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폴 오스터 지음
김경식 옮김
열린책들 펴냄
2001년 7월 발행
몇 년 전 일이다. 언제나 그랬듯, 주말의 영화를 보려고 TV를 켰다. 영화 제목은 스모크였다. 크레딧을 보았다. 웨인 왕 감독이군. 난 보기로 했다. 시나리오, 폴 오스터. 폴 오스터가 원작이다! 보자.
영화는 폴 오스터의 이야기 그대로였다. 인종화합, 거짓말, 우연, 사진찍기 등. 그의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것들이었다. 웨인 왕 감독은 사건보다 그 사건을 대하는 인물들의 감정을 영상으로 잘 표현한다. 그래서, 딱히 볼거리가 없고 등장 인물의 생각과 감정을 중시한 폴 오스터의 시나리오는 웨인 왕과 잘 어울렸다.
이제서야, 그 영화 [스모크]의 원작소설을 읽었다. 뉴욕 타임스에 실린 짧은 소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작가는 "사실만을 기록하는 신문에 꾸며진 이야기를 싣는다"(29~30쪽)는 것에 흥미를 느꼈고, 단편은 한번도 써 본 적이 없는 그가 드디어 이 소설을 쓴다. 생각의 꼬리는 이어져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쉼멜페닉스라는 시가 상표, 그 시가 깡통, 그걸 샀던 브루클린 가게, 그 가게 점원.
사실성 확보를 위해, 액자 소설 형식을 취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오기 렌으로부터 들었다."(13쪽) 여기에 작중 화자 나는 실제 작가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크리스마스 아침 자, 뉴욕 타임스에 실릴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쓰려 하고 있다. 해서, 나는 평소 친했던 오기 렌한테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하나 들려 달라고 하자, 오기 렌은 실화라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오게 렌은 똑같은 장소와 똑같은 시각에 똑같은 앵글로 날마다 사진을 찍어 앨범으로 묶어 놓은 걸 소설가 폴한테 보여준다. 그 흔하디 흔한 일상 풍경이 날마다 조금씩 바뀌는 모습, 그리고 사람들의 변화, 세월의 변화. 그 미묘한 변화를 보는 이상야릇한 기분이란! 정말 좋은 영화/소설은 사람들한테 삶의 의미를 묻는 거라는 걸 절실히 느꼈다.
문득, 사진이 찍고 싶다. 일상 생활을 사진에 담고 싶다. 무심코 지나치는, 삶의 흔적이 있는 일상 풍경 말이다.
이 책은 송파 도서관에서 빌려 봤다. 이 책 맨 뒷장에 누군가 이런 글을 연필로 써 놓았다.
사진은 흐릿하지만 고정적일 테고 움직임은
멈춰 있어 그 어느 것도, 내 존재나 내 비존재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오로지 삶 이전,
그리고 내 눈앞의 하늘만큼이나 가깝게 있는
삶 이후의 무한한 부동성이 있을 것이다.
-- 사진기, 장 필립 뚜생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는 재미는 이런 거다. 책뿐만 아니라,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의 흔적도 읽을 수 있다.
오늘 이 책을 반납하고 [동행]과 [스퀴즈 플레이]를 빌렸는데,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와 같은 손글씨로 책 맨 뒷장에 글이 있다. 이번엔 사인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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