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북하우스 펴냄
레이먼드 챈들러는 잘나가는 회사의 부사장으로 일하다가 결근과 음주로 해고를 당한다. 때는 1932년, 대공황 시대였다.
1930년대 미국 상황은 일자리를 찾거나 사업을 하기에는 막막했으나 그동안 품었던 꿈을 이루기에는 좋은 때였다. 가지고 있었던 것을 버리고서야 비로소 그동안 얻지 못했던 것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니, 손을 펴서 쥐고 있던 것을 버리지 않고서 어떻게 새로운 것을 쥘 수 있겠는가.
마흔 중반이 넘어버린 사내, 한때 회사 중역이었나 이제 쥐뿔도 가진 게 없는, 그 잘난 미국 자본주의 경제 사회의 밑바닥으로 추락한, 챈들러는 소설가가 된다. 1934년 단편소설 한 편이 잡지 '블랙 마스크'에 실린다. 쉰이 넘은 나이에 1939년 장편소설 '빅 슬립'을 출간한다.
이미 줄거리를 알고, 범인을 알고, 사건의 진상을 안 상태에서 추리소설 '빅 슬립'을 읽었다. 대단히 빨리 대충 읽었다. 북하우스의 전자책에 띄어쓰기가 잘못된 곳이 종종 보여서 거슬렸지만, 텔레비전에서는 월드컵 한국 대 독일 전을 중계 중이었지만, 소설은 읽혔다.
직유나 묘사는 완전히 무시하거나 건너뛰면서 읽었다. 오로지 사건 전개에만 집중했다. 왜 이렇게 읽는가?
이 책은 읽다가 졸려서 자는 사람이 있다. 도대체 뭔가 뭔지 모를 판국에 직유로 점철된 문장을 읽어가니, 어찌 흥미진진하게 읽어나갈 수 있겠는가.
'빅 슬립'은 이야기 전개가 비비 꼬이고 복잡하다. 최대한, 독자가 헛고생하고 잘못 추리하고 오해하도록 써 놓았다. 도대체 뭐가 어찌된 영문인지 알고 싶어서 끝까지 읽고나면 그동안 읽느라 고생한 것이 허무할 지경에 이른다.
읽는 사람 짜증나게 하는 이야기 구조다. 독자를 계속 한쪽으로 몰아대면서 실제 진실은 다른 쪽에 있는 식이다. 도저히 사건의 진상을 짐작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
그럼에도 커피향처럼 이토록 진하게 남는 인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분명히 추리소설, 하드보일드 한 편을 읽었을 뿐인데 어느새 주인공 말로의 말과 생각에 빠져 정신이 몽롱하다.
절망의 세계에서 선한 의지를 끝까지 실행하려는 남자, 필립 말로. 탐정이라면서 뭔가 특별한 추리능력을 가진 비범한 자로 묘사되는데, 그는 아니다.
"저는 셜록 홈스도 아니고 파일로 밴스도 아니니까요. 저는 경찰이 밝혀낸 것을 바탕으로 해서 조사를 할 것을 기대하지도 않고 부러진 펜촉 하나를 주워서 거기서 사건을 구성하는 능력도 없습니다."
그의 능력은 무엇인가? 타락한 세상에서 깊은 잠에 빠지 않고 깨어있으려는, 지독한 선의지.
"지금 당신은 만오천 불을 준다고 하는군. 그 정도면 나도 갑부가 되겠지. 만 오천 달러면, 집도 살 수 있고 새 차도 사고 새 양복도 한 네 벌 정도는 살 수 있을 테지."
정직하지 못한 일을 하라고 주는 돈을 거절하고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고 착한 일을 한 후 씁쓸하게 돌아서며 사립탐정 필립 말로의 강렬한 독백이 시작된다.
"일단 죽으면 어디에 묻혀 있는지가 중요할까? 더러운 구정물 웅덩이든, 높은 언덕 꼭대기의 대리석 탑이든 그게 중요한 문제일까? 당신이 죽어 깊은 잠에 들게 되었을 때, 그러한 일에는 신경쓰지 않게 된다."
비천한 현실에 불평하기보다는 그런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끝끝내 정언명령을 실행한다. 비열한 세상의 도덕적 실천자, 필립 말로. 이 캐릭터는 경제적 불황과 감상적 절망에서 나온, 문학 창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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