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Benim Adim Kirmizi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민음사 펴냄
2021년 발행
전자책
종이책으로 두 번 시도했으나 지루한 편이라서 포기했다. 같이 읽고 있던 책 '귀매'가 상대적으로 재미가 있었다. 도서관에 빌린 종이책의 상태가 불안하기도 했다. 오물이 묻었고 낱장으로 떨어질 것 같아 풀로 붙여야 했다.
전자책을 구매해서 읽을 때는 다른 재미있는 책이 없어서, 집중해서 읽을 수 있었다. 밤을 새워 가며 마침내 읽어냈다.
처음 시도했을 때는 4장까지 읽고 멈췄다. 도발적인 첫 문장("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과 장마다 바뀌는 화자는 흥미롭지만 이야기 자체는 지루했다.
두 번째 시도할 때는 책의 윤곽을 잡긴 했다. 살인, 사랑, 미술의 삼중주였다. 서로 얽혀서 진행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지루했다.
세 번째 시도는 전자책으로 읽을 때는 약간의 집착이 생겨서 어떻게든 통독하자는 식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외국 옛날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심지어 소설이긴 하지만 여전히 지금 여기와 통하는 것들을 발견했다.
커피의 안 좋은 점. 여전히 유효하다. "커피를 마시는 것은 죄악입니다. 우리 위대한 예언자 무함마드께서는 커피를 들지 않으셨소. 커피가 이성을 마비시키고 위궤양과 허리 디스크와 불임의 원인이 되는 사탄의 음료임을 아셨기 때문이지요."
위궤양, 그러니까 속쓰림은 알고 있었다. 허리 디스크와 불임은 전혀 몰랐다. 더 조사해 보니 너무 많이 마시면 그렇단다. 하루 다섯 잔 이상 이 정도.
내 이름은 빨강 14장 "이제 저의 눈은 이 세상의 더러움을 전혀 볼 수 없기 때문에 신의 모든 아름다움을 제 기억만으로 가장 순수하게 그릴 수 있습니다."
문득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 떠올랐다. 책이 책을, 소설이 소설을, 기억이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 신비로움에 감정적 따스함을 느꼈다.
내 이름은 빨강 20장 "베네치아인들은 모두 마치 전염이나 된 듯, 자신들의 초상화를 만들고 있었다. 돈과 힘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삶의 목격자 혹은 기념물이 될 초상화를 만들었고, 그것은 자신들의 부와 힘과 권위의 표시가 되었어. 그곳에서, 우리 앞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서로에게 알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고 특별하다는 걸 나타내기 위해서 말이다." 인스타잖아.
각 화자들의 말발 자랑대회다. 뻔뻔하게 말하는 것도 있고 화려하게 말하는 이도 있고 웃기게 말하는 이도 있고 철학적으로 말하는 이도 있고 유혹적으로 말하는 이도 있고 야하게 말하는 이도 천박하게 말하는 이도 있다. 말하는 이는 사람과 그림 속 동식물이다. 죽음도 있었다.
읽다가 몇 번이나 포기했던 소설을 갑자기 술술 읽는 재미는, 나 자신을 나 스스로 배신하는 기묘하고도 가학적인 쾌감이다. 지루하다고 더는 읽지 말아야지 해 놓고 재미있어서 더 안 읽을 수가 없었다.
내 이름은 빨강 37장 "모든 세계가 색으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것이 색임을 나는 보았다. 나를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하는 힘이 색에서 나온 것이고 지금 나를 사랑으로 껴안고 세계와 연결해 주는 것도 색이란 걸 깨달았다."
단테의 '신곡' 천국편이 연상되었다. "나는 그 깊숙한 곳에서 보았다. 우주의 조각조각 흩어진 것이 한 권의 책 속에 사랑으로 묶인 것을."(290쪽, 박상진, 민음사)
이야기 속 이야기가 있어서 천일야화 느낌이 났다.
이 소설의 백미이자 사실상 결말인 58장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연상되었다.
추리소설로는 별로였다. 트릭도 반전도 없었다. 추리는 그럭저럭이었다. 권선징악 정의실현은 있었다.
마지막 59장은 에필로그 후일담이다.
"삶의 행복을 바라보는 행복으로 대체한 겁니다."
회화보다는 이야기 글이 그 행복을 그려낼 수 있다는 투로 끝난다.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았지만 딱히 좋지도 않았다. 추천하기는 애매하다. 비추는 아니지만.
202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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