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1 -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책세상 |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처음 읽었을 때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고 통독하기도 만만치 않게 힘들었다. 그러다가 아주 나중에 너무 심심하고 딱히 할 일도 없던 때 다시 읽었더니, 웬걸, 이건 정말 대단히 재미있었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이 책은 망각의 늪에서 나올 기미가 전혀 없었는데, 리디셀렉트에 이 책이 보였고, 책표지가 예뻐서 눈에 잘 띈다, 무심코 다시 읽어 볼까 싶었고 그래서 읽었더니, 캬아 걸작이다. 최고야, 최고!
단지 웃기거나 재미있게만 읽히진 않았다. 우주적 농담으로 그냥 웃고 지나갈 법 하면서도 은근히 날카롭고 철학적인 말이 나올 때면, 이게 그냥 웃기려고 한 말은 아닌 것 같다.
"시간은 환영(幻影)이야. 점심시간은 두 배로 더 그렇지."
지구에서 갇혀 오래 지낼 수밖에 없었던, 우주여행작가 포드가 한 말이다. 철학과 농담을 병치시킨 이 한마디는, 아직도 여전히 아마도 계속 나를 웃기며 사색에 잠기게 한다.
"인생이란, 싫어하거나 무시할 수는 있어도 좋아하기는 어려운 거죠."
자신의 지능에 비해 하는 일이 너무 하찮아서, 우울증에 걸린 로봇 마빈이 한 말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한테는 무척 공감을 많이 받는다. 되는 일 없고 하는 일 없는 요즘의 나한테 이 한마디는 내 몸을 따스하게 감싸 토닥토닥 위로해준다.
"나도 내가 찾는 게 뭔지 모른다고." "왜 몰라?" "왜냐하면......왜냐하면......내가 그걸 알면 찾을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몰라."
자신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모르는, 자포드가 하는 말이다. 인생, 혹은 우주의 본질은 명확성보다는 불확정성에 있다. 삶이 명확한 것이라면 고민하고 방황하고 헤매는, 수고로운 인생을 살 이유가 뭐 있겠는가. 죽음만이 확실하다.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는 이들한테는 여전히 죽음 이후도 불확실하겠지만.
"과학이 멋진 일들을 해내긴 했지. 하지만 난 옳은 것보다는 행복한 게 훨씬 좋소."
기술 발전이 편리함을 주지만 그게 곧 행복은 아니다. 인생은 계속 골치아프다. 행복은 과학으로 정복할 수 없으니.
은하계의 모든 주요 문명은 다음과 같이 뚜렷하고 확연한 세 단계를 거친다. 즉 생존, 의문, 그리고 세련의 단계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왜, 그리고 어디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단계를 특징 짓는 질문은 '어떻게 먹을까'이고, 두 번째 단계는 '우리는 왜 먹는가', 마지막 단계는 '어디서 점심을 먹을까'이다.
문명이니 철학이니 뭐니 해도 결국 먹고사는 문제로 귀결된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문제는 사람이면 피할 수 없는 문제다. 생계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하고 먹을 것을 사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돈 문제에서 자유로울 사람도 없다. 내가 생존할 수 있는 힘은 돈이다. 미래의 문예창작을 위해 꾸준히 모아둔 돈은, 현재의 나를 먹고 살게 해 주고 있다. 소설은 단 한 줄도 안 쓰고 있는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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