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트 특급 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신영희 옮김/황금가지
Murder on the Orient Express (1934)
Murder in the Calais Coach 미국판
이 소설은 책으로 읽은 적은 없었으나 영화로 본 기억이 있었다. 결말이 워낙 희안해서 아직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이미 범인을 알고 있었고 그 수법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미 범인과 범행 수법을 알고 있는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 역시 걸작은 다르다. 이 경악스러운 미스터리는 이미 결론을 알고 있어도 감동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 중에서 유명한 축에 속한다. 이런 독창적인 미스터리가 다시 나오기도 힘들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다음으로 손꼽는 작품이다.
설정 자체가 대단히 흥미롭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열차는 폭설에 갇혔다. 따라서 이 객차 안에 있는 승객들 중에 범인이 있다. 살해된 곳의 문은 잠기고 안쪽에서 체인이 걸렸다. 피해자의 몸에는 10~15번 정도 찔렸다. 밀실이다!
찔린 상처로 봐서는 혼자가 아닌 남자와 여자가 최소 둘 이상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이고,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주홍색 잠옷을 입은 여자와 제복을 입은 남자가 수상한데 도대체가 열차 안 용의자들 중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게다가 그 옷들은 엉뚱한 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용이 그려진 잠옷은 2부 마지막에서 푸아로의 방에서 나온다. "이건 도전이야. 좋아, 받아들여 주지."(218쪽) 푸아로의 회색 뇌세포가 지금까지 모은 증거와 증언을 토대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소설 본문 안에서 대놓고 이 소설이 굉장하다고 자찬한다. "이건 정말이지 지금까지 읽은 어떤 추리 소설보다 더 기묘한군요."(280쪽) 맞다. 그리고 아직도 애 여사의 이 작품을 능가하는 추리소설은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애 여사가 특정 나라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 읽기 불편할 수 있으나 이 작품에서 미국 사법 제도의 헛점을 비난하는 것은 선견지명이다. 오늘날 그 어느 나라의 사법 제도라 해도 제대로 정의를 실현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니까 이 소설의 통쾌한 결말은 여전히 감동이다.
참고로, 미국판이 '오리엔트 익스프레스'라는 제목을 피한 이유는 같은 제목의 소설이 출간 전에 나와 있어서 혼동을 피하기 위함이었단다.
덧붙임 : 황금가지에서 펴낸 번역본에서 오류를 발견했다. 2002년 5월 22일 1판 2쇄. 57쪽 "열네댓 군데나 찌릅니까?" 여기서 열네댓이면 14~15를 뜻하는데 영어 원문에는 ten-twelve -fifteen으로 나온다. 열, 열둘, 혹은 열다섯 군데라고 번역해야 한다. 이 소설을 안 읽은 사람은 그깟 숫자가 그리 중요하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후반부에서 이 숫자는 결정적 힌트이자 중요한 의미다. 추리소설은 논리의 일관성이 생명이다. 이 실수는 치명적이다.
푸아로 소설을 황금가지 번역은 읽어나아가는 중인데 참으로 실망이다. 초판이니까 오탈자 몇 개야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명백한 번역 오류까지 있다니. 지난번 블루 트레인의 수수께끼의 영문 제목 오타(of를 on으로 표기)는 흔한 실수로 넘어갈 수 있지만 이런 번역 오류가 나오면 신뢰할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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