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퍼그라피아
- 위대한 작가들의 창조적 열병
The Midnight Desease (2004년)
앨리스 플래허티 지음
박영원 옮김
휘슬러 펴냄
2006년 발행 절판

작가를 지망하거나 이미 작가인 사람은 다음 두 가지 병을 겪습니다. 하나는 글이 너무너무 잘 써져서 주체할 수 없는 황홀경에 빠져 천국에 머무는 '하이퍼그라피아'이고, 다른 하나는 글이 막혀서 도저히 한 글자도 쓰지 못해 이글이글 타오르는 지옥불에 타면서 고통을 겪는 '작가의 블록 현상'입니다. 두 가지 중에 하나도 경험한 적이 없다고요? 그럼 작가 지망생이 아니거나 작가가 아니죠. 독자로서 이런 현상이 궁금하다면 책을 펴세요.

글쓰기 중독이나 막힘은 아무나 경험하는 게 아니예요. 글쓰기에 대한 끝없는 열정 때문에 나타나는 강박 현상이거든요. 대개들 글 쓰다가 힘들면 그만두죠. 그러니 이런 열병에 걸려 고생하지 않아요. 작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닌 이유죠. 글이 나올 때까지 포기하지 않거든요.

글이 막히면, 당사자 입장에서는 안타깝고 주변에서 그 사람을 보는 입장에서는 안쓰럽죠. 증상이 심하면 몇몇은 머리에 총알을 박거나 가스오븐에 머리통을 넣거나 토스터를 꼭 끌어안은 채 물 가득 채운 욕조에 들어갑니다. 작가 중에 권총 자살이 보이죠. 리드 브라우티건, 어니스트 헤밍웨이.

글이 술술 잘 써지면 창조적 열정에 사로잡혔다고 좋게 말할 수 있지만, 병에 걸렸다고 얘기할 수도 있어요. 대체로들 예술에 대해서 좋게 보니까 이런 현상을 병이라고 부르는 게 아무래도 썩 유쾌하진 않을 거에요. 분명히 제정신은 아니죠. 저는 살짝 미친 사람들이 흥미롭습니다. 때때로 사랑스럽기까지 하죠.

천국과 지옥을 오가면서 쓴 글은 광기가 있어요. 모파상의 단편소설을 읽고 있으면 확실히 그가 세련되고 멋지게 미쳤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머리카락'을 읽어 보세요. 정말 환상적으로 제대로 미치지 않고서야 그렇게 쓸 수 없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쓴 루이스 캐럴은 어떤가요. 그는 수학자로서 논리적으로 미쳤죠. 해피 버스데이(happy birthday) 대신 해피 언버스데이(happy unbirthday)를 쓰죠. 언버스데이(unbirthday)를 사전에서 찾지 마세요. 안 나와요. 미쳤군요. 귀여워라.

이 책은 글쓰기에 지나치게 열중하는 현상에 대해 두 가지 입장에서 살펴 봅니다. 정신병으로 보기 시작해서 열정적인 삶의 모습으로 끝내죠. 의학 보고서로 시작해서 문학 예찬론으로 마무리합니다. 글쓴이는 이 병에 걸렸던 환자이자 의사로서 객관적으로 분석한 후 주관적으로 느끼라고 말합니다. 여러 사실과 분석 자료와 인용 글과 해설과 자기 글쓰기 체험을 늘어 놓고 뒤로 빠져요. 확답을 안 해요.

전두엽, 측두엽, 두정엽, 실비우스 틈새, 해마, 시상하부, 뇌량, 대뇌피질, 뉴런. 그만 하라고요. 아직 더 써야 해요. 좀 기다려 봐요. 간질, 발작, 게슈빈트 증후군, 조울증, 베르니케 실어증, 정신분열증. 이 책 앞부분은 이렇지만 좀 지나면 안 그래요. 사랑, 짝사랑, 자존심, 발상, 선택, 기억, 창의.

창의적인 오른쪽 두뇌를 쓰라는 상식이 널리 퍼졌는데, 이 책의 지은이는 그 사실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라는군요. 확산적 사고인 오른쪽 뇌와 수렴적 사고인 왼쪽 뇌를 적절하게 왔다갔다 써야 한다고 해요. 술 마신다고 다 시인은 아니다, 이 말씀이겠죠.

조울증 따위의 정신병에 걸려서 쓴 글이라 해도 그게 바로 문학은 아니죠. 읽을 만하고 감동적이고 세련되고 멋진 건 아니라고요. 이 책을 쓴 앨리스 플래허티의 자기 얘기는 문학이 아니죠. 그냥 자기 얘기죠. 임상 보고서죠. 문학과 문학이 아닌 것,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 자로 잰듯 정확히 구별할 순 없지만, 다르죠. 차이가 있죠.

글쓰기는 정신적 치유의 기능이 있어요. 이 책의 저자 앨리스는 쌍둥이 아들을 조산해서 잃었을 때 글을 쓰셨다잖아요. 김연수는 소설을 쓰면서 "살아오면서 받았던 모든 상처는 치유됐다."([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54쪽)고 하잖아요. 정신과 치료에서 글쓰기를 권하죠. 억눌린 감정을 발산해서 그럴 거예요. 이때는 배설에 비유하죠. 설사와 변비를 오가는 글쓰기. 정말 비슷해요.

과학적 분석과 문학적 느낌으로 글쓰기 중독 혹은 막힘 현상을 바라보면, 여러 사례에서 재미있고 새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어요. 글쓰기를 충동시킨 것은 정상이 아닌 상태인 병이지만 그 병으로 더욱 창조적으로 글을 썼어요.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 밑줄 긋기
"언어 자체에 매료된 사람은 단지 대중을 만족시키기 위해 작품을 쓰는 사람보다 언어의 세밀함이나 글의 전반적인 구조에 더 집중한다. 강한 내적 동기는 창의성을 증대시키는 반면, 외적인 동기는 놀랍게도 창의성을 떨어뜨린다."

Posted by love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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