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열린책들 펴냄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던 비둘기 사건이 터졌을 때 조나단 노엘은 이미 나이 오십을 넘겼고,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세월을 뒤돌아보며 이제는 죽음이 아니고는 그 어떤 심각한 일도 결코 일어날 수가 없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5쪽)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비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잠깐,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시작 부분을 읽어보자. "어느 날 아침의 일이었다.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레고르 잠자는 잠자리 안에서 한 마리의 큼직한 독벌레로 변한 자신을 깨달았다." 일상적인 생활에 익숙했던 그레고르 잠자와 조나단 노엘은 갑작스러운 사건 앞에서 당황한다. 또 그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고뇌하기 시작한다.
물론 두 작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문체는 완전히 다르다. 카프카의 문체에는 결코 위트가 없다. 냉소에 가깝다. 독일 작가라는 점과 도시 소시민을 주인공으로 했다는 점에서 같다. 존재의 근원을 파고드는 독일 문학의 전통이 파트리크 쥐스킨트에게 영향을 미친 모양이다.
<비둘기>는 한 경비원의 고독과 우울을 그리고 있다. 독자는 그를 통해 거대한 도시와 대중 속에 파묻힌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조나단은 유년기와 청년기에 불상사를 모두 겪고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파리에서 "길이가 3.4미터이고, 폭은 2.2미터이며, 높이가 2.5미터인" 방에서 혼자서 먹고 자며 은행의 경비원으로 일한다. 그러던 그에게 갑자기 출근길을 방해하는 녀석이 나타난다. 바로 비둘기다. 여기서 비둘기는 바로 조나단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보게 하는 거울이다.
"새는 고개를 비스듬히 옆으로 누인 채 왼쪽 눈으로 조나단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눈, 작고 둥그스름한 원반형이었고, 갈색에 가운데가 까만 그것은 보기에 너무나도 끔찍스러웠다. 그것은 마치 머리털에 꿰매어 놓은 단추처럼 보였고 속눈썹도 없는 듯이, 광채도 없이, 그냥 무턱대고 아무런 거리낌없이 끔찍스럽게 무표정한 시선을 밖으로 내던지고 있었다. …… 외부의 빛을 몽땅 빨아들이기만 할 뿐 자기 자신은 빛을 전혀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카메라의 렌즈처럼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살아 있는 흔적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할 눈이었다. 바로 그 눈이 조나단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죽을 만큼 놀랐다."(14-15쪽)
비둘기의 눈을 통해 조나단의 모습은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끔찍스러운 사람이다. 무표정해서 마치 죽은 것 같다. 그는 자신을 결코 타인에게 들어내지 않는다. 오직 지켜만 본다. 그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 놀란 것이다. 바로 우리 소시민의 모습이다.
"그에게는 사실 친구도 없었다. 또 은행에서의 그의 존재는 한낱 업무상 비치해 둔 물품 같은 신세라고 말할 수 있다. 고객들은 그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고, 그냥 은행의 부속품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슈퍼마켓이나, 거리에서나,(마지막으로 탔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버스에서도 그의 익명성은 다른 많은 사람들로 인해서 지켜질 수 있었다."(33쪽)
우리에게는 진정한 친구가 없다. 거대한 사회라는 기계의 부속품이다. 오직 익명성을 보장해 줄 많은 사람들 이외에 아는 사람이 없다.
"빌어먹을, 도대체 나를 왜 또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내가 무엇 때문에 다시 감시를 받아야 되는 거지? 이제는 제발 못 본 척 해주어서 날 좀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거야? 인간들은 왜 이렇게 남을 못살게 하는 거지?"(33-34쪽)
그나마 그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로카르 부인마저 그렇게 몰아낸다. 우리는 우리에게 호감을 갖고 다가오는 사람을 의심하고 배척한다.
은행 경비원 조나단은 따분한 근무 시간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행동을 쳐다본다. 그저 쳐다 볼 뿐이다. 더 이상의 애정도 관심도 없다. 타인의 삶에 우리는 영원한 방관자다.
"도시에서는 인간들의 시선을 피하려면 빗장과 열쇠로 잠금 장치가 잘 되어 있으며, 칸막이가 된 공간을 사용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55쪽)
그런 우리는 결국 고독할 수밖에 없다.
"조나단은 권총을 꺼내 어디로든지 한방 날리고 싶은 충동을 참기 어려웠다. …… 짓눌러서 숨막힐 것 같은 비둘기빛 청회색의 하늘을 향해 쏘고 싶었다. 그렇게 하여 하늘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서 납처럼 무거운 캡슐 같은 세상을 부서뜨리고……" (78쪽)
우리는 납처럼 답답하고 외로운 세상에 총질을 하고 싶지만, 그것은 희망 사항일 뿐 세상은 결코 그런 짓을 용납하지 않는다. 나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만, 이 거대한 도시 대중 사회는 그런 일을 가로막고 있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방황하던 조나단은 자신의 모습(비둘기)이 두려워 호텔에서 잔다. 자면서 자살을 결심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결말에서 작가는 비둘기를 날려 버리면서 주인공 조나단의 자살 시도를 없애고 그를 다시 도시의 소시민으로 돌려보낸다.
그 흔한 비둘기에서 도시인의 모습을 묘파한다. 청회색 하늘 아래 고독한 우리는, 비둘기다. 멀리 날고 싶지만 결국 공원에 있는 새집에 살아야 한다. 벗어나고 싶지만 우리는 다시 도시에 돌아온다. 우리는 외로운 소시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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