는 살인범에게 정의의 심판하기 등. 추리소설에 나올 수 있는 거의 모든 소재로 이 단편집을 꾸렸다.
단언컨대, '푸아로 수사집'은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의 북극성 같은 작품이다.
포와로 수사집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설영환 옮김/해문출판사
해문 번역본은 미국판을 기준으로 14편 모두 실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5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윤정 옮김/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8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유미 옮김/황금가지
황금가지 번역본은 제목이 '푸아로 사건집'이다. 단편 3편이 빠졌다. 베일에 싸인 여인, 잃어버린 광산, 초콜릿 상자 등. 1924년 영국판은 황금가지 번역본처럼 11편을 수록했다. 1년 후 발행된 미국판은 이 3편을 포함했다. 이 빠진 세 편은 영국판이 경우 1974년 발행한 단편집 Poirot's Early Cases에 와서야 나온다.
빠진 3편은 황금가지 전집 78권에 넣었다.
에르큘 포아로의 모험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천두병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동서문화사판도 제대로 다 싣지 않았다. 10편만 실었고 여기에 장편 '구름 속 살인'을 더불어 넣었다. 제목은 엉뚱하게도 '에르큘 포와로의 모험'이다.
Poirot Investigates (Paperback) - 10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HarperCollins
푸아로 수사집 원서 구입 기념 첫 쪽 번역
1 "서방 별"의 모험
나는 푸아로 방의 창가에 서서 아래 거리를 한가롭게 내다봤다.
"이상하네."
나는 목소리를 죽인 채 갑자기 말했다.
"무엇이요? 모나미.(옮긴이 주석: 내 친구란 뜻의 불어다. 푸아로는 종종 프랑스를 말해서 스스로 왕따를 자초한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불어를 말하면 잘난 척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푸아로의 성격을 잘 보여주기 위한 언어적 장치다. 푸아로는 벨기에 사람이니까 영어보다는 불어에 더 친숙하다. 작가는 영국인 아닌 사람을 탐정으로 창작하려고 했는데, 입헌군주제로 영국과 비슷한 나라이면서 좀 이국적인 국가를 택하다보니 벨기에가 당첨된 모양이다.)
푸아로는 안락의자에 깊숙이 앉아 조용히 물었다.
"추리해 보십시오, 푸아로. 다음 사실로부터요. 여기 멋드러진 모자와 근사한 모피옷으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젊은 숙녀가 있습니다. 걸으면서 집들을 올려다 보며 천천히 갑니다. 그녀와 아는 사람이 아닌데, 남자 셋과 중년 여성 한 명이 따라붙네요. 방금 심부름꾼 소년이 그 여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같은 무리가 되었습니다. 이 무슨 연극하는 건가요? 여자는 사기꾼이고 뒤따라는 무리들은 여자를 체포하려는 탐정들인가? 아니면, 깡패들? 순진한 사람을 공격하려는 걸까요? 위대한 탐정님께서는 뭐라 말씀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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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 여사의 영어 문장은 쉽다.
가끔씩 나오는 불어가 은근히 짜증난다. 푸아로, 예전부터 미웠지만 원서로 읽으니까 더 밉다. 첫 얘기부터 헤이스팅스/독자를 완전 바보로 만든다.
2014.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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