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내 사랑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북하우스 펴냄
2004년 8월 발행
챈들러의 소설을 추리소설처럼 읽으려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그러지 마라. 범인이 누군지 궁금하겠지만, 챈들러가 추구하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다. 탐정소설의 탈을 쓰고 발레 같은 문장으로 달처럼 우아한 순정의 기다란 옷자락을 보여준다.
나는 필립 말로의 혼잣말을 읽기 위해서 챈들러를 읽는다. 챈들러의 문장은 읽는 이가 뭔가 쓰고 싶게 한다. 탐정소설 필립 말로 시리즈에서 쏟아내는 1인칭 독백은 술처럼 중독성이 있다. 처음에는 도대체 왜들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느새 그가 쓴 문장을 하루라도 읽지 않으면 더는 살 수 없을 것만 같다. 어떻게 챈들러를 안 읽고 살았는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안녕 내 사랑'은 신기한 1인칭 문장을 보여준다. 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답하며 비몽사몽 중에 헛소리를 한다. 심지어 주인공이 아닌 다른 이들도 그의 농담을 따라한다. 상대방조차 필립 말로처럼 말한다. 그들의 팬들조차 말로의 말투를 따라한다.
말로의 독백은 지적 교양 수준을 요구한다.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라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여러 문학 작품을 가져다가 변형해서 웃겨야 한다. 게다가 유머감각까지 있어야 한다. 이런 문장은 읽을 때는 쉽지만 막상 실제로 쓰려면 애를 먹는다.
챈들러를 의도적으로 따라한 하루키도 그렇다. 정말 쓰기 쉬워 보인다. 그렇게 보일 뿐이다. 개성을 담아 절묘하게 어울리는 직유법 유머를 구사해야 한다.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으리라. 챈들러식 문장을 쓴다는 것은 닭이 스스로 자기 깃털을 뽑고서 치킨집의 끓는 기름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건 내 식인가.
챈들러의 이야기는 주인공이 뭔가를 찾아 비정한 도시를 돌아다닌다. 주로 사람을 찾는 일이고 가끔은 물건을 찾아 돌아다니다. 그리고 그가 찾고자 하는 사람/물건/진실을 시작할 때 이미 곁에 있었던 것으로 이야기 끝에 밝혀진다. 성배 이야기의 끝없이 변주할 뿐이다. 다른 이야기는 없다.
'안녕 내 사랑'은 필립 말로가 밸마라는 여자와 보석 목걸이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시작부터 의문투성이다.
갑자기 키가 크고 덩치가 큰 거인이 말로를 잡아채서 함께 술집에 들어가더니 8년 전 이 술집에서 일했던 여자를 찾는다. 그 와중에 한 명이 거인의 손에 죽고만다. 그 일 이후 이상한 일은 또 일어난다. 도난당한 보석을 되사는 걸 도와달란다. 뭘 해야 하냐고 물으니까 그냥 곁에만 있어 달란다.
탐정은 책임감에 불타서 자신이 되사는 일을 할테니 의뢰인을 뒤에 있으라고 한다. 현장에 도착하니 탐정 자신은 누군가한테 뒤통수를 얻어맞고 기절해 버린다. 이때 나오는 혼잣말이 가관이다. 아무튼 정신을 차리고 의뢰인을 잘 있나 살펴 보니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일까?
이후 진실을 찾아 단서를 좇아 이 사람 저 사람 별별 사람을 다 만난다.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 자신을 때리는 사람, 자신을 정신병원에 가두는 사람, 술 마시며 같이 떠들어대는 사람 등. 절대 악인도 절대 선인도 없고 그냥저냥 타락한 도시에서 어찌저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챈들러의 걸작으로 불리는, '안녕 내 사랑'은 사랑이라는 낭만적 이미지를 부드러우면서도 차갑게 그려낸다. 이 말은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은 사람만 이해할 수 있다. 아직 안 읽었으면 메롱이다. 챈들러가 이 소설을 그려내는, 남자의 사랑은 멍청하면서도 순수한다. 하드보일드 소설에만 머물지 않고 문학적인 성취로 나아간다.
이야기 자체만 보자면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많다. 요약하면 단편은커녕 콩트도 안 되는 내용이다. 진실을 찾고자 헤매는 중간 과정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날카롭고 정확하게 추리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식이 아니고 그냥저냥 추측해 보니까 그런 것 같더라는 식이다. 다시 말하지만, 챈들러의 소설은 이야기가 아니라 문장을 읽기 위해서 읽는다.
당신은 이 소설을 다 읽은 후에 다시 처음부터 다시 읽으려 들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 진실을 암시했던 문장을 다시 읽기 위해서, 여기저기 꽃처럼 심어놓은 희망의 상징을 발견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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